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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4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미국 무인기·러시아 전투기, 흑해 상공서 충돌
미군 무인기와 러시아 전투기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이 닿아 있는 흑해의 상공에서 충돌해 미군 무인기가 추락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이미 우크라이나를 두고 사실상 대리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 사건으로 양국 간 긴장이 더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미군 유럽사령부는 보도자료를 내고 "(러시아의) SU-27기 2대가 흑해 상공 국제공역에서 운항 중이던 미 공군의 정보감시정찰(ISR) 무인기 MQ-9을 안전하지 않고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차단했다"고 밝혔다.
SU-27은 러시아 공군에서 운영하는 주력 전투기 기종 중 하나이며, '리퍼'라는 이름이 붙은 MQ-9은 정찰과 공격이 둘 다 가능한 무인기다. 유럽사령부는 이날 오전 7시3분께 러시아 SU-27기 1대가 MQ-9의 프로펠러에 부딪혀 미군은 무인기를 국제해역에 불시착하도록 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충돌이 벌어지기 이전 SU-27기가 여러 차례 MQ-9에 연료를 뿌렸으며, 그 앞을 난폭하고, 환경적으로 부적절하고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비행했다고 지적했다.
2023년 콜롬바아 탄광폭발 11명 사망 10여명 고립
2021년 가상화폐 비트코인 국내거래소에서 사상 첫 7,000만원 넘어섬(7,120만원)
2020년 코로나 19 확산 막기 위해 유럽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
스페인 국가비상사태 선언, 프랑스 식당 카페 상점 폐쇄 에펠탑과 루브르박물관 페쇄, 독일 모든 종교집회와 사교모임 금지 생필품판매점과 약국 주유소 제외한 모든 상점 영업중지, 말레이시아 코로나19 확산 막기 위해 ’2주간 전국 봉쇄령‘
2018년 블랙홀 연구의 권위자인 영국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세상 떠남(76세
2016년 러시아 참전 5개월 만에 시리아에서 철군
2014년 AI 살처분 가금류 1천만 마리 돌파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및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힘, 새 지도부 시대 개막
2012 티베트 승려 잠양 뻴덴 중국 쓰촨성 렙콩 시에서 소신공양
2011년 일본 원전 ‘방사능’ 비상
3·11 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후쿠시마(福島) 원전에서 사흘만에 2번의 폭발사고가 발생, ’방사능 공포’ 가 증폭되었다.
강진과 쓰나미의 여파가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폭발이라는 대형 악재로 번지면서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대지진 발생 닷새째인 15일,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이하 ‘제1원전’) 2호기와 4호기가 잇따라 폭발하면서 ‘방사능 공포’ 가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었다. 일본 정부는 대피 지역을 발전소 반경 20㎞에서 30㎞로 확대하고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일본 동북부 지역에는 ‘방사선 공포’ 가 확산되면서 이 지역을 벗어나려는 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특히 방사성 물질 공포의 진원인 제1원자력발전소가 자리 잡은 후쿠시마(福島)현의 공항과 터미널에는 표를 구하려는 수백여명의 주민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2010년 작곡가 박춘석 타계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는 1930년 5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의병(義秉), 춘석은 아명이다. 네살 때부터 풍금을 쳤으며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독파했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ㆍ베니 김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 1년만에 중퇴하고 이듬해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12인조 악단을 결성해 미8군 등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해 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장이 됐다.
1954년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 박씨는 ’아리랑 목동(박단마)’ ’비 나리는 호남선(손인호)’ ’삼팔선의 봄(최갑석)’ ’사랑의 맹세(패티김)’ 등을 발표하며 인기 작곡가로 부상했다.
특히 1964년부터 시작된 가수 이미자와는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를 비롯해, 30주년 기념음반 타이틀곡인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무려 500여 곡을 통해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박씨의 명성은 일본으로까지 이어져 19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측의 의뢰로 일본 톱 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도 곡을 취입해 외국인 최초로 신곡을 써준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가슴 아프게’ ’공항의 이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비내리는 호남선’ ’초우’ 등의 히트곡들을 만들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작곡가, 지구레코드사 전속작곡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 거성레코드사 사장 등을 거치며 1950~1980년대 한국 가요계를 이끌어온 그는 국내 대중가요 개인 최다인 2천700여 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KBS 방송가요대상, KBS 가요ㆍ가사ㆍ음반기획상, MBC 10대가요제 특별상, KBS 가요대상 작곡상, 제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1994), 옥관문화훈장(1995) 등을 수상했으며 2009년에는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박춘석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2003년 판소리 신동 김주리양, 판소리 9시간 20분 연창. 최연소ㆍ최장시간 신기록 수립
2003년 이창동 문화부 장관, “기자실 폐지” 발표 후 논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3년 3월 14일 취임 후 첫 기자 회견을 통해 ‘신 취재지침’을 밝힘으로써 세간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자실을 폐쇄하고 기자들의 문화관광부 사무실 출입을 제한하며, 공무원이 취재에 응했을 경우 그 내용을 즉시 보고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기자 회견에 대해 문화부가 언론과 관련된 주무부서임을 감안하면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노무현 정부식 ‘언론 길들이기’의 신호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며 시대에 역행한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신 취재지침’의 내용인 즉,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리겠다는 브리핑제·관계공무원 접촉을 방해하는 사무실 방문 금지·취재의 자유경쟁 막는 ‘공평의 원칙’·기자들과 공직자들의 소통을 차단·적극적 취재협조 막는 취재통보제와 실명제가 그 취지였다.
이 같은 발표에 대해 찬반으로 그 의견이 분분했으나, 있으나 마나 한 기자실을 없애는 게 ‘개혁’을 기치로 취임한 새 장관에게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돼야 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도 제기되었다.
2002년 탈북자 25명 베이징 스페인대사관 진입. 한국망명 요청
중국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 구내로 일제히 뛰어들어가고 있는 탈북자들.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 25명이 2002년 3월 14일 중국 수도 베이징의 스페인대사관에 진입, 난민 지위 부여와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
여섯 가족 22명과 별도의 개인 3명 등 모두 25명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오전 9시52분쯤 베이징 중심가의 싼리툰 대사관 구역에 위치한 스페인대사관 부근까지 관광 버스를 타고 와 관광객 차림으로 대사관 정문에 접근한 뒤 정문 앞에 있던 중국인 경찰을 밀치고 대사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철저한 사전 준비를 거쳐 기습적으로 ‘거사’를 단행했다. 이들이 스페인대사관 진입에 성공하는 데는 외국 인권단체와 인권 운동가들이 조직적으로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현장 부근에는 미국의 CNN방송과 AP통신 등 일부 외국기자들이 미리 연락을 받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의 진입을 취재했다.
이들은 한국행을 요구하다 15일 중국측에 의해 추방돼 필리핀에 체류하다가 18일 낮 12시40분쯤 대한항공 KE-622편으로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을 출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1999년 평생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재야운동가 계훈제씨 별세
원로 재야인사인 계훈제씨는 평생을 들판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문익환 백기완씨 등과 함께 재야 운동권의 원로로 손꼽혀 왔다. 1960년대에 한쪽 폐를 잘라내 바짝 마른 체구였지만, 시위 현장과 재야단체 모임에서 늘 앞자리를 지켰다. 세번의 투옥과 네번의 장기 도피생활을 한 그는 "주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속박"이라며 주민등록증을 평생 만들지 않았다.
계씨는 1921년 평안북도 선천 태생. 경성제대에 재학 중이던 1943년 학도병 모집을 거부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시절 반탁운동을 전개했고, 1947년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3공 시절에는 `사상계` 편집장, `씨씨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했고,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됐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계엄령 해제를 촉구했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2년 이상 도피생활을 했다.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1985년 민통련 부의장 등으로 재야 운동을 이끌었다.
1997년 방상훈 조선일보사 사장, 31대 신문협회 회장에 선임
1995년 러시아 소유즈 TM21우주선 발사
1994년 상문고 교사들, 상문고 비리를 공개하는 양심선언
교사들의 양심선언으로 상문고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울시 교육청은 1994년 3월 14일 서울 상문고가 지난 1986년부터 학부모들로부터 찬조금을 받고 특정 학생의 내신성적을 조작했다는 교사들의 폭로에 따라 상문고 비리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상씨는 지난 1986년부터 1993년까지 학부모들로부터 거둬들인 찬조금 중 학교조경사업비로 사용한 2억원을 제외한 15억1천8백만원과 보충수업비 6억4천7백만원 등 모두 21억6천5백만원을 횡령했고, 지난 1990년과 1993년에 학생 8명의 성적을 조작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업무상 횡령) 및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1994년 일본 신문제작 컴퓨터화(CTS) 선구자 엔조지 지로 별세
닛케이(日經) 신문의 전 사장이자 고문이었던 엔조지 지로씨는 지바현 출생으로 1933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경제신문의 전신인 중외상업신보사에 입사한 이래 평생 언론인의 길을 걸어왔다.
입사 8년만인 1941년 44세의 나이로 경제부장, 편집국장을 거처 1968년 닛케이 신문의 사장에 취임했으며, 1980년까지 6년간 회장을 역임했다. 닛케이 사장 시절 엔조지씨는 `경제에 관한 종합 정보기관`을 제창, 닛케이유통신문, 닛케이산업신문을 창간했으며 컴퓨터를 도입한 신문제작 자동화(CTS)를 일본 처음으로 시도, 세계 처음으로 납을 쓰지 않는 닛케이식 인쇄 시스템을 완성했다
1991년 낙동강 페놀오염사건
1991년 3월 14일 대구 시민들은 수돗물에서 나는 악취에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2주일 전에도, 또 2년전 쯤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대구시 상수도 본부의 답변은 "상수도물의 세균 오염을 막기 위해 염소 소독을 지나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수돗물에서 검출된 것은 클로로페놀이었다. 상수도 원수에 함유된 유해물질 페놀이 소독약품인 염소와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낙동강 상류의 구미공단과 김천 일대에 산재한, 합성수지-의약품 제조공장 100여곳이 페놀을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대구를 포함한 영남지역의 1000만 시민들은 불안 이전에 분노를 느꼈다. 페놀은 염료나 수지를 만들 때 쓰이는, 특유의 냄새를 지닌 무색 결정. 염소와 결합할 경우 화학변화를 일으켜 클로로페놀이 되는데, 농도 1ppm을 넘으면 암 또는 중추신경장애 등 신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극약으로 분류된다. 단순한 악취소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식수원이 죽음의 강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조사결과 두산전자 구미공장 등에서 공장 폐수를 낙동강에 쏟아버린 사실이 속속 확인됐다. 두산전자는 5개월 동안 300톤 가량을 방류한 것으로 조사됐다. 수돗물 오염의 여파는 낙동강 하류인 경남, 부산에까지 번졌고 두산그룹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하천의 수질관리와 수원지 관리의 문제점이 전면적으로 부각됐고 환경처 장차관이 인책 경질됐다.
1989년 교직원노조건설특별위원회 발족
1985년 학도 호국단 폐지
1983년 니메이리 수단 대통령
1980년 한미1군단,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로 개칭 발표
1980년 이슬람공화국 헌법에 의한 이란 국민의회 총선 1차투표실시
1979년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SS-18 개발
1979년 개헌심의위 발족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서 첫 강의
1975년 멕시코 대학생 반정부 시위
1973년 제2차 남북조절위 평양에서 개최
1972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
1970년 납북 대한항공 승객 39명 귀환
1967년 서울 남대문시장 고려백화점 화재 67개점포 소실.
1966년 `강강수월래`를 무형문화재로 지정
1963년 FAO, 기아가해방에 관한 인권선언
1963년 횡보 염상섭 사망
한국 근대소설사 초기부터 활동하여 1960년대 초까지 인간의 삶을 세밀한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묘사한 소설가 횡보(橫步) 염상섭(66)이 1963년 3월 14일 사망했다.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0년, 당시 신문학운동의 전위적인 동인체였던 '폐허'에서 문학활동을 시작한 그는 1921년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한국 근대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이후 `삼대` `만세전` 등 28편의 중단편과 1백50편에 이르는 단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등을 남겼다.
그의 소설은 종횡무진의 현실 비판적인 시각과 당시 서울 중류계층이 사용하는 다양한 생활어휘들을 풍부하게 담아 사실주의적 문체를 보여주었고, 여성화자를 등장시키는 등 한국 근대문학의 뼈대를 세웠기에 한국 근대문학사의 거대한 산맥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높은 봉우리이기도 하지만 동아일보 창간멤버와 조선일보 학예부장,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해방 후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초대 주필은 정지용)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염상섭은 일제하 게이오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 때문에 일본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 사회주의와 친일을 모두 비껴가는 중도의 길을 걸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식민지 현실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지만 평론가들은 '남북을 통튼 최고의 작가'로 염상섭을 꼽는다.
원래 호는 제월(霽月)이었지만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바르지 못하다고 친구들이 '횡보'라는 호를 붙여주었을 정도로 호주가였다. 남이 권유하면 일부러 딴짓을 해 횡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술에 관한 일화는 이밖에도 많은데 사망 직전에도 부인이 정종을 숟가락에 떠서 입 안에 넣어주어 죽는 순간까지도 술을 머금고 숨졌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 `일대의 유업`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 등이 있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1962년 세계 18개국 군축위 개최
1961년 시인 변영로 사망 - 시를 언어예술로 자각하고 기교에 중점
1960년 동서 10개국 군축위 개최
1958년 소련, 핵무기 실험 발사
1951년 일본, 상의원 길내내각 불신임안 가결
1951년 원주 지평리전투서 중공군 2개사단을 섬멸. 국군 서울재수복
1950년 한국은행법 국무회의 통과
1946년 남북간 우편물 연락개시(개성에서 매주 1회).
1944년 연합군, 몬테 카지노 폭격
1944년 급행열차 전폐
1939년 존 스타인벡, 소설 ‘분노의 포도’ 출간
빈민계층과 경제권을 빼앗긴 소수민족들의 이야기와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써 온 존 스타인벡이 1939년 3월 14일 그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를 출간했다. 책은 출간 즉시 정치-사회문제로 비화됐다.
농업의 기계화로 농토에서 쫓겨난 이동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변천하는 사회 양상과 함께 그린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결함을 고발해 소설에 등장한 인물들과 상황이 실상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스타인벡은 이주민들의 분노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고 해서 제목을 분노의 포도로 정했지만 이 표현은 성서 요한묵시록 14장 19절에 나오는 말이다.
소설에 대해 농장주들은 ‘검은 악마적 차조물’, ‘증오를 주제로 한 파괴적인 책’이라며 맹비난했고, 오클라호마 출신 하원의원은 국회에서 탄핵연설까지 했으며 대부분의 도서관은 정치적이고 외설이란 이유로 이 책을 금서로 정했다. 스타인벡은 이주민들의 참상을 증명하는 보고 기사를 사진과 함께 ‘라이프’지에 실어 반론을 펼쳤다.
사회적인 논란속에서도 ‘분노의 포도’는 초판이 이미 50만부나 팔려 나갔고 정부가 캘리포니아의 철새 노동자에게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는 평가와 함게 그에게 1940년도의 퓰리처상을 안겨주었으며 196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1937년 무솔리니 리비아 방문
1920년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작가 행크 케트첨 출생
1917년 러시아 임시정부 수립
1912년 창덕궁 박물관 준공
1910년 안중근에 여순지방법원서 사형선고 (3.26 집행)
1908년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출생
1900년 미국, 금본위제 채택
1892년 헝가리의 공산당 지도자 라코시 출생
1883년 독일 사상가 칼 마르크스 사망
독일의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가 1883년 3월 14일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런던에서 사망했다. 65세였다. 라인란트에서 유태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크스는 자유롭고 교양있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본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법학 역사학 철학 미술사 등을 공부했고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 바우어가 이끌던 청년 헤겔파에 가입,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로서 사상적 편력을 시작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제국으로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 파리, 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했으나, 혁명은 좌절되었고 그는 추방됐다. 계속된 망명생활로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궁 속에서 지내야 했지만 그는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미국 `뉴욕 트리뷴`지의 유럽 통신원으로도 일했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 정립한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했다. 1847년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가입, 강령인 `공산당 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했다. 대표작인 `자본론` 1권이 1867년 출판됐으나 2권과 3권은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가 출판했다. 당초 4권으로 출간할 예정이었던 부분은 카우츠키가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는 가난과 추방으로 점철된 삶을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혁명가로서 꿋꿋이 감당하며 당대 유럽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그 과정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게 될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수립했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의 세 가지 정신적 주조를 자양분으로 삼았다. 첫째는 독일의 고전 철학이고, 둘째는 영국의 고전 경제학이며, 셋째는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이다. 독일의 고전 철학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상속했고, 영국의 고전 경제학에서는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을 빨아들였으며, 프랑스의 사회주의에서 혁명의 이론들을 흡수했다.
그는 이 유산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써 과학과 철학의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는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했다. 자본주의는 자기모순에 의해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 밖에 없고, 공산주의 또한 자본주의에 이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 밖에 없다는 유물사관을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187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출생
1879년 3월 14일은 20세기 최고 물리학자로 알려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출생한 날이다. 독일의 울름에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위스 취리히 이공 대학을 마치고 연구에 몰두하여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 뒤 프라하 대학 교수와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16년에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여 물리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1922년에 광양자 이론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히틀러 독재 정권에 쫓겨, 193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연구소의 교수로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 폭탄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미국에서 원자 폭탄 연구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물리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1868년 일본 메이지유신 선포
1854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의학자 에를리히 출생
1854년 미국의 28대 부통령 마셜 출생
1823년 프랑스의 시인 방빌 출생
1804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 1세(1804-1849)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