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 용경(龍慶)공 내력 및 세거지 현황(주요세거지: 광양.사천.하동.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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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경공 후손 내력 및 세거지 현황
문민공(文愍公) 휘 일손(馹孫) 선생의 후손 11세(世) 휘 용경(龍慶)공은 조선 인조(仁祖) 때 가선대부 행 승정원 도승지(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 지금의 대통령실 비서실장)를 지냈고, 이괄의난(李适之亂)을 거치는 격동기에 운봉현 동면(雲峰縣 東面, 현 전북 남원시 인월면 취암리)에 낙향(落鄕)하였으며, 왜란(倭亂) 이후 황무지가 된곳을 개척해 터를 잡아 운봉 사대부 집안으로 번창하였다. 슬하에 자홍(自弘), 준(濬) 두분을 두었다.
- 운봉파(대파) 형성
12세(世) 휘 자홍(自弘)공은 한기(漢基) 한분을 두었고 13세(世) 휘 한기(漢基)공은 슬하에 해주(海周), 해달(海達), 해원(海元) 세분을 두었으며,
14세(世) 휘 해주(海周)공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추서되셨으며, 대략 1720년대에 하동청암(河東靑岩) 서재골(書齋谷)에 낙향(落鄕)하였으며, 슬하에 만형(萬亨), 천형(千亨) 두 분을 두었다. 15세(世) 만형(萬亨)공은 선영을 돌보기위해 운봉에 다시 돌아가셨으며, 후손들은 광양읍내(光陽邑內)에 세거(世居)하고 있고 15세(世) 천형(千亨)공은 하동청암에 남아 사셨으며, 후손들은 사천서포(泗川西浦)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14세(世) 휘 해달(海達)공은 명숙(明淑) 한분을 두었고 15세 휘 명숙(明淑)공은 초시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간관(諫官)을 역임하였으며, 노직(老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 받고 1780년대에 사천서포(泗川西浦) 대포촌(大浦村)에 낙향(落鄕)하였으며, 후손들은 사천서포(泗川西浦)와 고성하일(固城下一)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14세(世) 휘 해원(海元)공은 1730년대 사천서포(泗川西浦) 비토섬(飛兎島)에 입도(入島)했다.
- 하동파(소파) 형성
12세(世) 휘 준(濬)공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으며, 1650년대 하동비파(河東琵琶)에 낙향(落鄕)하였으며, 슬하에 사승(士承) 한분을 두었고 13세(世) 휘 사승(士承)공은 슬하에 상명(尙明), 수명(守明) 두분을 두었으며,
14세(世) 휘 상명(尙明)공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서되시고, 14세(世) 수명(守明)공은 진사(進士)에 급제한 선달(先達)이었으며, 1750년대에 광양도사(光陽道士)에 낙향(落鄕)하였으며, 후손들은 광양도사(光陽道士)와 고창낙양(高敞洛陽), 화순사평(和順沙坪)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로써 용경(龍慶)공 후손들은 전남 동부권(광양)과 경남 서부권(사천, 하동, 고성) 영호남 일대에 세거하고 있는 중이다.
▪️용경공 후손 세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