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랬다.
신이 조금만 눈감아주었으면, 그런데 신은 나를 주저 앉히셨다. 곁에 준 아내도 고장 내고, 발목에 오랏줄 묶었다. 남의 꺼 훔친 적도 없고, 입에 욕 달고 살은 적도 없는데, 자녀들을 주고는 무능한 아비로 만드셨다.
왜? 왜! 왜...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선, 아무 것도 없게 하고선, 염치없이 안 죽고 버티며 살아보라고 한다. 허, 참,별나다. 당하면서보니 이 땅엔 그런 사람 참 많더라. 속으로 절망의 문을 삐거덕 빼꼼 열고 사는 사람들이...
2.
새벽 3시의 끝 무렵 아내는 나를 깨운다. 소변을 빼 달라고, 늘어졌던 몸은 돌아오지 않은 채 주섬 주섬 용품들을 꺼낸다. 고무호스 식염수 멸균탈지면 멸균 장갑 소변통.
‘아....지겹다!’ 문득 몰려오는 느낌, 거의 3시간 안팎으로 반복되는 끝없을 일상이...
이것은 꽃처럼 향기 나는 삶도 못되고, 소리 없는 전쟁이다. 나의 묵상은 소변통 버리러 화장실 가는 길에 시작되고, 소변통을 씻는 수도꼭지의 물소리에 끝이 난다.
남몰래 절망의 문이 쬐끔 더 열린다. 삐이걱... 그 문틈으로 지천에 긴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이 보일라나?
3.
오랜 가난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두 가지의 모습을 보곤 한다. 한 가지는 점점 무기력해져 바닥으로 주저앉는 타입, 또 한 가지는 점점 날카로워져 주변을 들이받으며 난폭해져가는 타입... 내게도 불쑥 불쑥 그런 충동적인 모습이 나타날 때면 참 괴로워진다. 오랜 질병과 싸우다 보면 자동으로 오랜 가난을 벗하게 된다. 세상의 흐름이 그렇다.
국가도 이웃도, 아무도 약자를 돌보지 않는 세상의 무심함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던 절망의 문을 조금 더 열어 제친다. 삐~걱!
4.
간밤에는 꿈을 꾸었다. 어느 날은 배낭을 메고 낮선 거리를 걷다 깨어나고, 어느 날은 아이들과 음식점에서 맛있는 것을 먹다가 깨고, 변함없는 건 언제나 그렇듯 침대 하나와 그 위에 누운 아내, 병실이다.깨는 꿈이 서러워...
하여 대낮에도 사라지지 않는 꿈을 그리기로 했다. 아픈 아내가 나아져서 일어나 앉은 모습을 그리고,아이들이 잘 견디고 좋은 어른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 이 사회가 약자를 돕고 정직한 사람들이 대접받는 모습도 그려본다.
제법 열린 절망의 문으로 거꾸로 희망이 들어올 수도 있다. 바닷물도 밀려나가기만 하지는 않는다. 나가면 들어오고, 들어오면 또 나가는 법!
- 다 괜찮다.
5.
살다보면 참아내기 힘들고 억울한 일도 있다. 선한 일을 하고 열심히 땀 흘리고 살면 마침내는 잘 살게 된다? 그건 드라마나 영화다. 실재 인생은 고생만 하다가 그냥 가기도하고 억울한 배신을 당하고 풀지도 못하는 경우도 숱하다.
슬픔위에 슬픔이 페인트 덧칠하듯 쌓이고 혼자만의 통증과 외로움이 마취도 없이 살을 도려내듯 아파도, 괜찮다! 괜찮다!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이건 시한부로 끝날 것이다!’ 하는 자연법칙.
때론 그것이 사람들이 살면서 열리는 절망의 문에 괴는 돌 하나가 되기도 한다.
6.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사는 세상이다. 말을 아끼는 까닭은 그중에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을 완벽히 가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하는 경우는 어쩔 도리가 없다. 약한 사람을 향하여 갖은 말을 다하면서 때론 사람을 살리고,때론 사람을 죽이는 강자들은 약자들의 힘 밖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약자다.
그럴 때마다 내 속의 문을 조금씩 열 수밖에, 넘칠지 모를 절망이 새어 나가기를 빌면서 절망의 문을...
7.
난 바보인가? 밉다 밉다 하면서도 돌아서 가는 등짝을 보면 서러워지니
난 바보가 맞나봐, 남에겐 괜찮아 하고도 속은 쫄아 붙어 끙끙대니
난 틀림없이 바보다, 365일씩 쉰 번을 넘기고도 아직도 못 믿어 안 믿어 하며 사니
난 바보가 분명하다. 누가 이 꼴 볼까 쉬쉬하면서도 근처에 누가 없나 외로움에 미어지니
난 바보인 걸 인정 한다. 살아서는 죽는 걸 기웃거리고, 때론 죽을까봐 살려 달라 매달리니
하지만 난 그런 바보 말고 진짜 바보가 되고 싶다. 나보다 현명한 분들이 지키며 살았던 신념! 철썩 같이 믿으며 헤헤거리고 살고 싶다. 비록 절망의 문이 왕창 한 번에 열려 날아가더라도!
8.
세상은 공평한가? 답은 세상은 공평하다! 나에게 어려운 것은 남에게도 어렵고, 나에게 쉬운 것은 남에게도 쉽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끝이 같지 않은 것은, 세상이 공평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좌절하면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장애인과 정상인을 같은 출발선에 세우고, 똑같이 100미터를 달리게 해서 상을 주는 지나치게 강제로 공평하게 집행하는 세상의 논리 때문이다.
늘 지고 사는 불리한 사람들은 조용히 속에서 문을 연다. 절망의 문을, 그럴 때마다...
9..
아는 분이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기로 예수는 빌라도에게 죽은 것이 아니고, 빌라도가 예수를 안 죽이려 내세운 강도와 예수 중 선택하라고 했는데, 예수를 죽이라는 예루살렘 사람들 때문에 죽었다"
세상의 배신자들은 늘 자기편에서 나온다. 적군에게서는 배신자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상처도 믿지 않던 사람들, 기대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안 당한다. 늘 가까운 친구와 이웃과 가족에게서 중상을 입는다. 그럴 때면 나도 나를 슬퍼한다.
절망의 문을 열어야 했던 숱한 기억중에서도 참담한 심정으로 열게 되는 경우다.
10.
산속으로 들어가니 너른 바위가 붙잡네. 곁에서 바위 되어 바위처럼 살자고
들길 걷노라니 온갖 꽃들이 부르네. 누가 보던 말든 한번 피고 지며 살자네.
이 한 몸 진득하지 못해 슬그머니 피하며 세상 속에 끼어보니 모두들 바삐 나를 추월하네.
아무데도 어울리지 못하고 발맞추지 못해 이 외로움은 괴로움 되네
홀로 애꿎은 문만 열었다 닫았다 하네. 절망의 문을,
11.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비도 많이 왔다. 그렇게 바라던 딸이 10년 만에 늦둥이로 태어난 축복의 해,백일이 채 안되었던 7월말 휴가철이었다. 오랜 위궤양과 직장암으로 판정이 났지만 너무 연로하셔서 수술을 않기로 하고 계시던 아버지를 찾아 하루 밤을 잤다. 한 달에 한 번씩, 그 해도 그렇게 하고 다음 날 강원도로 출발했다. 모래사장에서 축구를 하면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뛰어와서 급한 전화라고 넘겨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나도 지나고 보니 군대 복무중인 두 아들과 홀로 생활하고 있던 중학생 딸아이에게 자주 거짓말을 했다는 걸 느꼈다. 아내가 응급실을 몇 번이나 가면서도 ‘괜찮아’ 하거나 조금 불편하다는 정도로 둘러쳤다. 아내도 자주 나를 속인다. 몸 속의 통증이 심한데도 참고 참으며 말을 안 하다가 못 참을 지경이면 이미 응급실에 누운 뒤였다.
오늘도 가족 간에 사랑은 거짓말이라는 포장지로 예쁘게 쌓여서 배달이 된다. 나도 이제는 우리를 속이고 암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아파트15층 옥상에서 뛰어내리신 아버지를 용서해야겠다. 얼마나 우리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끌어안고 버티다 그런 결심을 하셨을까...
그 해 여름에 많이 열었던 절망의 문을 이제는 조금 다시 닫아야겠다.
12.
진실은 이거다. 세상의 절반이 ‘낮’일 때 나머지 절반은 ‘밤’이라는 것!
누군가는 이별의 슬픔에 하늘이 내려앉아도 누군가는 무지 행복해서 하늘로 두둥실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 한쪽에선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다른 곳에선 새 생명이 태어나고,
오래전부터 그래왔는데도 그걸 몰랐을 뿐, 내가 기쁘면 온 세상이 기쁜 줄 알았고, 내가 슬프면 온 세상이 슬프고 있을 줄 알았다.
틀림없는 진실은 이거다. '세상의 절반이 ‘낮’일 때 나머지 절반은 ‘밤’이라는 것!‘
세상의 반은 절망의 문을 열고 있고, 절반은 절망의 문을 닫고 있다는 것!
13.
몸뚱이 하나 고통의 바다 쉴 수 없는 뺑뺑이에 반기를 들고 몸살이 났다.
가장 미련하다는 코스 참다 일주일을 못 채우고 먹는 몸살 약
바람이 자지 않는다. 생각의 파도가 끝없이 헤 집는다 뒤틀리는 졸음의 무게를 거슬러 오르며...
커피 탓일 게다. 같은 입으로 약 한 봉지 넣고 같은 입으로 커피를 두 잔 세 잔...
때때로 모순을 자청하는 자고 싶은 고단함과 잠이 들면 안 되는 간병인의 하루치 현실
사는 게 자주 그렇듯...
이럴 땐 열려진 절망의 문으로 더 많은 절망이 밀고 들어온다.
14.
하루가 고단할수록 무심코 하늘을 보는 게 습관이 되어간다. 길을 걷다가도 보고, 병실 안에서도 창밖을 통해 보고, 비오는 날조차도 하늘을 본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하늘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 많다는 기적 한번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내일은 대책 없고, 여전히 오늘 내 심정은 파도치고, 그래도 땅을 보기보다는 하늘이 좋다. 필시 땅으로 먼저 돌아간 후 하늘로 가겠지만...
애꿎은 문만 빼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내다본다. 오라는 기적은 안 오고 절망이 우루루 그 문 틈으로 기어들어왔다.
15.
병원의 주차장 철망 아래 세멘 바닥에 정신없는 민들레 한 송이가 피었다. 세상에, 저 혼자 어디서 날아왔는지 그곳에서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고 꽃까지 피웠다. 달랑 혼자, 정말 정신 나갔다. 거기가 얼매나 메마른 곳인데, 오며 가며 주차장 매연에 얼마나 버틸까? 오래 못살지, 하면서 한편 버티라 응원했다.
그런데도 의연히 꽃피우고 홀씨 날리더니 날이 차고 말라 장렬히 사라졌다. 아무도 원망치 않고, 스스로 절망도 않고, 자기 삶을 다 살고 갔다. 아마도 나를 향해 보란 듯 지구에 왔다간
하늘의 밀서였나 보다.
16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아내의 친구가 준 포도주 한잔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요란한 잠속의 꿈들, 불면의 무거움보다 더 번잡한 잡 꿈들이 괴롭힌다. 좋은 꿈 바람이라야 하는데, 온통 바람나는 꿈만 끊겨진 조각필름들처럼 연달았다.
낮 동안 몰려드는 유혹들을 생짜로 버텼더니, 나쁜 놈들이 영악하게도 밤 속의 꿈을 노리나보다. 저항도 마음대로 못하는 가위를 타고 온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다시 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절망은 밤도 가리지 않고 몰려다닌다. 잠도 안자나? 징한 것들...
17.
내가 철없던 젊은 날에는 이런 주문을 했었다. 더 높은 이상을 주십사! 더 많은 지식을! 더 큰 일들을 해내고 싶다고...
잘못했다. 잘 몰랐다. 그저 날마다 한 번씩 오는 밤마다 단 잠 잘 수만 있으면 되는 건데
18.
오늘 나의 기도를 고친다. 아내가 병이 나아서 침대를 툭툭 털고 일어나 걸어가는 기적도 접고, 날마다 필요한 비용과 건강으로 내는 조바심도 배 째라 미루고, 넓은 세상 많은 사람들 평화를 나 혼자 비는 것처럼 씩씩대던 바람도 내려놓고,
다만 오늘 나의 기도는 밤이면 잠이나 제대로 자는 평범한 사람이나 되게 해달라고 고친다. 가볍게 쏟아놓고 별로 믿지도 않으면서 뒤돌아 살기 일쑤인 우리들의 기도. 사랑도 정직도 부재중이거나 부족중인 삶을 지나고 있다.
---------------------- 끝!
추신 :
그래도 희망을 가진다.
이른 새벽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일생을 부엌으로 밥을 지으러 가셨던 어머니, 아내들, 비가 오나 눈이오나 일터로 긴긴 세월을 나섰던 아버지, 남편 가장들, 그 지겹도록 흔적 없는 반복을 감당하셨던 분들에게 나의 존경을 드리고 싶다.
날마다의 소리 없는 전쟁을 상대로 요란하지 않게 묵묵히 살아내시는 분들께!
- 2013. 6. 14 슬픔의 땅을 딛고 기쁨의 하늘을 바라며...
첫댓글 나치하의
안네의일기를
보는듯~
눈에는
공감의눈물이흐릅니다
희망으로님!!!
저는 숨겨주는 사람이 있어서~~
아마 쉽게 죽지는 않을겁니다! ^^
이글속에 음악이
너무 아름답고 편안합니다
몸과맘이 고된상황에서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시네요
저는 너무나 웃깁니다
댓글을 쓸려고 볼펜을 찾았는뎅
사람들이 십자를 져야만 하느님 나라에갈수 있다고 , , , , , 하셨는데
저는 십자가를 져본적이없어가지공
잠은 많아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잠만자는 무지랭이 바보래요
아무래도 천국은 저에게 너무 멀어 . 멀기만 하니 . 워쩐대요 ?
비에님, 이 음악 다 들으시려면~
아마 한시간도 더 걸릴겁니다!
중국 오케스트라의 연주곡 시디전곡이라서!
(사실은 음악 많이 들으시라고 글 길게 만들었다는 전설이...음, ^^)
무엇이 님에게 상처를 주어서 떠나게 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건 용서를 구합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늘 종 올림
그렇지않습니다.
그저 내 평안치 못한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이 폐를 끼치는것 같아서요...
제 개별적 처지가 객관성과 공동선을 왜곡하려고 해서 잠시 멀리 물러납니다.
이것도 상처려니... 받아주시면 사랑의빚을 지겠습니다.
또 한 번 울컥 합니다. 나이들어가면서, 아니 사회복지에 입문한 이후 딱한 사람들이 주변에 참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무기력한 나... 뭘 할 수 있을까요? 그저 희망을 갖고 사시라고 할 밖에요. 야간 근무를 하는 날에는 어르신들을 돌보면서 쪽잠을 자게 되는데 그 심정 압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면 분노가 치밀기도 하겠지요.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라는 말 밖에는 드릴 수가 없네요. 건강 잘 챙기시구요...
감사합니다. 님께서 콘크리트 사이에 핀 민들레처럼
저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