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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균주의’ 이념으로 평등한 통일국가 꿈꿔 | ||||
(33) 조소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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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趙素昻)은 1887년 4월8일(음력)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시)에서 부친 조정규와 모친 박팔양의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이름은 용은(鏞殷), 자는 경중(敬仲)이다. 일본 유학을 거쳐 중국 망명에 이르기까지 본명 이외에 다양한 호와 필명을 사용하였으나 1920년대 이후 자신의 호로 소앙(素昻)만을 사용하였다.
조소앙은 할아버지의 가르침으로 5세부터 15세까지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오경’·‘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대한제국 관료의 길을 모색하던 그는 16세가 되던 1902년경 서울로 올라와 7월 성균관 경학과에 입학하였다. ‘구본신참’의 관점에서 신학문 학습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소앙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한편, 성균관을 퇴학하고 곧바로 황실특파 일본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4년 10월9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10월15일 동경에 도착한 소앙은 11월5일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는 한국 유학생만을 위한 별도의 반을 구성하여 일본인과 구별하고, 더욱이 실업교육 위주로 교육하였다. 그러던 차에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소앙은 “오장이 끓는 듯한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때에 한국 유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무리라는 동경부립중학교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이에 크게 반발한 한국 유학생들은 12월5일 동맹휴교를 단행하고 소앙을 비롯한 37명 전원이 기숙사를 퇴사했다. 이는 중학교 당국의 교육방침에 대한 유학생들의 평소 불만이 폭발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한국 유학생들의 민족적 울분이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통감부 설치 이후 대한제국 정부의 변화된 상황으로 우여곡절 끝에 1907년 3월31일 동경부립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08년 3월 명치대학(明治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여 본과를 거쳐 1912년 7월 대학을 법학과 졸업하였다. 소앙은 재학 중 한국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의 편찬부장, 총무 등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합방’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감시 아래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병을 얻기도 한 그는 ‘나라가 망하니 몸도 병든’ 상황이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이후 소앙은 멸망한 조국과 가난한 민족을 구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명치대학을 졸업한 소앙은 1913년 북경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등이 만든 동제사에 가입하고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했다. 소앙은 일본 유학 중 동서양의 다양한 지식과 사상을 학습하였다. 동시에 국망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경험해야만 했다. 종교와 철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나갔다. 소앙은 스스로를 공자·맹자·소크라테스·예수·부처 등의 성인과 동등한 반열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사고는 곧 자기 자신이 성인이 되어 새로운 종교를 개창하여 중생과 민족을 구하겠다는 의지로 발전했다. 소앙의 종교적 탐색은 1914년 육성교 제창으로 나타났다. 육성교란 요일별로 6명의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매일 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고 훈련하는 계획 속에 구상된 것이었다.
소앙이 육성교 제창 이후 독립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한 것은 1917년 7월 ‘대동단결의 선언’의 작성·발표였다. 소앙은 ‘선언’을 통해 독립운동의 효율적 전개를 위해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정부 조직 결성을 통한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상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18년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윤세복, 이시영, 윤기섭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로 끝나자 길림에 은거했다. 소앙은 길림에 은거하던 당시 ‘국내 동포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고,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되어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좌절하지 않았다. 1919년 2월 길림에서 여준, 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고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발표했다. ‘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군의 혈전을 선포함으로써 독립전쟁 노선을 지향하였다. 그렇다고 독립외교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밀파한 나경석을 만나 국내의 3·1독립선언서를 보고는 더욱 고무되었다. 소앙은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민족의 단결력과 저력에 대한 자신의 회의가 잘못임을 깨달았다. 그는 3·1운동에서 ‘10년 동안 조성돼 온 혁명의 불꽃은 폭발하여 우리의 발랄한 민족정신과 위대한 단결력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감격했다. 독립투쟁의 역량이 국내에서 고통 받고 있는 대중 속에 있음을 발견한 소앙은 3·1운동 직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서 대한민국임시헌장 기초작업에 참여했고, 초대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11일 선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는 3·1운동에 기초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했음을 밝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가 국체이며, 남녀·귀천·빈부의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임을 선언했다. 즉 정치적으로는 민주공화제를 사회경제적으로는 평등사회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3·1운동 직후 소앙은 독립 외교활동을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특히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1919년 5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약 2년 동안 유럽 및 소련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면서 유럽의 ‘학계 거성과 혁명 대가들’과 면담하였다. 중국으로 돌아온 소앙은 1922년께 ‘한살임(韓薩任)’을 조직하였다. 한살임은 민족혁명과 계급혁명의 실현을 통해 세계일가의 대동사회를 실천하는 당적 조직으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 단체였다. 그는 한살임당의 경전으로 ‘발해경’을 저술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조소앙은 호를 소앙(嘯?) 즉 ‘읊조리는 나’에서 소앙(素昻)으로 바꿨다. ‘흰색의 나’라는 뜻이다. 소앙은 1926년 한국유일당촉성회 결성에 참여했으나 민족운동 진영의 이념적 대립, 주도권 문제, 조직 방법의 차이 등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국 소앙은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조직 당시 발기인이었으며 상무이사를 역임하고, 1934년 1월 한국독립당이 본부를 항주를 옮긴 뒤 내무(총무) 책임을 맡았다. 이때 한국독립당은 삼균주의에 기초한 당의와 당강을 채택했다. 소앙의 삼균주의가 추구하는 사회는 평등사회로서 정치·경제·교육 세 분야에서 골고루 평등이 실현되는 이상적 사회이다. 소앙은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민족주의·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과 견줄 수 있는 민족혁명의 지도이념으로서 삼균주의를 구상하였다.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른 소앙의 삼균주의 실천계획은 1939년의 ‘독립운동 방략’, 1941년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구체화 되었다.
이런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한반도는 8·15 직후 미국과 소련 양국 군대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소앙은 1945년 12월 귀국하기 위해 중국을 출발하면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발표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 소식이 알려지자 소앙은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개진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소앙은 해방정국에 대해,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제국주의 세력은 무너졌으나 ‘아직도 우리의 국토와 주권은 완전히 광복되지 않은’ 상황으로 진단했다. 그는 반탁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이승만, 김구의 반탁운동에 동참하였으며, 1947년 2월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소앙은 1947년 9월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는 것을 오히려 38선 철폐와 신탁통치 철폐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통일 독립국가 건설의 기회로 생각했다. 동시에 삼균주의 혁명 전위대로 1946년 12월에는 삼균주의청년동맹을, 1948년 3월에는 삼균주의학생동맹을 결성했다. 4월에는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도 다녀왔다. 소앙의 청년동맹은 1948년 5월 ‘단정문제’와 ‘철병과 통일문제’에 대한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소앙은 단정 수립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분단체제를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과도적 단계로 인정했다. 소앙은 대한민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합법적 국가임을 인정하면서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1948년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사회당은 평화통일노선을 내세우고, 내각책임제와 단원제를 지지하였다. 소앙은 사회당을 이끌어가면서 삼균주의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정치·경제·교육 세 부문으로 나눠 구체적인 정책방향을 정리하였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더욱 인정하고, 국제협조와 외교를 통한 통일과 의회주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소앙은 과거의 혁명적 방법에서 점진주의적이며 온건한 방법으로 전환하였으며, 1950년 5월30일 총선거에서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로 당선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소앙은 엄항섭, 안재홍 등의 인사들과 함께 납북되었다. 북에서 엄격한 제약과 통제 속에서도 1951년 7월 유엔군측과 북측 사이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휴전운동과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4월 소앙은 자신이 구상한 중립화 통일방안을 북측 인사와 납북 인사들 앞에 공표하였다. 김일성을 공식적으로 만난 자리에서도 ‘중립화만 보장되면 외부세력의 침략과 간섭은 없어지고, 나라의 평화도 보장되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이룩하고 통일 위업 달성을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하면서 중립화 통일방안이 전민족적 통일방안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55년 김두봉을 만난 자리에서는 ‘정치적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칼을 들고 자신의 가슴에 꽂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중립화 통일운동을 실천하기 위한 한국독립당 재건과 자유로운 정치활동 보장을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다.
북측과 일정한 타협 아래 새로운 통일운동 조직을 모색한 끝에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되자 최고위원이자 상무위원 및 집행위원을 겸하는 등 지도적 인물로 활동했다. 그러나 ‘8월종파사건’의 영향으로 협의회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북한에서 엄항섭 등 협의회의 지도자들을 반혁명분자라는 혐의로 연행하여 조사하자 소앙은 단식으로 항의했다. 단식 중 질병에 걸렸으나 병원 치료를 거부하며 항의농성을 계속하였다. 결국 병세가 악화된 조소앙은 1958년 9월10일 평양의 남산 중앙병원에서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삼균주의 노선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구나. 그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 줄 것을 바라오.” 삼균주의를 내세워 독립과 통일을 위한 지도이념으로 삼고 그 실현을 위해 남과 북에서 온몸을 바쳐 실천했던 조소앙은 통일된 조국, 균등사회 실현을 후대의 유산으로 남긴 채 위대한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평양시 교외 신미리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조소앙이 사망한 지 30여년이 지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8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으며, 북한에서는 1990년 조국통일상을 수상하였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 균등사회 실현을 위한 그의 치열한 삶을 기리고, 삼균주의에 기초한 민족통일과 세계평화의 미래를 전망하며 조소앙의 서거 50주년을 맞이하고자 한다.
/박철하 경기기록문화포럼 학술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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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소앙선생은 성균관 최연소 입학생, 메이지대 법대 졸, 조선법률학교 교수 역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관으로 혼란의 시절 러시아 레닌, 영국 맥도널드 상원의원, 프랑스의 앙리 베르그송(노벨문학상)과 만나 정치와 철학에 대해 논의하고 북한, 한국 모두에서 선생님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이시영 집안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독립운동가 집안입니다.
귀하고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미 한인사회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부쩍 눈에 띰니다.
근데 그사람들은 자기가 병든걸 모름니다.
거짓말을 밥먹듯하고 먹는것 이외는 보이지 않는 즉 정신은 뒤로 제쳐놓고 아주 작은 물질만을 위해 찾아다님니다.
지식인인데도 말바꾸기를 정치인들보다 심하고 그러면서 종교에는 열심 이지요.
데레사 수녀, 김수환추기경, 이런 인격자 분들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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