범냇골 성지순례
이승일 원로목사
사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 다시 범냇골 언덕길을 오른다. 세월의 물결 속에서 나 자신도, 내 자식도 어느덧 부모가 되었다. 이제는 조부모와 자식, 그리고 어린 손주들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한마음이 되어 동행하는 뜻깊은 성지순례 길이다. 젊은 날 목마른 심정으로 수십, 수백 번을 오르내리던 익숙한 골목길이었기에, 발걸음은 저절로 옛 기억의 이정표를 따라 망설임 없이 올라간다.
부산이라는 거대한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눈부신 변화를 거듭하며 상전벽해의 기적을 이루어 내고 있지만, 이곳 범냇골 만큼은 아득한 세월의 때를 그대로 간직한 채 멈추어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범일전에 들어서니 성지의 풍경 역시 옛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준다. 바위에 의지하여 흙벽돌과 C-ration 박스로 토담집을 지었던 ‘그 바위’는 유리벽으로 잘 보호되어 있어 반가웠다. 벽에는 낯익은 초창기 식구들의 사진이 정겹게 붙어있다.
40여년 전 참부모님께서 자녀분들과 함께 오시어 긴 시간 말씀을 주셨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때 자녀님들의 나이가 지금 내 손주들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장난치고 떠들며 소란을 피우다가도 참아버님께서 똑바로 바라보시면 금세 조용해져 의자에 정좌하던 모습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 시절 놓여 있던 소파 자리는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가꾸어져 있었다.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머리카락 솜털 보송한 어린 손주들이지만 이곳에 담긴 뜻을 전하고픈 마음에 진지한 심정으로 교회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좁고 초라한 공간에서 시작된 뜨거운 눈물과 서원, 그리고 원리원본 집필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로 이어졌는지, 그 고결한 신앙의 뿌리를 아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심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이 거룩한 유산을 상속받아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간절함으로 하늘부모님께 기도를 올렸다.
방명록에 온 가족이 정성스레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헌금을 드리던 순간,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작고도 위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겨우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손자가 용돈으로 받은 5만 원짜리 지폐를 망설임 없이 꺼내어 헌금함에 넣는 것이 아닌가. 돈의 가치와 쓰임새를 이미 알고 있어서 갖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어린 심정에도 이곳이 신성한 곳으로 느껴졌는지 기꺼이 바치는 그 순수한 정성에 벅찬 감동이 몰려왔다.
사랑스런 손자를 앞세우고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갔다.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역사의 현장, '눈물바위'에 먼저 도달했다. 나머지 가족들이 용변을 보느라 조금 늦게 올라오는 동안, 나는 너무도 자랑스럽고 고귀한 아이의 손을 잡고 눈물바위 위에서 손자를 위한 특별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늘부모님, 이 어린 참생명이 순수하고 지혜롭게 성장해 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고, 이 아이가 미래에 하늘의 큰 일꾼이 되도록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간구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자꾸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손사래를 치듯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기도에 더 집중해야지, 이 엄숙한 순간에 왜 이리 산만할까' 하는 마음에 나는 의도적으로 손자의 손을 더 단단히 잡고 기도를 이어갔다.
마침내 진심과 간절함이 가득했던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만 안쓰러움과 대견함에 말을 잃고 말았다. 한여름 산속에 잠복해 있던 모기들이 무방비로 서 있던 어린아이를 습격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기도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그 지독한 가려움과 통증을 참아내며 조용히 손만 빼내려 했던 아이의 깊은 속내를 뒤늦게 알고 나니, 기특함과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뒤이어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가족들이 눈물바위 주위에 모여들었다. 나는 이 신성한 바위에 얽힌 눈물과 땀의 사연, 그리고 척박했던 시절, 이 바위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부산항 부두를 바라보며 세계평화, 세계통일, 인류구원을 꿈꾸시던 참부모님의 심정과 대의와 높고 찬란한 기상을 뜨겁게 설명했다.
아쉽게도 사십여 년의 세월 동안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그때 시원하게 펼쳐졌던 부산항의 푸른 바다는 더 이상 눈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은 녹음에 가려졌을지언정,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부산항과 그 너머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넓고 선명하게 심정 깊숙이 느껴졌다.
찌는 듯한 한여름 더위에 이마와 등줄기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산속 새까만 모기들은 계라도 탄 듯 와글와글 덤벼들었다. 우산을 펼쳐 흔들며 모기를 쫓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느라 한여름날의 성지순례는 무더위 및 모기와의 전쟁 같았지만, 눈물바위 위에서 느껴지는 은혜의 파도는 더위와 모기 따위는 눈 녹듯 사라지게 만들었다. 온 가족이 연신 감사하고 감탄하며 참으로 은혜 충만하고 가슴 벅찬 시간이었음을 서로 나누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 숙소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그날의 해프닝이 드러났다. 땀을 씻겨주고 모기약을 발라주려고 가까이서 손자를 살폈을 때, 우리 가족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할아버지의 긴 기도 시간 동안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참아냈던 그 어린아이의 몸에는 무려 스무 군데가 넘게 모기 물린 자국이 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가렵고 아팠을까. 하지만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동안 아이는 그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환한 미소 속에서 신앙의 유산이 온전히 전달되었음을 느꼈고, 아이의 대견한 모습은 온 가족의 마음을 또 한 번 따스하게 물들였다.
"다음 성지순례는 모기떼가 기승을 부리지 않는 겨울에 와야겠구나."
웃음 섞인 혼잣말을 내뱉으며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자녀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한마음으로 엮여 유서 깊고 신성한 범냇골 성지를 함께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문의 진정한 영광이자 축복이었다.
오가는 길 위에서 아이들과 나눈 교회사 이야기와 깊은 신앙의 대화는 우리 온 가족의 영혼을 풍요롭게 채워준 더없이 귀한 선물이 되었다. 그날의 땀방울과 모기 자국, 여덟 살 손주의 순수한 헌금, 그리고 말없이 지어 보이던 빙그레 미소는 오래도록 우리 가족의 신앙을 비추는 따스한 등불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