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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토성을 통해본 한(漢)나라 문화의 혼재와 교류사이>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현재 평양 일대에서의 낙랑토성과 고분 및 이에서 나오는 여러 출토 유물을 통해본 한나라문화의 혼재를 < 1.시기적으로 한나라의 세력이 커지면서 증대되는 교류로 볼 것인지, 아니면 2.한나라의 실질적 식민 지배지적 영향력의 직접적 결과물인지>가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며 위치와 더불어 여러 견해들이 나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점과 더불어 오늘날 중국이라는 용어 아래 동북아 고금의 모든 역사와 문화를 중공의 일원적 세계관 아래 흡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 현재 조선족 자치구를 이유로 얼마 전 농악이 버젓이 유네스코에 중공문화로 등재 이후 학춤, 장구, 그네뛰기등의 등재를 계속해서 추진중으로 상당히 심각한 마구잡이식 비상식적 문화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슴- 과연 중국식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단순히 이런 그들의 일원적 시각에 동조하여 소위 한반도 이외의 것은 다 중국식이라는 문화로 받아 들이는 식의 용어의 재검토와 상투적 사용에 대해 심각한 화두로서 다시금 짚고 넘어 가고자 합니다.
평양시 낙랑구역 토성동 토성(土城洞 土城)은 낙랑군의 소재지로 현재 추정하며 토성의 남쪽에는 동서 8㎞, 남북 4㎞의 범위에 낙랑군 시기의 무덤 2,000여 기 이상이 분포하며
이외에 더 적은 규모들의 평남 온천군 성현리 토성,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토성, 신천군 청산리 토성, 봉산군 지탑리 토성- 낙랑군 토성과 비슷한 크기로 대방군 치소로 추정-, 함남 금야군 소라리 토성 등이 군이나 현의 치소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현재 우리가 남한에서 가지고 있는 평양 일대의 낙랑에 대한 연구 시각이나 데이터의 뼈대는 어디서부터 실제 시작되었는가?
1935년 봄과 가을에 각 1회씩(1·2차), 1937년 1회(3차) 등 총 3회의 발굴조사가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당시에는 간단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44년 평양 낙랑연구소가 한 차례 더 조사하였을 때에 중앙 대지의 남쪽에서 전돌이 깔린 유적을 발견하였다고 전합니다. -당시에 이곳의 발굴도 100여기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유물과 유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제대로 된 종합성을 가지지 못한 채 간소한 결론도출로 이 데이터가 오늘날까지 거의 기본 뼈대로 현 우리나라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준. -그리고 이후 북한학계는 3000여개의 대대적인 고분 발굴을 통해 현재 이 관련 정보가 전해지고 있지만 남북한의 교류미진으로 우리 학계에서는 나름의 의혹의 시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은 평양이라는 도시의 중요성으로 이곳만은 고고학적으로 상당한 발굴노력과 성과치를 만들어 내어 데이터를 쌓아 놓은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결론으로 들어가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 평양 일대를 한나라의 식민지배적 역사의 공간이며 결과물로 보고 있는 보수적 지지자들의 주장과 시각을 보면 실제 근원적인 고찰 노력보다는 이후 다른 반대 급부들이 나올 때마다 그때 그때 선회하는 주장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반대 급부적 특성으로 학설이 발전하는게 기본 방식이긴 하지만 시대적 상황과 미진한 결과물속에서 안이하면서 당연하다는 태도아래 재생산만을 해되는 보수 지지자들의 태도에 눈살이 찌푸러지는게 솔직한 심정. 물론 최근에 직접 일본에 있는 일부 토기 관련 연구를 통해 평양 일대의 토기 문화가 이후 남부 및 백제초기 토기 형성등에 교류와 영향력을 보였다는 논문들이 나오고 있는 활동들이 보이고 있기는 합니다.-
오늘날 와서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가 아니며 위만 조선의 함락은 평양이 아니라는 식의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혹은 평양 일대가 중계무역소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요.
이러한 배경에는 낙랑토성 일대의 문화와 인프라가 가지는 이해되지 않는 문제점들이 분명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평양일대의 여러 토성들중 낙랑군의 소재지로 추정되는 토성동 토성은 둘레가 1.5km 정도로 0.12㎢입니다. 그리고 중공식 평지성도 아니고 평산성입니다. 게다가 평산성이니만큼 구릉지대가 있기 때문에 실제 가용면적은 0.1㎢미만입니다. 많이 살면 약 1500명 정도로 이것도 좀더 과장을 해서 말한 것입니다.
5만7천명의 한나라 군대가 고조선을 멸망시킵니다.(BC108)
그리고 한사군을 설치합니다. 이 중에서 낙랑군은 313년까지 존속하게 되고,
한반도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한반도 북부는 고대부터 문화가 발달한 지역입니다.
그 지역 일대를 지배했던 한나라는 낙랑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심의 치소가 토성동 토성(낙랑토성)의 인프라입니다.
그럼 다른 한반도내에서의 도시 인프라를 볼까요?
문명이나 정치력에서 낮다고 보는 한반도 남부는 어떤 상황이였을까요?
대표적인 백제 초기의 토성인 풍납토성은 길이 3.74km, 원래 높이 15m에 너비는 최대
70m입니다. 해자의 경우 최대 50~60m로 거대한 성벽을 가진 성입니다.-흔히 3.5km로 알고 있지만 정확한 크기는 3.74km , 거주할수 있는 추정인구는 1만명-
성벽 여러 군데 연대 측정한 결과 가장 늦은 시기가 3세기이며
풍납토성의 경우 연대측정을 하면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성벽 최하부까지는 아직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축(최초로 축성)한 것은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즉 백제라는 고구려에 분화된 세력이 들어 오기전 기원전 1,2세기경에도
한반도 남부는 이런 기본 뼈대를 만들 정도의 정치력과 규모의 인프라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 한일 역사 왜곡을 시정하라고 만든 새역사 모임이라는 곳에서는 일본학자의 주장을 받아 우리나라 학자도 대방군 치소라는 또 해괴한 주장을 말하는 이도 있더군요-
3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백제 전기의 토성인 몽촌토성 역시 둘레가 약 2.7㎞ 로
낙랑토성의 2배에 이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고구려에서 나온 백제는 고구려 건국 초기의 세력으로 완성된 정치세력이 아니기에 상당히 힘든 핸디캡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북부의 선진적인 문명보다 낮은 수준의 남부 공간에서 평양일대의 가장 큰 규모와 중심지라는 낙랑토성을 비롯한 여러 토성보다 더 큰 규모의 인프라를 실제 만들어 냈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고구려의 경우도 3경 중 하나가 한성입니다. 황해도의 한성은 늦어도 4세기 중엽에 도시가 건설된 곳으로 최소 1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졌다고 여겨지며 도시 면적은 4km*4.5km입니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도시 건설에서 평양의 낙랑군보다 불리한 위치-
낙랑토성은 풍납토성뿐만 아니라 백제 초기의 일개 토성에 불과한 길성리보성의 절반 크기에도 안됩니다.심지어 청동기시대 한반도 남부의 취락 유적보다도 크기가 작습니다.
토성 크기 가지고 뭔 저울질 하냐 하는 소리를 하겠지만 이것은 유물 이상의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는 부분입니다.
한나라의 일반적인 군치소는 5~6km 정도에 평지성입니다.
낙랑군의 경우 많아야 1500명에서 천명 정도이지만 보통 한나라의 보통 군치소는 2만 5000명 ~ 3만여명 정도가 살 수 있습니다.
낙랑군을 가지고 "중공의 변방이니까 토성이 작을 수 있다"라는 주장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다고 가정할 경우 낙랑군은
현재 북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이라는 것은 313년 멸망할 때까지 무려 420여년간이라면
그야 말로 명실상부한 한반도 남부보다 문명적으로 앞선 북부의 중심도시가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의 한반도 남부의 백제의 초기 토성들부터 고구려성등과 비교해서도 이 평양 일대의 행정 인프라들은 기존의 한사군적 사서적 시각의 식민 지배지적 정치력이나 존속기간과는 맞지 않는 분명한 결과들이 노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낙랑군은 무역중개소일 뿐이기 때문에 토성 규모가 작다.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낙랑군이 무역중개소라거나 명목적으로만 존재했다는 근거는 사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실제 북한에서 한사군의 명확한 식민지배적 치소들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나오는 대안들입니다.
우리쪽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한의 이른시기 토성들을 이야기 하자면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팽이형토기시대의 것입니다. 또한 이들 토성이 있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평양은 또 다른 특이사항이 있는데 취락밀집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북한의 경우 역사 인프라가 매우 취약하지만 평양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발굴했습니다..
평양 주변의 대동성 유적은 이런 토성 이외에도 1만4000여기의 고인돌을 비롯해서
30개가 넘는 취락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이들 취락 유적 중에서 표대 유적의 경우 60만제곱미터로 북한에서는 도시유적으로 말하고 있죠. -청동기 시대 이미
현재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의 발상지라는 요하문명에서는 이미
흥륭와만회취거촌락유지에서 보이듯 세계최고의 농경 취락이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기원전 4천년경) 보다 더 이르고 더 큰 규모에 성곽의 기본 개념인 해자형도 갖춘 매우 정교한 도시형 취락이 등장하고 있으며 홍산문화 만기에 요동 길림성 통화현 여명문화(黎明文化)에도 같은 형태의 신전 제단 고구려식 적석총 양식이( BC3500 - 3000년) 보고 되고 있어 이들 세력의 요동 진출이 이른 시기부터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요서 우하량 2지점에서 나오는 석관묘 양식은 청동기 시절 요동과 한반도에 나오는 전형적 양식인 고인돌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① 소하서문화(小河西文化, 기원전 7000~6500년) ② 흥륭와문화(興隆?文化, 기원전 6200~5500년) ③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년 이후) ④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5000년) ⑤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4400년) ⑥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3000년) ⑦ 소하연문화(小河沿文化, 기원전 3000~2000) ⑧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 기원전 2200~1500년) ⑨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 기원전 1500년 ~)
현재 평양일대의 사람들을 낙랑인이라는 용어로 다시 재창조해 냈습니다
이런 용어가 왜 나왔을까요?
현재 이 평양 일대에는 또한 토착세력의 힘이나 특징이 여전히 강하게 나오고 있다는 점입
니다. 수천개의 고분들의 주인역시 -당시 한나라의 관리들은 파견지에서 돌아와서 기본 고향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본지에서 장례를 치릅니다. -즉 이곳의 수천개의 고분들의 주인은 한나라 관리가 아닌 토착세력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평양 정백동등에는 고조선의 전형적 칼집이나 검집문양의 형태가 기원전 1세기에도 나오고 있으며 세형동검은 기원후 1세기 경까지도 출토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초기의 나무곽무덤단계에서는 한나라적 영향보다는 고조선이래의 전형적 세형동검형 문화요소가 더욱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재래의 화분형 토기부터 세형동검 특이한 수레부품등
이런 묘제는 요동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양식이며 북한에서는 상한을 이미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보고 있슴-
즉 목곽묘는 묘제나 부장품 모두에서 한반도 토착인의 영향이 매우 강하며 이들 무덤에 묻힌 사람은 대부분이 고조선 단계부터 현지인들, 이후
귀틀무덤의 경우는 묘제나 유물에서 한나라 유물이나-정백동 7호,191호의 청동거울에서 기원후 2세기초 명문출토- 평양 현지에서 제작된 토기들이 함께 혼재
-화분형 단지, 배부른 단지, 회백색 단지 등이 귀틀무덤에서 예외없이 나오며 , 굴대끝 씌우개, 삿갓모양의 말멍에꼭지장식 등 한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생김새의 마구와 수레부속들이 나옴-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후 벽돌무덤화...
기타 너무 많아서 의심스러운 시각으로 신중을 기해야 하는 봉니나 점제비등의 유물들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평양 일대에서 나오는 철기유물에 앞서 <고조선 철기문화>에 대해서도 기존의 연나라 진개의 침략에 의한 수동적 철기유물이나 사용의 시각에서 현재 두만강과 연해주가 맞닿은 곳의 이른 시기의 바라바시유적이나- 초기철기시대인 BC 7∼5세기의 철기가공작업장이 발굴됐다. 서쪽 대륙에서 당시 연나라의 철기발달이 우수했는데 BC 4,5세기를 넘지 않음-
현재 북한에서도 철광석이 풍부한 무산 <범의 구석유적> 제5문화층은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으로 쇠도끼, 쇠창, 쇠대패날, 쇠끌 등 적지 않은 철기가 나왔다. 쇠창은 청동기시대의 버들잎 모양의 흑요석 창끝과 비슷하며 구두칼 모양의 쇠칼도 이전 시기의 점판암으로 만든 칼과 비슷하다.
< 청동기시대의 석기를 그대로 모방한 이와 같은 철기의 형태는 이곳의 유물이 철기시대에 들어 선 초기의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북한 학자들은 여기서 출토된 쇠도끼는 완전 용융상태에서 얻어진 선철 주물품이었다고 말하고 있슴.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하는 범의 구석 유적 제6문화층에서는 이전에 사용되던 석기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쇠도끼, 쇠낫, 쇠반달칼, 쇠자귀, 쇠낚시 등 여러가지 종류의 철제 생산도구가 수없이 많이 나왔다. 이것은 이 시기에 이르면 이 지역에서 철기 사용이 보편화됐음을 말해줌
물론 이후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기원전 3세기 ~ 기원전 2세기에 가면 완연한 연화보 세죽리 문명이라는 철기문명을 꽃피우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남부에서는 강원도 홍천에서 기원전 7세기경의 초기 철기 유물이 확인된바 있는등
<진개의 침략에 의해 요서 일대에서 밀려난 세력들에 의해 생겨난 영향력도 있겠지만- 후대의 한무제의 위만 조선 침공으로 밀려난 세력도 고려- 요동과 한반도 북부에서는 이미 완연한 지상주거화의 진행과 함께 철기의 보편적 사용들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1. 북한 평양 일대는 이전부터 소규모의 토성들이 존재했습니다.(30여개가 넘는
취락밀집분포지역)
2. 한나라의 한사군이라는 식민지배지 중심지인 낙랑군은 420여년간 존속하며 명실상부한 한반도 북부의 중심지임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행정 치소들은 그보다 더 떨어진 백제 초기나 이전세력보다 초라한 이해되지 않는 인프라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3. 이는 한나라와의 무역 중계소정도로 치부할수 있는 수준이지만 실제 무역중계소인지는
이곳에서 한나라의 분명한 행정치소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대안 중 하나입니다.
4. 이곳은 이후에도 토착세력의 문화가 강하게 나오는 곳으로 일각에서는 낙랑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토착세력과 한나라지배 관리인이라는 결합모드의 변형까지 나오고 있지만 과연 기존 소규모 토성들을 아우르는 규모의 한나라식 행정치소 인프라도 구축하지 못하는 수준의 형태에서 이런 관계가 한나라의 식민지배적 형태나 공간이라고 말할수 있는지 심히 의문.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고조선 고구려문명권을 탄생시킨 요하 일대에는
이미 기원전 6천년경에 정교한 도시형 취락이 나오고 있으며
기원전 4천년경에 100여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제단이나 신전을 세울 정치력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요동 길림성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입니다.
<이당시의 황하문명을 보면 화한족의 문화 자체는 농경 토기 사용정도로 요하 일대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명적, 정치적 수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후 기원전 20세기에는 요서 대릉하 일대에 고구려 국내성에서 확인되는 형태와 동일한 치의 고구려식 석성들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서쪽 대륙사에서 최초의 왕조라는 상나라에 대한 문명사적 고찰이 많습니다.
상나라 유적을 진두지휘한 고고학자 부사년은 상나라는 동북방에서 와서 다시 동북방으로 돌아 갔다고 말했으며 원북상성의 경우 중심축이 동북으로 13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상나라 도성의 방향으로, "고향(발해연안)에 대한 짙은 향수를 나타낸 것(궈다순·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이라 해석한 점들은 눈여겨 볼 부분입니다.
이들 세력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는 이들이 다시 동북방향의 요서 대릉하로 와서 남산근 문화를 꽃피우고 실제 은말 주초 청동기가 발견되고 그중에는 은나라 기자(箕子)와 관계되는 청동기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나라적 문화와 주류는 고구려 문명권을 있게한
부여와 밀접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고 한반도 남부의 풍납토성등 백제의 초기 토성들의 자연적인 방어시설인 강변에 쌓은 점이라든지, 흙을 켜켜이 쌓아 조성한 이른바 판축기법은 상나라 도성의 전형적 양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사적 연원을 알지 못하고 단순히 한반도내에서의 문화에서 영향력을 중국식이라는 용어의 상투적 사용은 분명 되새겨 가려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만조선이 멸망할 당시 기원전 3세기경에는 이미 부여 동예부터 옥저와 남부에도 정치세력들이 엄연히 국가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던 점들을 유의하면서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고찰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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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체적으로 저는 님의 글을 보면서 역사를 정치로 보는듯하여 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풍납토성의 편년은 발굴자인 문화재연구소의 신선생은 탄소연대측정법과 토기및 유구등을 종합하여 기원전1세기전후로(몇몇 시료에서는 기원전 2세기말 ) 보고있으나 박순발선생은 기존 토기에 대한 편년을 중심으로 풍납토성의 출토토기기원후3세기 전후로 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희권선생의 견해를 따르나, 다수설은 박순발선생의 견해입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하는 것은 풍납토성의 초축편년을 연구자들이 기원전 2세기부터 3세기까지 500년일정도로 장구한 세월로 편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수지지자들이- 개인적으로 순화시켜서 한 용어임- 그들 기존 학설에 끼워 맞추는 편의적 방법인 상대 편년과 과학적 절대편년중에서 현시대에 무엇을 더 기준점으로 말해야 할지는 본인이 좀 더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학문을 정치적 혹은 권력 유지용으로 끌고 가는 세력이 있으니 문제지요.
그리고 풍납토성에는 청동기 말 초기 철기 시대의 육각형 주거지에서(凸자형 주거지) 부터 타날문토기(일명 김해식토기 )등은 기원 전후의 토기들이며 풍납동무문토기(중도식 무문토기)등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전후로 보는 것들로서 이런 것들은 백제 이전시기부터의 흔적이죠. -상대적 편년으로- 그리고 이런 것은 경기 남양주에서도 85기의 군집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주거지나 퐁납동무문토기는 풍납토성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풍납토성의 연대가 기원후 3세기까지라는 것은 이때까지 보강으로 풍납토성의 외형이 증축 보완되었다는 뜻이며 앞서의 절대편년이나 기타 주거지나 토기등에서도 백제 이전의 흔적들도 함께 나오기에 초축도 이에 상응하여 기원전으로 더 하향될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자형 주거지나 김해식토기 중도식 토기등에 대하여 기본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도 않군요. 과거 어느 연구자들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 없이 주워 담아서는 제대로된 역사이해가 어려울것입니다. 또한 상대편년 방법론을 아에 이해도 못하는 군요. 그리고 카본데이팅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듯 합니다. 카본데이팅에서의 보정연대도 잘 이해 못하고 계시는 군요. 편년에 대한 기본 개념이나 주거지및 토기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으니 무엇을 말해도 보수지지자가 되겠군요. 김해식토기가 뭘말하는 것인지 그 개념이 왜 현재 연구자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지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저의 위 댓글은 신선생과 박선생 두 대표견해를 들어
풍납토성의 초축연대를 알려드린것이랍니다. 어느 고고학자도 풍납토성의 초축년대를 500년이나 두고 논하는 연구자는 없거든요. 초축년대를 기원전 2세기에서 3세기까지 5백년이나 보는 정신 나간 제대로된 연구자는 없답니다. 연구자들의 논쟁을 글로 접할때 제대로된 개념이해없이 어설프게 파악하니 이런 500년이나 벌어지는 초축년대를 역사님이 말하는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논박을 받지 않으려면 정확히 이해하고 공부하는 노력이 필요할것입니다. 역사나 고고학에서 보수와 진보라 참 재미있는 표현을 들었습니다.
지나가다>초축 연대를 5백년간 잡는 무식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요???? 님이 도리어 별 하지도 않을 소리를 계속하니... 위 글에 적힌 한글이 이해되지 않을가요???. 3세기까지라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풍납토성이 백제 성립 이후 보강등을 통해 현재 발굴된 풍납토성이 거의 완성된 시기를 말하며 앞서의 토기, 초기 주거지등이 백제 건국 이전 세력으로 짐작되며( 백제 이전의 마한세력) 아직 하층부분등에 대한 연대측정등에서 기원전에서 더 하향될수 있다는 소리 즉 이전 세력이 기본뼈대의 초축이 이시기에 있을 거라는 식으로 말한 소리인데 혼자서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지..??? 참
카본데이팅 어쩌고 하시는데- 보수 지지자들이 변명 아닌 변명꺼리마냥 그런 상투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긴 하더군요- 풍납토성 주최측에서 이정도 기본 탄소연대측정에 대한 장단점도 모르고 하는가요. 그러면서 현재 세계 고고학계에서 그래도 왜 우선시 하는 지도 생각 없지는 않겠군요. 그리고 지나가다님이 본인 말맞다나 대단히 학식있고 정립이 잘 되어 있는 분 같은데 이기회에 한수 배우게 가르침을 주시지요.댓글아닌... 내용없는 한글 문맥 이해못하고 따지는 식의 댓글은 더 이상 삼가합니다.
역사님의 댓글을 보다보니, 개념이 정확하지 않아 어지럽군요. 문맥상의 말의 의미는 편년이 상향될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즉 편년이 올라갈수 있다고 말하는데 표현은 편년이 하향된다고 말하니 개념정리부터 시작하여야 할듯 싶습니다.<편년의 하향>이란 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문화에서 하층문화가 오래된 이른시기의 문화이니 편년의 하행된다는 표현을 쓰나 보군요.
역시나 역사님은 성곽의 초축년대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를 잘못 이해하고 있군요. 풍납토성축조자들이 500년에 걸쳐 축조하였다고 하는 기막힌 애기를 하는 군요. 토성초축편년관련하여 백제건국이전 세펵들이 건설하기 시작? 아니면 사용하던것을 백제건국세력이 보강하였다고 생각하나 보군요. 갈수록 신기한 분석이 나옵니다.풍납토성의 축조가 백제건국세력이 아닌 선주세력이나 다른세력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애기는 듣도 보도 못한 애기를 처음 듣습니다.
ㅋㅋ 그래요..풍납토성 축조자의 500년??? 미루어 마한의 어떤 세력에서 백제세력으로 바뀌니 동일 축조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예 님의 고견 부탁 드립니다. 댓글이 아닌.. 새겨 경청하지요..정작 낙랑 토성에 대해서는 없군요. 고견을 가지신 김에 풍납토성에 낙랑토성과 함께 말해주시길...
님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는 알겠군요. 실제 시료 채취해서 성벽 연대 측정한 것에서 주거지보다 후대의 기원후 1세기에서 2세기 정도니까요-중심연대- 물론 기원전1세기로 확인되는 것은 환호 형태의 유적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12개 정도의 채취이며 성벽의 최하층 다양한 채취의 결과등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이 풍납토성을 통해 백제가 이른 시기에 정치력을 구사한 부분의 확인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입니다.하여튼 고견의 글을 보고 싶군요.
환호는 토성 초축이전의 유구로 인식이 너무도 당연한데 왜 초축편년에 환호어쩌구가 나오는 것인가요.환호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풍납토성 보고서를 보았을텐데 ... 발굴자의 보고를 잘읽어 보면 풍납토성초축이전의 유구임을 알수 있답니다. 그리고 발굴자가 아직 시료를 측정하지 않은것이 있다? 성벽최하층 다양한 채취의 결과등 가능성이 있다 이건 또 무슨 막말인지. 성벽 최하층에서 카본데이팅 시료를 채취하여 측정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뭔가 음모설을 말하려 하는 것인가요. 신이권선생이 들이면 열받겠는데요.
풍납토성이 백제건국세력이전의 선주세력에 의해 건설되었냐는 질의에 예라고 답한것 맞나요??? 새롭고 경이적입니다.
ㅋㅋ 댓글로 달다보니 말이 짧아지고 이해력의 혼선을 넘어 초축을 500년 운운하니 말을 길게 풀어 님의 고견을 듣자고 말했더니 여전히 댓글이군요.성곽이란 자체가 기본 인구밀집의 취락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난 개념이고 백제 온조 13년 궁궐 축조와 14년 성을 쌓고 한성으로 불리는 기록이나 기본 도성의 예에서도 그 터가 이전 일정한 도시개념이나 취락의 발전 분포지을 기본 틀로 해서 조성이나 천도됨을 기본 상식으로 깔고 봐야 할것이며 풍납토성내의 청동기시대의 전형적 환호-물론 3중형태의 특징 존재-시설의 기원전시기로 보이는 이곳은 이전부터 이런 취락이나 성곽 둘레에 사용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풍납토성의 기본 조성
에 기여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것임.그리고 <별로 달 필요도 없는 초축 500년 운운에서 부터 앞서의 댓글에서도 보면 기원전에서부터 풍납토성축조자가 500여년 걸쳐 축조해다는 식 이야기를 기막히???.> 님 말맞다다 제대로 내용을 이해하는지??. 삼국사기 기록및...이 평지의 풍납토성 자체가 한강변에 위치하기에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으나 한강의 범람이나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방부터 실제 현 풍납토성에도 한강의 유속에 의한 퇴적물들이 쌓였는데 이게 왜 보강을 통해 이런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는 말인지 진짜 모르기에 기막히다라는지 정말 기막히군요.
상식을 가지고 질문은 하는건지 상식이 없어 질문하는 건지??? 온조 14년 이후 41년 즉 28여년만에 다시 위례성을 고치는 기록이 보이고 책계왕 때도 그런 사서 기록이 보이며 기록에도 없지만 토성의 특성상 이전에도 이런 행위는 여러번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 그리고 실제 성벽만해도 동벽과 서벽에서도 하단중심부(초축)에서 풍납동식 무문토기(BC2-1)가 주축을 이루며 발견되고 있고 전체성벽의 출토 토기중 3세기 이후토기가 발견되지 않는점 실제 판축부재의 목재나 목탄및 C14의 절대 연대측정등 늦어도 3세기에(200) 전축이 완료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원전에서 기원후 3세기경에 완축된 모습이 보임.
토론은 서로간의 이해가 동반되어서 행해져야 합니다. 감정적이거나 상호간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표현이나 언사는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열된 양상을 보이니 자제 바랍니다.
감정 상할 이유는 없습니다. 잘못된 표현을 말하는 것 뿐입니다. 행여 역사님이 뭐라 하여도 감정 상하지 않을테니 염려 놓으시길. 토론이 다소 격하여도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역사님// 애기가 길어지니 답글로 반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