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웅이 되어라! 대학회③~72p
ㅡ회원에게 철저히 헌신하라!
사람들을 어떻게 이끄는가.
모든 조직이 그 해답을 모색했다.
초점은 사람.
이케다 회장은 홀로 다음 세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1968년. 창가학회는 확대되고 있었다.
광선유포가 약진함에 따라서 조직이 커질 때 그 초점은 무엇인가?
학회는 인재로 이루어진 성(城)이다. 따라서 리더가 조직의 발전과 규모에 맞게 성장하느냐
여부가 중요하다. 시대도 사회도 또한 변화의 때를 맞았다. 세계적인 대학 분쟁의 확산으로
상징되듯, 기성 '권위'와 '전통'이 불신당하고 있었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목적지가 불투명했고,
모든 조직이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을 대체 무엇으로 이끌고
어떻게 단결시키느냐. 어떻게 해야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그 초점은 무엇인가.
"사람들을 위해 현실에 얼마나 헌신하느냐. 그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여기에 현대의 모든
지도자가 직면한 과제가 있습니다." SGI 회장은 미래의 지도자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이 정도까지!" 하고 느낄 정도의 따뜻함과 자애로.
전국에서 대학부가 모인 하계강습회에서 왜 우리 도호쿠 대학회와 규슈의 대학회를 합동으로
결성했을까? 거기에 이케다 선생님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보면 도호쿠는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고 7년 동안 열다섯 차례나 방문하여
"인재의 성을 쌓아라!"고 유언하신 땅입니다. 그리고 규슈는 마키구치 초대 회장이 불멸의
발자취를 남기신 땅입니다. 초대, 2대와 연이 깊은 땅에 제3대 회장이 지방에서 가장 먼저
대학회를 결성해주셨습니다. 은사에게 인재의 대열을 갖춰 보은하자!
그러한 마음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때마침 점심때라 하계강습회에서 나눠준 도시락을 모두 함께 먹으면서 간담했다.
이케다 회장은 긴장한 표정의 참석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넸다. "모두 천천히 편안하게
하십시오. 식사 후에 한 모금 생각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회장의 말에 모두 웃었다.
솔직하고 숨김없는 회장에게 참석자들은 마음을 열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저를 한번 보자마자
"어디 아프지 않나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결핵으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말씀드리자
생명을 뒤흔들 듯이 격려해주셨습니다. "스물세살인가요? 내가 열여섯살 무렵일 때와 똑같군요.
결핵은 잠이 제일 중요합니다. 밤에는 일찍 주무세요." 그리고 저를 끌어안듯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셨습니다. 절대로 지지 말라는 자애와, 병마(病魔)를 반드시 물리쳐주겠다는
기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생명을 깎는 듯한 격려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큰형이 사업에 실패하고 실종되었습니다. 도저히 대학에
다닐 수 있는 경제상황이 아니었고, 설상가상 아직 입회하지 않은 어머니는 학회활동을 몹시
반대하셨습니다. 저는 이도 저도 싫어져 대학을 그만둘 결심으로 가족 상황을 이케다 선생님께
털어놓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리석었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자신의 일처럼 들어주고
"당신이 신심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머님 덕분 아닌가요? 그 은혜를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어머님을 소중히 하십시오. 저도 어머님이 신심하도록 응원하겠습니다.
당신 역시 아무리 괴로워도 힘을 내서 대학만큼은 졸업하십시오." 라고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격려해주셨습니다. 저 자신의 나약함이 한심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이것은 어머니를 위해서 드리는 거예요."라고 격려품까지 주셨습니다. 그날을 계기로
학회를 대하는 어머니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서 일주일 뒤에는 입회를 결심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부모도 미치지 못할 정도의 자상함으로, 어디까지나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대하셨습니다. 그 투쟁을 이어가자고 마음 깊이 맹세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건설현장에서 당한 사고 후유증으로 일을 못해 집안이 어려워, 저는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듯했습니다. 아버지는 괴로워하면서도 신심으로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어찌할 도리가 없는 제 무력함을 이케다 선생님께 털어놓았지요.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이 불법에서는 자식만 성불하거나 부모만 성불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부자일체로 반드시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은 반드시 성불됩니다. 당신이
열심히 하면 됩니다." 먹구름이 가시는 듯한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생명이 약동하면 고뇌가 사라진다. 선생님이 그 힘을 끌어내주셨지요.
이케다 회장은 참석자들을 죽 돌아보며 이렇게 지도했다.
"광선유포는 인간혁명을 기축으로 한 '총체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불법의 철리(哲理)와 자비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현실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총체혁명이라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총체혁명이라 함은,
여러분이 각 지역이나 각 직장에서 없으면 안 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상을 좇는 나머지 부평초 같이 되기 쉬운 우리에게, 발밑을 파야 인생과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샘물이 용솟음친다는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저를 일깨우는 지도였습니다. '총체혁명'은 우수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일이지, 저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케다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여러분 모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지도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장대한
구상과 우리의 현실을 이어주셨습니다. 사람은 현실생활이 스승의 로망과 직결했을 때,
힘이 용솟음친다는 점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중에 이케다 선생님이 '학회의 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괴로워하는 사람, 고뇌를 안은 사람을 격려하고 싶다."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함께 기뻐한다,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학회의 마음입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라지면 "관료주의 조직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명심하고 있습니다.
학업과 일, 학회활동 등 두세가지를 병행하는 일로 고민하는 멤버도 적지 않았다.
이케다 회장은 말했다. "힘들겠지만 어쨌든 공부도 일도 또 학회활동도 해내야 합니다.
모두 해낸 사람이 최종적으로 최고의 인생을 걸을 수 있습니다."
후쿠오카대학회 멤버가 당시 감동을 이렇게 썼다. "당시 저는 취직한 지 넉달째였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작은 회사에서 쉴 새 없이 일했고, 내일의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나날
이었습니다. 대학별 기념촬영을 할 때 제가 처한 상황을 이케다 선생님께 소상히 보고드렸
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고는 '그렇군요, 그래요.'라고 한마디 한마디
수긍하면서 들어주셨습니다. 저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제 생명을 뒤흔들 듯이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눈빛은 마치 저를
더할 나위 없는 인간으로, 마음 깊이에서 존경하는 듯했습니다. '존경에서 시작된다.'
고뇌에 빠진 사람도 일어서게 하는, 스승의 마음속에 있는 바를 눈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음 깊이 공감한 지도였습니다. 대학별 사진촬영 때, 저는 감동한 나머지 선생님께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세무사나 공인회계사가 되겠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래요! 열심히 하십시오. 그리고 합격하면 꼭 나에게 보고해주십시오."라며 저를
"경리부장, 경리부장"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훗날 세무사가 되었다고 보고했더니
선생님께서 또다시 격려해주셨습니다. 스승에게 한 맹세를 완수하는 인생의 기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자부 멤버가 "여성이 일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당시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아직 힘든 시대였지요. 이케다 선생님은 "여성이 일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옵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가 여러 가지 나옵니다. 그때에 좌절하지 말고 분발
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라고 격려하셨습니다. 훗날 대학교수가 된 제가 힘들 때
되돌아가는 원점의 지도였습니다.
나중에 열린 대학회 회합에서 이케다 선생님께 아나운서가 목표라는 말씀을 드릴 기회가
생겼습니다. 당시는 지금보다 여대생의 취업이 더 힘든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아주 혹독한 세계지만 열심히 하십시오. 앞으로 사회는 반드시 여성이 더욱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됩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그 한 마디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나중에 지역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되었는데, 선생님 지도 덕분에 끝까지 분발한 결과였지요.
도호쿠대학을 나와 아이치에 있는 회사에 취직한 멤버가 질문했다.
"현재 아이치에서 투쟁하고 있는데, 도호쿠의 광선유포를 위해 살고 싶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지도했다. "그러한 고민은 순수합니다. 그러나 신심이 조금 더 깊어지면
알게 됩니다. 본유상주(本有常住)입니다. 그 땅에서 성장하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세계와 통합니다. 예를 들면 간사이에서 온 여러 동지가 도쿄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그 투쟁이 도쿄와 함께 상승 간사이를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서
투쟁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투쟁하자는 것은 현실도피 사상입니다."
나중에 열린 대학회 회합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엄하게 지도하신 내용을 잊을 수 없습니다.
"높은 지위나 명성을 얻은 자가 '나는 본존님 덕분에, 학회 덕분에 위대해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망은(忘恩)입니다. '서민을 위해서!'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학회의 은혜, 은사에 대한 고마움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자칫하면 자신의 힘으로 위대해졌다고 착각하기 쉬운 우리에게 쐐기를 박아주셨습니다.
학생시절 도호쿠본부(당시)에서 열린 회합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청년부의 수행은 나후라의 수행"이라고 말씀하신 지도의 의미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나후라는 석존의 아들이라고 알려졌지요. 한번은
머리가 좋아서 아주 거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자기만큼 무엇이든 아는 자는 없다는 태도
였지요. 증상만(增上慢)입니다. 석존은 제자들이 있는 앞에서 '네가 무엇을 안다는 말이냐!'
하고 엄하게 야단쳤습니다. 그때부터 나후라는 다시 발심해서 '그래, 나는 설령 보이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온 힘을 다해 석존의 가르침을 광선유포하자.'고 자각했습니다.
뒤에서 지켜야 합니다. 남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층 인내심 강하게 꾸준히 애쓴 사람이
승리자가 됩니다. 그것이 '나후라'의 수행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공감을 일으키는
대화로 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만심을 정확히 바로잡아주셨지요.
1968년 10월 15일. 가가와와 다카마쓰시의 시코쿠본부(당시)에 에히메대학, 마쓰야마상과대학,
고치대학, 도쿠시마대학, 가가와대학의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가 모여 대학회를 결성했다.
처음에 이케다 회장을 중심으로 근행을 했다. 그때였다. 근행 도중에 이케다 선생님은
종을 치고 "근행소리가 작습니다. 근행은 낭랑하게 힘찬 목소리로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모든 멤버의 기원이 달라졌습니다. 광선유포의 스승께 호흡을 맞추고자 진지해
졌습니다. 근행을 마치자 선생님은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영광을 기원했습니다." 라고.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스승에게 호흡을 맞추는 기원. 선생님은 가장 중요한 신심의 근본을 가장 먼저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이렇게 지도했다.
"이런 기회를 통해 여러분을 알고 싶습니다.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등등. 그리고 선배로서
최고의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맹세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한사람 한사람과 악수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뵙기는
처음이었는데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몹시 감격했고 또
마음속으로 흠칫 놀랐습니다. '설마 선생님이 나를 알고 계실 리가 없을 거야.'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생님은 주위 간부에게 대학회 멤버의 됨됨이를
들으신것입니다. 상대를 알지 못하면 '최고의 조언'은 할 수 없다.
선생님이 어떻게 투쟁하시는지 그 일단을 엿보는 듯했습니다.
첫 대학회가 결성되고 불과 반년 후. 이케다 선생님은 시코쿠 땅에도 대학회를 결성
하셨습니다. 도쿄나 지방이나 차별을 두지 않고 기대를 보내주시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의 금자탑을 쌓도록 무엇이든 해주고 싶습니다. 일본과 그리고 세계를 떠맡는
사람이 되도록 응원하고 싶습니다. 유명하냐 수수하냐, 나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인생에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내 최고의 행복입니다." 감격했습니다.
선생님을 아주 가까운 존재처럼 느꼈습니다. 결국 스승과 제 거리는 저 자신의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인재는 멀리서 나옵니다. 가까운 곳에 있으면 안이해질 수가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시코쿠는 사카모토 료마가 있지 않습니까.
료마는 이제 옛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배출했으면 합니다.
시코쿠에서 인재가 나오기를 바랍니다." 생명에 새긴 지도입니다. 당시 도쿄의
니치다이강당 등에서 대학부 회합이 있으면 우리도 열심히 여비를 마련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회합에서는 도쿄나 간사이에서 온 참석자의 숫자나 기세에 비해 시코쿠는 인원도
적어서 '대도시에는 당할 재간이 없어…….' 하고, 어딘지 비굴해지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많은 인원이나 기세가 아닌 어디까지나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
그 한 사람이 소중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회장을 중심으로 한사람 한사람과 간담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갑자기 저를 보고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당시 저는 1년차 사회인이었습니다. 의약품 영업으로 각지에 있는 병원을 계속 돌아다녔지만
'이게 과연 나에게 맞는 일일까?'라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고민을 간파한 듯이
"당신에게는 좀 더 안정된 일이 낫지 않을까요? 만약 회사를 그만둔다면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그만둬야 합니다. 회사에서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만류하는 상황에서 사직서를 써야
합니다. 또 그만두고 나서도 '저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그야말로 무거운 차바퀴가 가볍게 돌기 시작하듯
업무에 힘썼고 나중에 희망하던 대로 이직했습니다. 희망과 의욕을 품고 전진하도록
마음 써주신 선생님의 자애에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시 저는 의학부 인턴이었습니다. 집 근처에 국립 한센병(나병) 요양소인 '오시마세이쇼엔'이
있어 그곳에서 생활하는 학회원을 아버지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그때 저는 막연하게 한센병을
앓고 계신 분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나요?" 라고 물으셔서 "외국에서 한센병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도 뜻밖이었지만 저는 그 순간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래요.
그러나 외국에 가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일본에서 조금 더 경험을 쌓으면 어떨까요?"
라며 "지금은 좁은 밭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밭을 충분히 경작해서 넓은 밭으로 만들고 나서
가는 편이 낫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사명의 길로 정했다면, 들뜬 기분이 아니라 진짜 실력을 쌓으라고 조언해주셨지요. 그래서
저는 대학교의 의국(醫局)을 거친 뒤 고치, 에히메, 가가와의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1975년 오시마
세이쇼엔에서 재직하기 시작해서 서른일곱살에 원장이 되었습니다. 또 미야코지마, 타이,
오키나와, 버마(현 미얀마)등지에서 경험을 쌓고 1999년 다시 이곳 오시마세이쇼엔으로
돌아왔지요. 현재는 명예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선생님과 나눈 맹세대로 산다! 거기에 사명의 인생이 있다고 실감했습니다.
1968년 10월 16일. 오카야마시에 있는 주고쿠문화회관(당시)에 히로시마대학, 히로시마공업대학,
오카야마대학의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가 모여 대학회를 결성했다. 그 뒤 시내에 있는 오모테쵸
로 이동해서 이케다 회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이어서 간담회를 열었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때로는 이렇게 깊어가는 가을 밤에 천천히 대화를 나눈다. 나의 벗과"
"여러분 나이 때에는 (결핵으로) 잘 먹지 못했습니다. 나는 체력이 가장 약했을 때
가장 많이 일했지요." "학생들과 대화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한창 대화의 꽃을 피울 때
회합실 문이 쓱 열리고 간부가 참석자 한 사람에게 메모 두장을 건넸다. 저는 이케다 선생님께
전하라는 간부의 귓속말을 듣고 선생님께 메모를 전해드렸습니다. 선생님은 메모를 보고
"방금 들어온 뉴스에서 북폭(北爆,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의 북베트남 폭격)정지라는 소식이
보도되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라고 말하며 당시 미국의 움직임도 간단
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학회 내부의 사건뿐 아니라, 세계와 시대의 조류라고 할 사건과
뉴스에 민감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다음 세대를 짊어질 우리에게 장군학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다음 세가지를 말해두겠습니다."라고 전제하고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말했다.
"하나는 몸을 소중히 여기기 바랍니다.
두번째는 공부는 낙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케다 선생님이 제시한
세번째 지침은 "신심만큼은… 힘겨울 때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하십시오."
라는 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신심만큼은 관철하십시오. 그것만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행복을 구축하는 길입니다." 라고 지도하셨습니다.
기원과 같은 스승의 기대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어머님은?" 하고 물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전시 중에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의 폭발중심지에서 약 2킬로미터 지점에서 피폭
당했습니다. 배 속에 있던 저도 피폭당해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의사가 운동을 제한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히로시마 안에서 취직할 곳이 적어 외부에서 찾다 보니
어머니와 떨어져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을 간파하신 듯 어머니 건강과, 경영하는
다과점 사정을 물으셨습니다. 선생님은 "고생하는 어머님을 위해 효도하십시오. 어머님께 효를
다해야 합니다."라고 자상하게 격려하셨고 또 "모두 이 멤버의 어머님이 하시는 다과점에 가세요.
알겠지요?"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마음속 구름이 확 걷히는 듯했습니다. 다음 해 3월,
다시 대학회 회합이 열릴 때 선생님은 저를 보고 "밝고 건강해졌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철저하게 계속 격려하는 스승의 행동을 이어가는 일이 제가 선생님께 보은 감사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어떤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날 질문한 멤버는 18명이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약 3시간에 걸쳐 전심전력으로 지도
하셨습니다. 인재를 발견하고 인재를 육성하고자 하는 선생님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일찍이 선생님은 야마구치 하기에 있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요시다 쇼인이 세운 사설 학당)를
방문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시대를 창조하는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은 '사제'라고
지도하셨습니다. 대학회 결성은 실로 쇼카손주쿠와 같이 얼마 안 되는 인원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리더를 육성하겠다.'는 스승의 기백이 담긴 모임이었습니다.
공대 2학년이던 저는 일찍이 이케다 선생님이 "21세기 지도자는 컴퓨터와 어학과 신심이 필요
합니다."라고 지도하신 이유를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컴퓨터에는
자비가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한 마디에 깜짝 놀랐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명쾌하게
지도하셨습니다. "컴퓨터는 색심(色心)의 이법(二法)에서 '색'의 최첨단입니다.
신심은 색심의 '심'입니다. 자비는 제목으로 생명에 용현합니다. 따라서 신심이 있는 사람이
컴퓨터를 사용해야 '색심불이(色心不二)'입니다. 물론 어학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자신이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심이고 '인간혁명'입니다."
선생님은 "나는 도다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도 공부하십시오."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대학회를 결성한 그 자리가 바로 불법의 견지에서 만반의 학문을 배우는
'이케다대학'이기도 했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말했다.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여러분과 친해질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스며들듯 그렇게 알아가고 싶습니다." 멤버들은 경탄하고 기뻐했다.
회장이 그토록 자신들을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케다 선생님은
한사람 한사람이 진정으로 실력을 쌓도록 격려하고 진심 어린 기대를 보내셨습니다.
나중에 지방판 세이쿄신문 기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히로시마를 방문한 이케다 선생님이
"아무거나 괜찮으니 기사를 써보세요. 그리고 내가 검토할 테니 곧장 기사를 제출하세요."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원고용지를 앞에 두고 그때만큼 실력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무튼 뭔가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원고를 살펴본 선생님은 "문장은 새로운 말, 새로운 표현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한 마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손때 묻은 문장으로는 안 된다. 실력을 쌓자. 진짜 실력을!'
선생님은 그렇게 세이쿄의 기자로서 제 인생의 원점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스케일 작은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일류 인재가 되십시오."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당시 의학부에서 공부하던 저는 이 지도가 생애 지침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은 제게는 말을 더듬는 고민이 있어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선생님의 격려를 가슴에 품고 의사 국가고시를 목표로 도전했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돼서 도쿄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우연히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오카야마대학회입니다."
라고 인사드리고, 의사가 되었다고 보고하자 선생님은 "의사다워졌군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는 아직 말을 더듬는 습관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그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자신감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이듬해, 이케다 선생님이 다시 대학회 회합(3월)을 열어주셨을 때 일입니다.
선생님은 갑자기 "함께 영화를 보러 갑시다!"라고 제안하셨습니다. "뭘 볼까요?"라고
의논하다가 마침 그때 상영하던 희극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모두 깜짝 놀라서인지
몹시 기뻐서인지 한데 뒤엉켜 영화관으로 갔습니다. 저는 끝까지 회합실에 남아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누가 이곳을 정리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행사담당은
있었지만 본디 저희가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작은 일,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마음을 쓰고 배려하는 책무를, 선생님은 엄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구마모토회관의 한 회합실에서 이케다 회장 슬하에 구마모토대학회 21명, 구마모토상과대학회
20명으로 대학회를 결성했다. 결성식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이야기를 건넸고 정말 따뜻한 분위기에서 질문회를 했습니다. 저는 "부원을 어떻게 격려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고민할 필요 없어요.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요. 그러나 자기답게 하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격려하면 됩니다.
착실하게 하십시오. 진심을 담아 격려하십시오." 결성식이 끝나고 나서는 "현관까지 함께
갑시다."라고, 현관에서는 "또 만납시다."라며 끝까지 격려해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어떻게
부원을 격려하느냐.'를 선생님은 자신의 모습으로 직접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성실하게,
어디까지나 진심으로. 스승의 행동을 이어가자, 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저는 이케다 선생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발표한 연구성과였지요.
그 전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선생님은 우리 가족을 격려해주셨고, 그 덕분에 그 성과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간담이 끝나고 기념촬영을 할 때가 되자 저는 갖고 있던 연구성과
를 선생님께 "선생님 보십시오."하고 내밀었습니다. 제멋대로 한 행동이었는데 선생님은
"그래요! 넓은 곳에서 봅시다."라며 모든 멤버와 빙 둘러서서 논문과 도면까지 찬찬히 살펴보셨
습니다. 내용은 스이젠사 조주엔(水前寺 成趣園, 구마모토를 대표하는 공원)의 역사적인 고찰
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황송할 정도로 열심히 논문을 살펴보셨고 "스이젠사 조주엔은
옛 주요 도로이던 도카이도의 쉰세 곳의 역참을 본떴다고도 하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구마모토의 역사에까지 조예가 깊으신 데 감탄했습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한 기분과 함께 더욱더 실력을 쌓자고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나중 일이지만 이케다 선생님께 결혼을 보고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웃으며
"부인께 무언가 드리고 싶군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몹시 황송해서 "아니, 괜찮습니다."
라고 대답한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은 나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겠지만
나는 당신이 아니라 부인에게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다는 말입니다."라고 타이르듯 말씀하셨
습니다. '마음 깊이 숨어 있는 자신의 이기주의'를 생명 깊이에서 반성했지요.
대학회 결성식에서 선생님은 "일류 인물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바로 진짜가 되는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1978년 이케다 선생님이 기리시마에 있는 연수센터를 방문하셨을 때 일입니다.
선생님은 저를 비롯해 스태프 한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고개를 숙여 격려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타인에게 헌신하세요, 잘난 체하면 안 됩니다, 회원의 마음을 헤아리세요.'
라고 가르치시는 듯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대학회 결성식에서 "서민의 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왕자의 마음도 각지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셨습니다. 철저하게 회원을 위해,
회원 제일로. 그리고 스승을 위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지도자상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간담하던 도중에 이케다 회장은 "오늘은 말이지요."라며, 갑자기 생각난 듯 이야기했다.
"다바루자카에 다녀왔습니다." 이날 회장은 다바루자카 격전으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위해
추선 제목을 했다.(중략) 다바루자카에서는 양쪽 군대 모두 합쳐 약 7500명이나 되는 젊은
목숨이 산화했다고 한다. "내리고 또 내리는 비에 인마(人馬)는 젖어드네. 넘으려 해도
넘을 수 없는 다바루자카……" '다바루자카'라는 노래는 사쓰마군의 패전이 확실해 졌을 때
본진에 패배를 전하는 전령이던 청년이 부른 노래다. 은사 도다 제2대 회장은 '다바루자카'
노래를 좋아했다. 은사는 종종 청년과 함께 노래 부르고 또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그리고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서거하기 두달 전, 은사는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때의 모습을 회장은 이렇게 쓰고 있다. "격전으로 지친 청년이, 죽은 동지를 위해 전령을
완수하려는 모습을 통해 (도다)선생님은 강하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청년부는 살고 또 살고,
꿋꿋하게 살아서 민중의 낙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소한 실패로 몸을 망치는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됩니다!'"
대학회 결성식 날에 이케다 선생님이 다바루자카를 처음 방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바루자카는 구마모토 동지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지요.
정확히 10년 전인 1958년 11월, 구마모토지부 결성식이 끝나고 나서 선생님은 '다바루자카'를
노래하자고 제안하셨고 대표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생님은 "또 한번" "다시 한번 더"라고
여러 번 노래를 경청하고 "넘으려 해도 넘을 수 없는 다바루자카.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광포의 투쟁은 넘지 못하면 퇴전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설령 혼자가 된다 해도 넘어야
합니다!" 라고 구마모토 동지에게 광포 확대의 대정열을 심어주셨습니다.
설령 혼자가 되어도 광포의 산을 오르는 그 한 사람을 선생님은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리더'는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에 희망과 용기를 샘솟게 하고 발심을 끌어내면서, '결과'에는
자신이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그 사람 밑에 비로소 따뜻한 피가 통하는 조직이 완성된다.
이케다 회장은 홀로 그 모범을 보였다. 은사가 돌아가신 뒤 《젊은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1959년 7월) "수뇌들은 회원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사색해야 한다. 자신을 버리고
회원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러한 자세로 호소해야 모두 흔쾌히 따를 것이다.
간사하고 약삭빠른 간부는 되지 마라. 회원이 불쌍해진다. 홀로 고뇌한다."
'이토록 헌신하는가!' 라고 감탄할 정도로, 다음 세대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한다.
거기에 리더가 육성된다.
그것이 불이(不二)의 사람이다.
거기에 피가 통하는 청년학회가 확대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없으면 안 될 사람으로 성장하라." (1968년 8월 7일, 시즈오카)
청년이여, 이 보성(寶城)에서 씩씩하게 사회로 진출하라. (1967년 3월, 오카야마)
"신시대를 전망하면서 한층 마음을 합해 전진해야 할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