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되는 1월24일(음력 2019 마지막날)강화도로 출발했습니다. 둘째처남이 형제자매들을 위해 강화도 동막해수욕장 근처에 펜션을 예약했다고 해서죠. 고향가는 길이니 기분이 좋았답니다. 동행할 차 2대는 도착시간은 오전까지 여건에 맞게, 초지대교 지나 우측의 "초지진" 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큰처제 차를 우리 차고에 두고, 내 차에 큰처제를 태우고 출발했습니다. 둘째처남이 펜션 제공하니 큰처제와 집사람은 1박2일 모든 음식과 윷놀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나의 차 트렁크와 뒷좌석 1자리(처제)외에는 온갖 음식과 선물로 가득찼죠. 2020 새해 설날 내일을 고향에서 보낼 것에 기분 좋아 운전대도 가벼웠던 것입니다. 제일한강교 중지도에서 U턴하여 올림픽대로로 룰루~♬ 랄라♪~진입 했습니다. 강화도길은 잘 되어 있어 차가 안막히면 서울에서 40분 걸린답니다.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도로로 통진~ 양곡쯤 가고 있었는데, 이게! 왠 일인가요?! 목적지 약8~10Km 남겨두고 게이지 판에 경고등이 들어오기를, "발전기이상"이 보였습니다.
초지진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것입니다. 아들 황,Y-J 정비사에게 전화하니, "발전기 고장시는 충전이 안돼서 밧데리 내 전기가 다 소모되면, 주행중에 어디선가 정지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안전한 곳에 주차후 위치를 알려주면 아들이 오겠다고 했죠." 나는 아들 말을 무시하고 큰 일은 없겠지!~그냥 게이지가 문제 이겠지~ 생각하고 겁없이 달렸던것입니다. 초지대교 건너서 초지진으로 우회전 해 주행중 차의
감각이 무거움을 감지했지요. 초지진 주차장에 10시30분쯤 진입했죠. 후진으로 주차와 동시~ 게이지 판에 '변속기작동불가'가 들어오자마자, 모든 차의 작동이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너무나도 신기하고 하늘이 도와 준것입니다. 도로나 초지대교 교량위에서 차가 퍼졌다면 쌩고생하고 망신을 당했을 것인데요 ~~!서울 아들에게 모든 상황을 전화 해서, 아들 차를 갖고 와서 차량 을 아들차로 바꾸어 주고, 랙카차로 고장차를 갖고 아들 정비소로 가기로 통화 했습니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T풀러 잠언집>는 말이 있드시 초지진 여행 즐기는 것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ㅡ우리가 오고나서 20분 지나 둘째처남 차에
가족 세명이 도착했습니다. 총10명 일행중 6명이 도착해, 초지진 안에 3명은 입장료700원/1인, 3명은65세이상 무료입장 했습니다.
휴일이 시작돼서 해설사가 부재중이라, 내가 강화도 태생인지라 해설을 하기 시작했죠. ~~^~~
"강화도는 지리적 조건이 4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김포육지와 강화도간 약 700~800m 거리로 이격되어 있습니다. 조수 간만의 차로 흐르는 바닷물의 유속이 빠릅니다. 물의 흐름이 진주 앞바다 웃돌목처럼 빙빙 돕니다. 고려시대 때는 적국으로부터 나라 보호를 위한 수도로도 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쇄국정책 통치시에 프랑스 천주교 신부& 신도들 8천명이 살해 되었죠. 그들중 한명의 신부가 도망가서 중국 주재 프랑스대사에게 그 사실을 알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공격해
와 조선의 수비병들이 전등사 정족산 광성보 등 모든 진지에서
격젼을 벌여 흥선대원군이 승리한것이 1866년 있었던 '병인양요' 입니다. 그때, 대원군은 퇴각하는 프랑스 함대를 보고 의기양양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신미양요는 미국의 함대가 1871년도에 침입해 왔는데 퇴각시키고,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웠던 것이지요. 1873년12월부터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요.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놈들은 1875 년에는 운요호와 제이정묘호를 부산에 입항 시키고 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무력적인 시위를 단행 했습니다. 1875 년 9 월 20 일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 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포격을 가해 조선수비병은 일본군에 패했습니다. 일본군은 초지진과 영종진에서 방화 살육 약탈을 진행한 뒤 퇴각했어요. 그후 일본은 운요호사건에 대한 사죄, 조선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도 부근지점의 개항 등의 조건을 내세웠답니다. 결국, 1876년2월27일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약'을 체결하였고, 일본은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되었습니다.)
일본놈들은 1894년7월~1895년4월 '청일전쟁' 승리 후, 교만이 차올라 1895년8월20일(양력10월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904년~1905년 '러일전쟁'은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간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으로 그 결과 시모노세끼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요동반도 영유를
확정하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강화도의 방어 역할이 얼마나 컸고
역사의 흐름에 중요한 섬이었던가를
알겠다고 가족들이 오늘 역사를 공부해서 뜻깊은 기회였다고~~ 특히, 영수 백처남댁의 반응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이것도 Multi 가족여행의 즐거움이자
보람인 것 같습니다.
아들이 11시40분 도착해서 아들 차로 모든 짐을 옮기고, 전등사 입구 맞은편 "미리네 바지락칼국수전문" 식당에 가서, 칼국수와 쭈꾸미볶음에 밥을 비벼 먹으니, 이 맛도 Multi가족여행의 보람이란걸 느끼며 감사했습니다. 내가 카드로 결재하니, "나이 먹으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는 말이 맞는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추가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초지진의 특이한 "역사의 흔적"은 운양호사건때 400년 된 소나무의 몸체와 석축에 일본 포탄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볼 수가 있지요
소나무는 우리 민족들이 제일 좋아하는 나무이자 새명력이 강하며 몇천년도 살아남는~ 비바람에도 철갑을 두른듯 강인한 나무이지.
식사후는, 민통선 안에 있는 강화
평화전망대로 향했다.35분정도
걸렸다. 강화대교 부터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어서 편리하고 빠른 시간에 도착했고,
헌병들이 민통선 안에 들어갈 때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았습니다. 브리핑 전망대
바로 앞에 북한 마을이 보임에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들께서
많이 찾는다는 해설사의 추가적인 설명에 가슴 뭉쿨했다. 우리 아버지가6.25전쟁 발발 후 9.28 수복 전 강화읍 포로수용소 (3.1독립운동 주동자& 길상면 초대면장 이유로 체포 )에서 끌려가시다가 1950.9.25.개성 송악산 근처에서 순국하신 곳이 보이는거 같아 가슴이 아파 밖으로 나가서~ 조수미의 "그리운 금강산"을 들으며 사진을 찍는 추억으로 남겼죠. 4시경 화도면 동막 "파란별펜션"으로 출발 했습니다.
다른 한팀 가족(큰처제 사위와 딸, 손녀)3명은 직접 펜션으로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큰처남은 대한항공에서
은퇴후 큰 xx교회의 사무직으로 근무해 퇴근후 직접 온수리 버스터미널로 오면, 내가 픽엎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훌륭한 저녁식사를 한 것은 집에서
준비 해 온 음식 덕분에 사랑이 둠뿍 담긴 덕분이었다. 식사후 각자의
밀린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는 분위기로 즐거움이 엿보이더군요. 그중에 네살짜리 김다연의 재롱잔치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니
아기들이 보배더군요. 분위기 메이커고요. 나는 카메라와 다리를 소지하고 서해바다 Sun-set 노을
촬영하러 나갔습니다. 붉은 태양이 바다로 들어가며 남기는 불꽃 들이
서쪽하늘에 비침은 한폭의 그림 파노라마더군요.
저녁 7시경 큰처남이 온수리 버스 터미날에 도착 했다는 전화받고 집사람과 함께 가서 픽엎 해 와서 저녁식사 대접했고요. 밤 9시부터 윷놀이 단판승으로 2명/1팀, 4팀으로 웃고 즐기는 중 1등에서 4등까지 정해져 상품 수여하는 시간도 추억이죠. 10시30분, 일제히 취침했고요. 내 옆에 자는 둘째 처남이 코를 많이 곤다는 처남댁의 Announce 에~ ~겁도나고 코고는 소리에 잠 못자는거 아닌가 하고 은근히 걱정도 했지요. 그러나, 피곤한 몸에 누우면 잠에 떨어지는 나이기에 꿈나라로 갔다가 새벽 5시반에 기상했으니 모든게 잘 된 겁니다. 다시 아침 해를 보며 바다 갯벌을 보러 밖으로 나갔는데 날씨가 춥지않아 다행이고, 고향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왠지 좋아지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때는
이곳 동막해수욕장으로 소풍을
오거나 수영하러 오던 곳이거든요.
고등학교 방학때는 고향에와서,
교회 여름성경학교 선생님들과
동막해수욕장으로 단체 물놀이
단합대회를 와서 즐기기도 했던 곳이고요. 내가 자랄때는 바닷가의
땅값은 헐값이었고, 내륙의땅 논값이 금값이었죠. 이제는 판도가 바뀌어 바닷가땅은 평당 200~300만원이면,
논값은 평당20~30만원대로 바닷가
토지값의 10%밖에 안되는 현상입니다. 한반도 통일을 대비하여 강화도~개성~평양 라인을 "평화Belt"로 정해 영정도에서 강화도를 거쳐 개성을통과 평양으로 고속도로를
개설할 장기 계획이 있어 땅값이
오른 상태이다.
아침10시반에 4살 다연이 손녀와
박상훈 청년 그리고 모든 처남처제들과 서로 설날 아침 세배로 인사를 나누며, 덕담을 주고 받아 여행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 후에 펜션 첵크아웃하고,
초지대교 큰누님 차고지인 3,700평 대지에 와서 매형과 누님께 새해 인사를 했습니다. 내가 서울서 키우던 진도개가 강화 누님댁에 있어 가끔 가서 만나면 나를 알아보고 우는 피스의
목소리는 나를 정감케 해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개장 청소를
해주고 헤어집니다.
누님댁 바로옆에 2년전에 "강화LUGE SEA SIDE RESORT"가 생겨
많은 이용객돌이 성황입니다. 콘도라 타고 올라가 회전전망대에 올라 인천과 360도 서해바다 경치 구경을 하거나, 푸드코트등 각종 엔터테인먼트 테마 리조트로 재미있는 테마파크입니다. 특히, 루지를 타고 내려오는 스릴은 65세 이상은 안전상 금지사항이라 슬펐던 마음이 들더군요! 어느새 내가 65세가 넘어 놀이기구를 못타고 더구나 70살 일흔이라니~~~! 아이들은 너무 행복한 놀이고, 눈썰매장은 인기이니~
꼭 가족들 끼리 가서 즐기시기를 권합니다! 서로간에 좋은 소통의 계기를 가질 수 있을겁니다. 모든 가족들의 행복한 소리로 끝을내고, 10명이 3대의 승용차로 나누어 타고 상경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던 둘째
처남의 솜씨로 햄버거와 핫도그를
펜션에서 만든 것을 차안에서 점심으로 나누어 먹으니 꿀맛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두가 멀티(Multi) 가족여행의 보람이자 재미인 거같죠?
담에는 큰처제 사위가 운치있는 펜션을 예약한다고 하니, 기대해도
될듯하네요. 참여한 우리가족 강화도 역사도 배우고 서로의 사랑의 실천을 느낌에 보람을 가졌으니 성공적인 만남과 여행이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상대 사람을 알고자하면
첫째. 여행을 함께한다
둘째. 식사를 함께한다.
셋째. 잠을 함께자본다.
고.황도문애국지사 직계 가족들도
언젠가 한번 단체여행 시도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보면서 꿈을 꿉니다. /샬롬~
첫댓글 가족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설연휴 보내셨네요....
너무 좋아 보이세요.
보람차고 행복한 가족여행이었군요. 여행기를 읽어내려가니 부럽기도 하구요.
두 분의 훌륭한 인품과 포용력에 온 가족이 즐거웠던 여행이라고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