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가 있는 죽집, 조팝꽃>
석간에 또 그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시를 쓰는 내 친구 구동석을 인사동 손칼국수집에서 만난 것은 지난 설날께였다. 그때 그는 막 설날특사로 풀려나 며칠 안되던 때였다. “그래, 앞으로 뭘 해먹고 사누?” 내가 물었다. 고등학교도, 그 다음 학교도 같이 다녔고, 한때 같은 직장에도 근무한 적이 있는 터인지라 그와 나와는 여간 막역지간이 아니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다시 베껴 쓰곤 하는 손바닥만한 전화번호부의 맨 윗줄에 매년 그의 이름이 떠억 박혀 있는 것은 그의 성이 딱 구(具)씨여서만은 아닌 것이다. 만약에 그런 이유에서였다면 내 성은 함(咸)씨인데 어떻게 내 이름이 매년 그의 수첩 맨 앞장 맨 윗줄에 떠억 자리잡을 수 있었겠는가, 이 말이다. 감옥에 있던 시간은 빼고 말이다. “죽을 끓여먹고 살 작정이다.” 구동석이 말했다. 그는 농담과 진담이 구분되지 않게 말하는 독특한 음색과 어조를 지닌 사람이었다. 표정도 그랬다. 그래서 늘 피해를 입는 것은 실상 그이긴 하지만. “놀고 있구나, 놀고 있어!” 내가 코로 웃었다. 어떻게 죽을 먹고 산단 말인가. “노는 게 아니다. 넌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는 친구지만 말 밑의 사정을 잘 알아듣질 못하는 흠을 때로 드러내곤 해서 내 안타깝게 여기는 바이다. 내 얘기는 죽을 끓여서 번 돈으로 쇠고기와 시금치도 사먹고, 아파트관리비도 내고 애들 학용품도 사주겠다, 이런 얘기다.” “그렇담 죽 장사를 하겠다는 말이냐?” 죽을 쑤며 사는 것보다 고상한 일이 더 있을 것 같지 안구나.” 구동석이 말했다. 그가 말하는 <죽>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무슨 죽을?” “팥죽과 녹두죽, 그리고 콩죽…… 등등이다. 손님들이 젤로 좋아하는 죽이 어떤 죽인가를 살펴본 뒤, 그놈으로 주력할 작정이다. 팥죽이면 팥죽, 녹두죽이면 녹두죽……” 내가 조금 정색을 하자 구동석은 아주 반가워 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팥죽은 원래 잡귀를 쫓는 신성한 음식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난 팥죽을 고집하지는 않을 거다. 나는 내가 마누라하고 손수 끓인 죽을 아주 깨끗하고 정성 들여 만든 고급 자기에 담을 작정이다. 이웃 나라에는 커피 한잔에 만원쯤 하는 카페가 있는데, 그 집이 늘 만원이라고 하더라. 특별히 비싼 커피를 특별한 접대를 받으면서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순간에 필요로 할 수도 있다는 게 바로 인간이다. 이 점에 착안한 거지. 나는 좋은 그릇에 죽을 담지만 인간의 허영심을 교묘히 이용해 터무니없이 비싸게 받는 그런 짓을 안 할 작정이다. 값은 한 그릇에 이천원 정도, 어떠냐 비싸냐?” “동대문시장의 팥죽보다는 맛있어야 될 것 아니냐?” 내가 물었다. 나는 시장에서 맛있는 팥죽을 먹어본 적이 있었다. “그 정도 맛만 내면 된다. 사실 그보다 맛있기가 쉽지 않을 거야. 그 정도 맛에 깨끗한 그릇, 들릴락말락 깔려 있는 음악, 그리고 아주 맛있는 물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또 있다.” “뭐냐?” “모자가 벽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거다.” “무슨 뚱단지처럼 모자는 모자냐?” “나는 모자를 참 좋아한다. 사람이 모자를 머리에 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모자를 쓰는 행위는 삶에 대한 겸손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나 어른을 만나면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다. 그리곤 다시 쓴다. 얼마나 멋지냐? 염소나 고양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얘기지. 그래서 모자는 곧 그 모자를 쓴 사람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셈이지. 어떤 사람의 모자에는 땀 냄새가 배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모자에는 싸구려 향수 냄새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자 속에 새를 넣어 갖고 다니기도 할 거고, 어떤 사람은 모자 속에 비상금을 넣어 갖고 다니기도 하겠지. 어떤 시인이 모자를 휙 벗으면 비둘기가 푸르륵 날아간다. 멋지지 않냐? 난 모자 속에 마른 꽃잎을 가득 넣어 다닐 작정이다. 마른 장미꽃을 본 적이 있냐? 난 죽을 끓이다가 반가운 친구가 나타나면 마른 장미꽃이 가득 들어 있는 내 모자를 벗어 휙 던질 작정이다.” 내가 크릉, 하는 신음소리를 내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럴 때 내는 내 신음소리가 감동받을 때 내는 신음소리라는 것을 친구인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차릴 죽집의 이름을 <모자가 있는 죽집, 조팝꽃>으로 할 작정이다. <조팝꽃>이 내 첫 시집의 제목이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모자는 그래, 어디서 구해놓을 작정이냐?” ”내가 만들 작정이다. 감옥에서 나는 재봉틀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이제 감옥에서 나왔으니 모자 만드는 법을 배울 작정이다. 훌륭한 선생 한 분을 이미 알아놓았지. 처음에는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보통의 모자를 만들다가 나중에는 이 세상에서 이 구동석이만 만들 수 있는 모자를 만들 작정이다. 많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힘이 센 자나 약한 자나…… 모두 내가 만든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게 할 작정이다. 그러다 가끔씩 심심하면 <시인 구동석의 모자전(帽子展)도 열 작정이다. 그 전시회장 입구에서 하얀 조팝꽃이 조그맣게 그려진 성냥을 무료로 나눠줄 작정이다.” 그가 눈을 조금 감고 고즈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또 뭐 더 계속할 얘긴 없냐?” “또 있다. 나는 매일 <모자가 있는 죽집, 조팝꽃>의 유리창을 정성껏 닦을 작정이다. 할 거다. 그러면 손님은 내가 끓여준 죽을 한 친구들이 죽집을 개업할 때 사온 화분을 입구에 가지런히 줄을 맞춰놓고 매일 물을 줘야지. 그러다 첫손님이 오면 내가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할 거다. 그러면 손님은 내가 끓여준 죽을 한 숟가락 먹은 뒤, 고개를 쳐들어 벽에 걸려 있는 모자를 보곤, <저건 무슨 모자요?> 그러면 <아, 제가 만든 것이라오. 맘에 드신다면 그냥 드릴 수도 있소이다>고 말한다. 어때, 근사한 생각 같지 않냐?” 시 쓰는 내 친구 구동석이 밝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넌 참으로 행복해보이는구나.” 내가 말했다. “아니다. 나는 쓸쓸한 시인일 뿐이다.” “매우 행복해보이는데 뭐가 그렇게 쓸쓸하냐?” “세월이 막 흘러가고, 강물이 진종일 흐르고 바람이 불고, 노인들이 죽고, 어린애들이 씩씩하게 자라는 게 쓸쓸하다. 넌 그렇지 않냐?” 그가 내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너무나 축축해졌기 때문에 나는 하마터면 빈 칼국수 그릇에 머리를 박고 큭큭 흐느껴 울 뻔했다. 앉으나 서나 시인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혼을 가진, 내 친구 구동석과 인사동 칼국수집에서 헤어진 뒤 한 달, 내 손에 든 석간에는 그가 또 잡혀갔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번에도 그가 쓴 시 때문이었다. 내가 할 일은 또다시 그가 출감하기를 조용히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언제쯤 <모자가 있는 죽집, 조팝꽃>에서 그가 끓여준 죽과 그가 만들어 걸어놓은 모자가 그가 정성스레 닦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을 느낄 수 있을까.
- 최성각 엽편 소설집『택시 드라이버』수록, 1996, 세계사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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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글이라서 함께 읽어보자고... <택시 드라이버>라는 책은, 티비프로그램 <느낌표> 있지? 거기 '책,책,책을 읽자' 코너에 권장도서로 선정된 바 있는 책이야. 최성각님은 풀꽃평화연구소 소장이시고 <50헌장>편집장이시며 금연못각이라는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바로 그 분이셔...
오랜만에 왔더니 뭐가 많이 바뀐 것 같네. 회람도 없어지고..그래서 음악만 베껴 옮길 방법을 모르므로 그림까지 통째로 복사해 옮길 수 밖에 없었다.음악실에서..미선이가 올린 것이구나..저 사진은 '프리다'영화 한 장면인 거 같은데.. 맞니?
우리 희숙이 영리하다..!!..머가 좀 바뀌었어.
소스중 <IMG style... 은 이메지, 그리고 <EMBED... 은 음악 소스, 쪼까 도움이 됐을까? 여하튼 좋은 글 고맙네그랴~
미선아, 긍게 옛날에는 '회람'이란 것이 있어서 들어가서 소스를 보고 고를 수 있었는디 지금은 소스 볼 길이 없어져 붕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니믄 소스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겨? 앗, 그러고봉게 재밌는 얼굴들도 없어져부러따!! 힝..
구동석, 그는 지금쯤 조팝꽃죽집을 개업했을까? 희숙아, 나도 효숙이한테 배웠거덩? 여기서 설명할려면 너무 기니 효숙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봐라 잉. 재밌는 얼굴은 얼굴 옆에 역삼각형 클릭하면 나온다네.
희숙아~ 애썼다!! 공부방의 "게시판에 회람이 없어졌어요~ "를 읽어보면 도움이 많이 될걸? 어서 가서 읽어봐봐!! 다른 사이들도... ^^*
우리 미선이 친절하다...!!
미선아, 나땜에 애썼다. 그래, 공부방에 가서 열씨미 공부해 볼께. 고마와,잉.전숙이도 신경써줘서 고맙고..잉^^
그런데 대글 내용이 이기 먼가 이상하지 않씀둥? 내가 올린 글에 대한 내용은 없꼬 마리제! 씩씩!! 얼매나 아름다운 글인디. 전숙이하고 미선이가 그래도 기본 예의를 차려줬을 뿐, 우리 짱이라는 조자 성자 자자 쓰는 아지매는 봉창만 풍풍 뚫고 있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