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17일 오늘의 역사
2024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 5선에 성공하며 사실상 장기집권
2022년 한국 솔로여가수 최초 블랙핑크 제니 ‘SOLO’ 뮤직비디오 8억뷰 돌파
제니의 솔로곡 ‘SOLO’ 뮤직비디오는 이날 오전 3시 24분께 유튜브 조회수 8억 회를 넘어섰다. 지난 2018년 11월 12일 공개된 지 약 3년 4개월 만이다.
‘SOLO’ 뮤직비디오는 공개 23일 만에 1억 뷰, 90일 만에 2억 뷰, 182일 만에 3억 뷰, 13개월 만에 4억 뷰, 20개월 만에 5억 뷰, 26개월 만에 6억 뷰, 32개월 만에 7억 뷰를 넘겼다. 이번 8억 뷰까지 도달 속도 역시 크게 줄지 않은 점을 떠올리면 제니의 꾸준한 글로벌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SOLO’는 도입부의 아름다운 코드와 간결한 멜로디 라인, 이별 후에도 슬픔에 얽매이지 않은 당당한 면모를 직설적이고 솔직한 가사로 풀어내 음악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국내 주요 음원 차트 실시간·일간·주간 차트 1위를 석권하며 이른바 ‘퍼펙트 올킬’을 달성했다. 또 40개국 아이튠즈 정상을 차지한 가운데 당시 한국 여성 솔로 아티스트 최초로 아이튠즈 월드 와이드 송 차트 1위, 미국 아이튠즈 톱10에 이름을 올렸다.블랙핑크는 팀과 솔로 활동을 가리지 않고 매번 신곡을 발표할 때마다 자신들이 세운 대부분의 최초·최고 기록을 자체 경신 중이다. 유튜브에서 총 32편의 억대 뷰 영상을 배출한 이들의 공식 채널 구독자 수는 현재 7290만 명 이상으로 전 세계 남녀 아티스트를 통틀어 1위다
2019년 신보라미 세계여자권투협회(WIBA) 슈퍼 페더급 챔피언 됨
2018년 신의현 선수 평창 겨울 패럴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남자 7.5km(좌식) 22분 28초 40 금메달, 겨울 패럴림픽 출전 26년 만에 첫 금메달
2013년 김연아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우승(218.31점)
2012년 섬유산업 거목 김각중 경방 명예회장 별세
고(故) 김용완(金容完) 경방 회장과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막내 여동생인 고(故) 김점효(金占效) 여사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수출을 통해 한국 섬유산업의 전성기를 이끈 섬유산업계의 거목이었다.
연희전문(현 연세대) 이과를 거쳐 미국 유타대에서 이론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1965년부터 71년까지 고려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75년 부친의 뒤를 이어 국내 최초의 면방직 기업인 경방 회장에 취임했다. 1974년 사양산업이라며 증설을 반대하던 주주들을 설득해 용인공장을 짓고, 반월·광주(경기) 공장을 연이어 준공하며 1987년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대 초반 경기 불황이 닥치자 직위를 사장으로 자진 '강등'해 일선을 뛰면서 위기를 극복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990년대 들어 방직업이 하향세로 돌아서자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특화하고 경방필백화점, 우리홈쇼핑 등 유통업으로 사업구조를 개편했다.
온화한 성품에 친화력이 돋보였던 고인은 자동차·반도체 빅딜로 삼성·대우·현대·LG 등 4대 그룹의 관계에 금이 가고 재계가 파열음을 내던 1999년 전경련 회장을 맡아 2003년까지 재계를 무난히 이끌었다. 부친 김용완 회장도 1964~66년, 1969~77년 전경련 회장을 지내, 부자(父子)가 14년 동안 재계 총수를 맡은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인은 중앙염색가공회 회장·한국섬유기술진흥센터 이사장·섬유산업연합회 회장 등 국내 섬유산업 단체를 이끌었고, 1984년부터 1997년까지는 제일은행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장학재단인 경방육영회를 운영하며 인재 양성에도 매진했다. 1983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10년 원로 정치학자 겸 언론인 양호민 선생 별세
평양 출신인 양 교수는 일본 중앙대 법학과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한 뒤, 대구대와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냈다. 1965년 9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명을 발표한 대학교수단에 참여하면서 '정치교수'로 몰려 대학에서 쫓겨났다. 1961~1964년까지는 잡지 '사상계'의 주간을 겸직했다.
대학을 떠난 양호민 교수는 1965년 말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해 1984년까지 재직하며 한국현대사의 격동기를 기록했다. 북한 전문가였던 그는 1972년 조선일보 통한문제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았고, 북한학회 회장도 지냈다.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진보적 지식인이었지만, 공산주의와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공산주의가 사이비 과학으로 위장된 하나의 신화임을 지적하고 이를 세상에 알려주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임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1989년 잡지 '한국논단' 창간에 참여해 초대 사장을 맡았고, 1990년 학계로 돌아가 2007년까지 한림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양 교수는 85세이던 2004년에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해방 8년간의 현대사를 정리한 '38선에서 휴전선으로'를 냈다. 구순(九旬)을 넘긴 작년 7월에는 1400쪽이 넘는 대작 '한반도 격동 1세기반-권력, 이데올로기, 민족, 국제관계의 교차'를 탈고했다.
저서로는 '북한의 이데올로기와 정치' '현대공산주의의 궤적' '격랑에 휩쓸려간 나날들' '한국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시련' 등이 있다.
2009년 북한, 미국 여기자 2명 억류
미국 기자 2명이 2009년 3월 17일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 북·중 국경에서 탈북자문제를 취재하던 중 북한 지역으로 들어갔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억류됐다. 이들과 동행 취재했던 또 다른 미국 언론인 1명과 조선족 가이드 1명은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측 국경수비대에 의해 억류됐다.
이날 북한측에 억류된 미국기자 2명은 미국 케이블TV '커런트(Current)TV'의 유나 리(Euna Lee·한국계 미국인) 기자와 로라 링(Laura Ling·중국계 미국인) 기자이며 중국측에 억류된 2명은 미치 코스 프로듀서, 조선족 가이드 A씨이다.
이들은 17일 중국 투먼(圖們)의 두만강변 북·중 국경에서 취재하던 중 국경을 넘었다가 북한군에 붙잡혔으며 이들 중 코스씨와 조선족 가이드는 북한을 탈출해 중국 국경수비대에 억류됐다.
커런트TV는 앨 고어(Gore) 전 미국 부통령이 회장으로 있는 방송사다.
두 기자는 이 방송의 다큐멘터리 '뱅가드 저널리즘(Vanguard Journalism)' 프로그램을 위해 옌지에서 '음란화상 채팅'을 강요당하고 있는 탈북 여성과 중국 내 탈북 여성들의 자녀들을 취재하던 중이었다.
리 기자 등은 지난 13일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옌지에 간 뒤 17일 오전까지 옌지와 투먼 취재를 마치고 신의주 맞은편에 있는 단둥(丹東)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조선족 가이드 A씨의 지인에 따르면 A씨는 17일 새벽 3시쯤 강변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며 19일 오후에 중국 국경수비대로부터 남자 2명을 억류 중이라는 연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새우깡 이물질 파동
2008년 3월 17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농심 부산공장에서 제조한 ‘노래방 새우깡’ 제품에서 생쥐 머리로 추정되는 이물질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식약청은 최근 제보를 받고 현장 조사를 벌였으나 이물질의 현물이 보관돼 있지 않아 실제 생쥐 머리인지 여부는 정확히 판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식약청 식품관리과 강봉한 과장에 따르면 “농심 부산공장이 자체 실시한 시험분석 결과를 확인한 결과, 이물질의 크기는 약 16㎜이며, 외관은 딱딱하고 기름이 묻어있었고, 특히 털이 미세하게 탄 흔적이 있는 물질인 것으로 봐서 생쥐 머리로 추정된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식약청은 농심 부산공장 내부는 밀폐식 시설로서 제조관리 상태가 양호해 이 공장에서 이물질이 새우깡 제품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새우깡의 주원료를 반제품 형태로 제조 또는 포장하는 농 심의 중국 현지공장(청도 농심푸드)에서 이물질이 혼입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새우깡은 원료혼합, 반제품, 건조, 포장 등의 공정을 거쳐 제조된다.
반제품은 중국 현지공장에서 제조되며, 농심 부산공장에서는 이 반제품을 사용해 건조, 포장해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한편, 재료 원산지 표시는 원료생산국과 반제품 가공국 중 한 곳만 표시하면 된다는 규정 탓에 ‘노래방 새우깡’은 그동안 국산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식약청은 농심에 대해 시설개수 명령 등 행정처분을 내리는 한편, 재발방지대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또 문제의 반제품을 이용해 만든 모든 새우깡 제품은 수거, 폐기하도록 조치했다.
2004년 의문사 최종길 교수, `타살 인정` 법정증언
2004년 3월 17일, 지난 1973년 ‘유럽거점 간첩단 사건’과 관련,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 의문사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자살했다”는 당시 중정 발표는 조작된 것이며, 중정 요원에 의해 타살됐다는 첫 법정 증언이 나왔다.
당시 최 교수를 수사했던 중정 제5국 공작과장 안모씨는 이날 최 교수 유족들이 국가와 당시 주무 수사관인 차모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첫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최 교수 주무 수사관인 차씨가 욕을 하며 ‘사실대로 불라’고 소리칠 때마다 최 교수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옆방에서 선잠에 모두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3부 심리로 열린 재판에서 안씨는 “중정은 간첩사건을 조사할 때 통상 고문을 가했고 고문을 받고도 자백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또 “최 교수 사망 후 당시 수사계장이던 김모씨가 비상계단 앞에서 두 손으로 밀치는 시늉을 하며 ‘최 교수를 여기서 밀어버렸다’고 말했을 때 차씨가 밀었을 거라고 직감했다”고 진술했다. 안씨는 특히 “지난 88년 서울지검이 최 교수 사건을 재수사할 때 당시 수사관들이 말을 맞춘 뒤 조사를 받았다”며 “최 교수와 유족들에게 너무 죄송하고 최 교수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최 교수 조카 손모씨는 “큰외삼촌(최 교수의 형)은 외삼촌이 돌아가신 뒤 직장을 나와 30년째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다 얼마 전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당시 중정 감찰실 직원이었던 막내 외삼촌(최 교수의 동생)은 자신이 형을 중정에 직접 안내했다는 사실로 심한 정신적 고통과 양심의 가책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2003년 부시 미국 대통령 이라크 후세인에 최후통첩, 사실상 선전포고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17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군사 공격에 직면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오후 8시(한국시각 18일 오전 10시) TV로 생중계된 대국민 연설에서 “사담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은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야 한다”면서 “이를 거부하면 그들은 우리가 선택하는 시간에 군사적 충돌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라크 지도부는 18일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을 공식 거부했다고 이라크 국영 알 샤바브방송이 보도했다.
이 방송은 집권 바트당과 혁명지휘위원회의 연석회의에서 이같이 의견을 모았으며, 이라크 국회는 19일 오전 10시 긴급 회의를 개최한다고 방송은 전했다.
부시의 최후통첩에 맞추어 미국 국토안보부는 미국 내 테러 위협 수준을 ‘코드 옐로(code yellow)’에서 ‘코드 오렌지(code orange)’로 한 단계 높이고, 미국 내 전역에서 테러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부시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국이 영국·프랑스와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한 대(對)이라크 제2차 결의안의 표결을 이날 오전 포기한 것과 관련,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 무장해제를 위한) 책임에 따라 행동하지 못했다” 고 지적하고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부시의 연설이 있기 직전인 17일 저녁 관영 INA통신을 통해 “이라크 국민들은 조국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이라며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희망하지만, 또한 어느 누구도 미국이 이라크 국민들의 의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라크의 나지 사브리 외무장관은 “전쟁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은 세계 제1의 전쟁광인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하야”라면서 “부시 대통령이 미국을 세계의 조롱거리로 만들었으며 미국 정부를 고립시켰고 공적(公敵) 1호로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한편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 사찰 활동을 벌이던 유엔 무기사찰단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 136명 전원은 18일 오전(한국시각 18일 오후) 키프로스행 비행기를 타고 바그다드를 떠났다
2003년 독립기념관, 조선일보 윤전기 철거 결정
2002년 `생의 한가운데` 작가 루이제 린저 사망
소설 `생의 한가운데`로 잘 알려진 독일의 대표적 전후 작가 루이제 린저(Louse Rinser·91)가 2002년 3월 17일 사망했다. 린저는 `전후 독일의 가장 훌륭한 산문작가`, 혹은 `토마스 만 이래 시대악과의 싸움에서 뛰어난 용기를 보인 작가`, 그리고 `시몬 드 보부아르와 더불어 현대여성계의 양대산맥` 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서유럽과 국내에는 `무비판적 친북(親北)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린저는 30여 권의 저서를 남겼고, 20여개 언어로 출간됐다.
린저는 1911년 4월 바이에른 지방의 피츨링에서 태어나 뮌헨대학에서 심리학·교육학 등을 전공했고,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초등학교 교사였다. 첫 소설 `파문`(1941)은 헤르만 헤세가 병상에서 찬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반응이 컸다. 반나치 활동을 펼치다 1944년 10월 국가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45년 종전으로 석방됐다. 린저는 1953년 인간의 구원을 인류의 구원으로 확장한 `다니엘라`를 발표했다. 이후 주요작품은 `완전한 기쁨(1962)` `검은 당나귀(1973)` `미리암(1983)` `아벨라르의 사랑`(1991) 등이 있다.
특히 린저는 냉전시대 북한을 10여차례 방문, 한국 관련 책도 많이 냈다. 작곡가 윤이상과의 대담록인 `상처입은 용(1977)`과 북한방문기인 `또 하나의 조국` 등이 국내에 많이 읽혔다. 그러나 "김일성은 평화밖에 모르는 지도자" "북한엔 감옥이 없다"는 등 근거없는 찬양으로 일관, 실상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0년 말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이 무산되자 항의 서한을 청와대에 보내기도 했다.
2001년 애니카 소렌스탐, 미 LPGA 사상 최저타인 59타 기록
애니카 소렌스탐이 2001년 3월 17일 벌어진 스탠더드레지스터핑골프 2라운드에서 여자프로골퍼로는 사상처음으로 60타벽을 깨며 59타를 기록했다. 소렌스탐은 8홀 연속 버디 등으로 버디 행진을 벌이며 13언더파를 몰아쳐 그동안 자신과 캐리 웹, 박세리가 함께 지켜왔던 18홀 최저타수기록(61타)을 경신했다.
소렌스탐은 한 라운드 최다 버디(13개), 36홀 최다언더파(20언더파) 등의 새 기록도 추가했다. 종전기록인 61타는 박세리가 1998년 제이미파크로거클래식 2라운드에서 처음 기록했고, 소렌스탐이 1999년 사라리클래식 1라운드, 캐리웹이 2000년 올스모빌클래식 2라운드에서 한차례씩 작성했다. 미 남자프로골프대회인 PGA에서도 18홀 59타 기록은 알 가이버너, 데이비드 듀발, 칩 벡 등 단 3명만이 보유하고 있다.
소렌스탐의 대기록은 힘과 집중력 등에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뒤진다는 골프계의 통념을 깨뜨린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소렌스탐은 최종일 경기에서도 4개의 버디를 추가, 27언더파 261타의 기록으로 역시 웹이 보유중인 72홀 최다언더파 기록(26언더파)도 경신했다.
2000년 우간다 카눈구에 있는 사교집단 `신의 십계명 부활`교 교단본부 화재로 330명 사망
우간다 카눈구에 있는 `신의 십계명 부활`교 교단본부에서 2000년 3얼 17일 화재가 발생, 330명이 불에 타 숨졌다.
이후 3월 24일 부흥가에서 시신 153구, 루가지에서 시신 155구, 루쇼즈와에서 시신 81구가 발견되는 등 700여구 이상의 시신이 집단 매장지에서 발견돼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는 수습된 시신을 누계한 수치일 뿐 발견되지 않은 시신들이 얼마나 되는지 우간다 정부도 파악하지 못해 추측만 난무했다.
우간다인들은 이 종교집단의 신도수가 5천명에 달해 사망자가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부 외신은 1978년 가이아나 존스타운 자살자 규모(914명)를 능가할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경찰은 카눈구 화재현장을, 우간다에 퍼져있는 이 사교집단의 신도들이 마지막으로 승천의식을 행한 곳으로 판단, 정밀수사에 나섰다
1998년 중국 새 총리에 주룽지 부총리 선출
중국에 `주룽지 총리시대`가 공식 개막되었다. 중국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1998년 3월 17일 오전 전체회의에서 주룽지(주용기) 총리 임명안에 대한 결정투표를 실시, 유효투표수 2천9백50표중 찬성 2천8백90표, 반대 29표, 기권 31표로 주룽지 총리의 임명을 가결했다.
주룽지는 1987년 중국공산당 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된 뒤, 상하이시장, 상하이시당위원회서기를 지냈다. 1991년 국무원부총리로 발탁, 이어 경제무역판공실 주임을 겸임, 중국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최고책임자 위치에 올랐다. 1992년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8년에는 중국 총리에 선출, 향후 5년간 12억인의 행정업무를 총괄하게 됐다.
1997년 미국 대법원, "흡연환자 치료비 담배회사가 부담" 판결.
1997년 신동혁 씨(35)등 러시아 벌목공 4명 김포공항 통해 귀순.
1996년 경주시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에서 금동 사리함 발견
1996년 영화감독 르네 클레망 사망
한국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거장 르네 클레망 감독이 1996년 3월 17일 프랑스 미디 지방에서 사망했다. 전후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클레망은 1913년 보르도에서 태어나, 1944년 `네오 레알리즘` 기법의 영화 `철도 전쟁`으로 명성을 얻은 후 주로 전쟁이 가져온 정신적-물질적 변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제작해 유럽 대륙 최고의 감독으로 꼽혀왔다.
그는 1948년 프랑스의 레알리즘과 이탈리아의 네오 레알리즘을 접합시킨 `창살 넘어`에 이어 1953년 그의 대표작이 된 `금지된 장난`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어린이의 눈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조명한 이 영화는 나르시스 에페소가 작곡한 주제곡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클레망은 1959년 알랭 들롱을 등장시킨 `태양은 가득히`로 당시 유행하던 `누벨 바그`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어 제인 폰다, 찰스 브론슨, 페이 더너웨이 등을 등장시킨 `고양이`(1964) `빗속의 방문객`(1970) `숲속의 집` (1971) 등 미국영화작품도 만들었다.
1995년 `서울의 찬가` 작곡가 길옥윤씨 별세
작곡가 길옥윤씨가 1995년 3월 17일 0시 22분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길옥윤씨는 평북 영변에서 태어나 1949년 경성치과전문대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작곡 및 연주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음악생활 50여년 동안 ‘사랑하는 마리아’ ‘이별’ ‘빛과 그림자’ ‘4월이 가면’ 등 3천여곡이라는 많은 곡을 만든 그는 탄탄한 실력과 뛰어난 감수성으로 명실공히 국내가요의 차원을 한단계 높인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또 서울올림픽폐회식음악과 마샬 아일랜드공화국의 국가를 작곡하는 등 그의 활동범위는 대중가요에 한정되지 않았다. 또 그의 인생은 음악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1966년 초 패티김과 인생의 반려자이자 노래의 단짝을 만나 음악인생의 절정을 누리다가 1972년 5월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명언을 남기고 이혼했다. 그 후 여가수 혜은이를 발굴해 두번째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카페 경영에 실패,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는 등 굴곡 많은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1988년 이라크군, 쿠르드 난민에 독가스 사용(4000명 사망)
이란 국영방송은 1988년 3월 17일 이라크군이 이란 국경부근에 있는 쿠르드 난민족 마을에서 이란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화학병기를 사용해 난민 4천여명이 사망했고 5천여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이라크군은 과거에도 수차례 화학병기를 사용해 유엔의 비난을 받아왔지만 이번의 독가스 살포는 다른 때보다도 피해규모가 컸다. 이란은 18일 유엔에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이라크는 이를 부정했다. 그러나 `국경없는 의사회`는 현지를 방문해 이라크군의 독가스 사용을 확인했다.
1988년 일본 도쿄돔 야구장 개장
1981년 울산화력발전소 4-5-6기 준공
1981년 소련, 위성파괴무기 개발 성공
1979년 백두진 제10대 국회의장 피선
1978년 미국의 대형 유조선이 프랑스 브리타니 해안에서 좌초, 대형 기름유출 사고
1972년 한국최초 전기기관차 첫선
1970년 고급요정 선운각 마담 정인숙 피살
눈발이 날리던 1970년 3월 17일 밤 11시쯤, 코로나 승용차에서 미모의 26세 여인이 목과 가슴에 두 발의 총알을 맞고 숨진 채 서울 강변대로에서 발견됐다.
단순한 치정살인으로 여겨졌던 이 사건이 갑자기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녀가 고급요정 선운각의 얼굴마담인 데다 수첩에 정·재계 거물 26명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게다가 여권발행이 힘들었던 시절에 불법발급된 복수여권까지 소지하고 있었다. 여인은 빼어난 몸매와 뛰어난 화술로 한창 주가가 높았던 요정마담 정인숙이었고 그녀에게는 세살배기 아들이 있었다.
검찰은 정 여인의 오빠가 여동생의 문란한 사생활에 분노해 살해했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곧이 곧대로 믿지않았다. 오히려 어린 아들의 아버지가 현직 국무총리라는 소문만이 난무했다. 범행에 사용된 권총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건현장이 2시간 만에 돌연 치워지고 현장검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간첩을 수사하는 공안검사가 이 사건을 지휘하는 등 많은 의문점이 제기됐다. 결국 중앙정보부는 보도통제를 시작, 27일 이후부터는 신문 지면에서 정 여인의 이름이 사라졌다.
정부는 김지하 시인이 재벌·국회의원 등 고위층의 부정과 부패를 신랄하게 풍자한 시 ‘오적(五賊)’을 발표하면서 “사회정화닷.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밧아랏…”이라는 내용을 게재하자 김지하를 구속하고 사상계를 폐간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969년 영국 정부, 런던 금시장 3월중 폐쇄키로 결정
1967년 조선일보사 청룡봉사상 제1회 시상식, 봉사정신을 지닌 경찰관과 일반인들 매년 표창
1965년 비운의 이집트 국왕 파룩1세 사망
1964년 미국, 베트남에 게릴라 군대 창설 발표
1963년 프랑스, 사하라사막서 지하핵실험
1963년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궁화산 폭발로 1,900여명 사망
1959년 14대 달라이 라마, 인도 망명길에 오르다
1933년 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가쵸가 입적하고, 1940년 텐진 가초가 (1935~현재) 14대 달라이 라마로 즉위했다. 텐진 가쵸는 1935년 7월 6일 티벳 북동부 중국 접경지역에 위치한 암도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때 달라이 라마의 현신으로 발견되어 제춘 잠펠 가왕 놉상 예쎄 텐진 가쵸라는 법명을 받았다.
1950년 10월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자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침공과 이에 항의하는 민족사이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국의 침공이 계속되고 대규모 폭동이 발생, 달라이 라마의 체포설까지 나돌자 1959년 3월 17일 14대 달라이 라마는 미국CIA의 도움을 받아 몰래 티베트를 탈출했다. 14대 달라이 라마는 농부로 가장하고 히말라야를 넘는 2600km의 대장정 끝에 3월 31일에 인도로 망명했다.
그 후 인도 맥로드 간즈를 거점으로 삼아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티베트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자유독립 투쟁에서 폭력을 반대하며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했고, 이를 통해 티베트인들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로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달라이라마는 여러나라를 방문하면서 티베트의 독립과 트베트인들의 정체성을 세계에 알리고 있으며,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티베트 망명정부 : 공식명칭은 '달라이 라마 성하의 중앙 티베트 정부'이며 1959년 14대 달라이라마가 인도에서 수립했다. 티베트의 자유 부흥을 목표로 하는 운동의 지도적 역할과 중국의 침략으로 생긴 13만여명의 티베트 난민의 생활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티베트 내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들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밝히고 있으며, 최근들어 유럽 일부 국가들의 의회가 티베트 망명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1958년 미국해군, 위성발사 성공
1958년 CBS 최초의 DJ프로그램(노래에 얘기싣고) 신설
1957년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 비행기사고로 사망
1957년 3월 17일 필리핀의 반공지도자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남부 필리핀 세부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많은 수행관리들과 함께 사망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막사이사이는 1932년 필리핀대학을 졸업하고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민간회사에 근무했다. 1945년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명령으로 그의 고향인 잠바레스 주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946년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1950년에는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당시 필리핀은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후에도 부흥이 늦어진 데 따른 경제 위기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일 게릴라 조직이 모태가 된 후크단(후크발라하프)의 반란 때문에 정치 불안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53년 10월 11일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의 노력으로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르자 반란은 평정됐다
1956년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무장관 내한
1955년 동아일보 이승만 대통령을 '괴뢰 고위층'이라 오식... 제5차 무기정간
1953년 서부전선서 중공군 4개대대 섬멸
1950년 한국-스페인 국교 수립
1949년 국방신문 창간
1949년 언더우드(원한경)박사 부인, 남로당 하수인에 피살
1949년 3월 17일 연희대 명예총장 언더우드 박사의 부인 엘터여사가 자택에서 복면을 한 괴한들이 쏜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졌다. 엘터여사는 이날 연희대 교수부인 20여명을 초청해 파티를 열고 있었다.
연희대학생이며 민주학련위원장인 김석준 등 범인 6명은 사건발생 5일 만에 모두 검거됐다. 이들은 "파티에 참가한 모윤숙 여사를 향해 쏜 총탄이 빗나가 엘터여사가 맞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은 한미우호관계를 깨뜨리려 했던 것이 이들의 의도였다. 장례식은 연희대학교장으로 치러졌다.
1948년 브뤼셀서 서유럽 5개국 연맹조약 승인
1942년 명륜전문학교 (현 성균관대학교) 설립인가
1938년 중등학교에서 조선어과목 폐지
1937년 총독부, 일본어 강제사용 시달
1930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착공
1928년 부산항 제2기 축항공사 준공
1919년 러시아의 대한인 국민회, 독립 선언서 발표.
1889년 미국, 존 홀랜드 잠수함 첫 개발
1861년 이탈리아, 분열 1400년 만에 통일
476년 서로마제국이 오도아케르에게 멸망한 이래 분열과 대립을 반복해 온 이탈리아에 통일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들어서였다. 특히 마치니, 카보우르, 가리발디는 이탈리아 통일의 3걸이라 불릴 정도로 활약이 눈부셨다.
청년 이탈리아당을 이끈 마치니는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살리자는 리소르지멘토(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독립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9개로 찢겨진 소국(小國)들을 통합하는 과제는 사르디니아 총리 카보우르에게 주어졌다. 사르디니아는 사르데냐 섬과 본토의 피에몬테(프랑스와 접경지역)를 영토로 하는 입헌군주국이었다.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를 이용해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중ㆍ북부에 위치한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등 소국들과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여기에 가리발디가 1860년에 1,000여명의 ‘붉은 셔츠단’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한 뒤 사르디니아 왕국에 헌납함으로써 이탈리아는 비로소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1861년 3월17일 사르디니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통일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됐다. 통일왕국에서 제외됐던 베네치아와 로마교황령은 사르디니아가 동맹을 맺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1866년)와 프랑스(1870년)를 물리침으로써 각각 이탈리아 영토로 편입됐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분열 1,400년 만에 전 국토가 하나되는 감격을 누리게 됐다.
1846년 별의 위치를 측정한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 사망
1834년 자동차의 아버지 독일 공학자 고틀리브 다이믈러 출생
1680년 프랑스 모럴리스트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사망
1328년 스코틀랜드, 영국으로부터 독립
180년 로마의 황제(161~180 재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망 - `명상록`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