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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해진 자의 정결례
민 19:1-10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3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4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5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6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7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8 송아지를 불사른 자도 자기의 옷을 물로 빨고 물로 그 몸을 씻을 것이라 그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9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
10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 자도 자기의 옷을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그중에 거류하는 외인에게 영원한 율례니라
민 19:1-10 / [암송아지를 태운 재]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나 여호와가 이르는 규정은 이러하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 몸이 튼튼하며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 끌고 오게 하여라. 3) 너는 그 암송아지를 엘르아살 제사장에게 갖다주어 그 암송아지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사람을 시켜 자기가 보고 있는 데에서 잡게 하여라. 4) 엘르아살 제사장은 그 송아지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만남의 장막이 있는 쪽으로 일곱 번 뿌려라. 5) 그런 다음 자기가 보고 있는 데에서 그 암송아지를 태우게 하여라. 고기뿐 아니라 가죽과 피와 똥까지도 모두 불에 태워라. 6) 그 암송아지를 태울 때 제사장은 송백나무와 우슬초 가지와 붉은색 실을 가져와 그 불 속에 집어 던져라. 7) 이렇게 한 다음 제사장은 몸을 깨끗이 씻고 입고 있던 옷도 깨끗이 빨아 입은 뒤에 진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사장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부정 탄 것을 벗을 수 있다. 8) 암송아지를 불에 태운 사람도 몸을 깨끗이 씻고 입고 있던 옷을 빨아 입어야 한다. 이 사람도 저녁때가 되어서야 부정 탄 것을 벗을 수 있다. 9) 암송아지를 태우고 남은 재는 부정 타지 않은 사람이 거두어서 진영 밖 부정 타지 않은 곳에 잘 간직해 두어라. 이 재는 이스라엘 공동체 사람들의 부정 탄 것을 없애는 잿물을 만드는 데 사용할 것이다. 이 예식은 죄를 씻어 낼 때 올리는 예식이다. 10)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들인 사람도 몸을 깨끗이 씻고 입고 있던 옷을 빨아 입어야 한다. 그도 저녁때가 되어서야 부정 탄 것을 벗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이든 또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이방인이든 함께 늘 지켜야 할 규정이다.
본문은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1-4) 하나님께서는 특이하게도 모세와 아론을 불러 동시에 말씀하십니다. 그 재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인 붉은 암송아지는 이스라엘 자손의 봉헌을 통해 끌어오게 합니다.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암송아지는 흠이나 장애도, 상처도 없이 온전해야 합니다. 또한 멍에를 메지 않은 아직 순수 상태이어야 합니다. 이 암송아지는 제사장이며 재 만드는 총책임자인 엘르아살에게 주라 합니다. 진영 내에서 잡는 일반 제물과 달리 이 암송아지 제물은 진영 밖에서 잡으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부정과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 합니다.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5-6) 제물로 사용된 붉은 암소는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 등과 같이 구체적인 부위를 포함하여 제물 전체가 완전히 태워져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불 가운데 함께 태우라 명하시므로 정결케 하는 잿물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하셨습니다. 백향목은 모양새와 향, 그리고 내구성이 좋아 왕궁 등 건축물의 고급 자재입니다. 우슬초는 죄와 부정을 정결케 하는 도구로 상징되었습니다(시 51편). 홍색 실은 고급 옷이나 제사장들의 의복에 붉은색 수놓는 데 사용됐습니다.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7-10) 이 모든 작업의 책임자인 엘르아살은 암송아지를 잡은 날을 기준으로 그날 하루가 끝나기까지 부정하다고 합니다. 이는 속죄 제물에 전가된 죄와 죽음에 의해 이를 집행한 사람도 오염되어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암송아지를 잡을 때 입었던 옷도 빨고 몸도 씻으면서 다시 진영으로 들어갈 기한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속죄 제물의 재도 수거할 수 없습니다. 그 재는 정결한 자가 거두어 정해진 특별한 장소로 옮겨 보관한 후에 정결케 하는 물의 재료가 되어 이스라엘 중에 부정이 발생할 때 사용됩니다.
적용: 제사장들이 정결 용 잿물을 만들 때마다 부정과 정결의 뜻을 되뇌었듯 삶 속에서 우리가 거룩함을 유지하게 만드는 경건의 요소는 무엇일까요(롬 8:1-3)?
성경에서 가리키는 죄의 정의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법을 어기는 것이 죄입니다. 둘째로 모든 불의한 것이 죄입니다. 셋째로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입니다. 이러한 죄는 다음과 같은 성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병과 같습니다. 고치지 못하면 죽게 됩니다. 죄는 빚과 같은 성질이 있습니다.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죄는 법과 같으니 범하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듯 죄를 범하면 그에 따른 대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 설 교 >
거룩하라
민 19:1-22 / 이정원 목사(참사랑교회)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 ”(레11:44상).
하나님의 백성은 왜 거룩해야 할까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도 우리는 거룩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은 거룩해야만 합니다. 거룩이란 하나님 백성답게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는 것이며, 죄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정결하게 하는 예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시는 명령입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들은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라는 명령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본문의 배경
본문은 앞의 16장-18장과 연관됩니다. 18장 마지막은 오염에 대한 경고로 끝났습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지 아니하리라”(18:32하) 16장에는 고라 일당의 반역이 있었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죽었습니다. 고라 일당의 반역 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는데, 그 때문에 14,7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만 사천 칠백 명이었더라”(16:49) 이러한 재앙을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려워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17:12-13)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반역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죽은 많은 시체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의 이스라엘은 광야생활 38년 동안 60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체를 처리하며 장례 치르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황량한 광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시체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온 것이며, 그래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만지는 자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그 부정한 것으로부터 정결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된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정결하게 하는 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부정하게 되거든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어 그 사람에게 뿌려서 정결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물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흠이 없고 아직 멍에를 메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 태워서 만들었습니다. 제사장은 진영 밖에서 암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손가락에 찍어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그 암송아지를 불사르게 했는데, 이 때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취하여 함께 사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붉은 암송아지를 완전히 불사른 후 그 재를 거두어 간직해 두었다가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물을 만드는데 사용했습니다(1-10절).
특이한 것은 이렇게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기 위해 암송아지를 태워 재를 만드는 것을 속죄제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9절)
본래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범죄한 사람은 제물을 끌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한 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제사를 속죄제라고 부르며, 이렇게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사람들 역시 속죄를 받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죄의 상관관계 때문입니다.
부정한 자가 정결케 되는 규례
레위기에는 여러 가지의 부정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특별히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자는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11절) 그리고 사람이 죽을 때 그 장막에 있던 자와 거기에 들어가는 자도 부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도 부정하며, 무덤을 만지는 자도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또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진 자도 부정했습니다.
본문에서 특별히 시체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죽음이 죄악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므로 시체를 만지지 말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 백성이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식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것까지 금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피치 못하게 시체를 만졌다 하더라도 정결케 되는 예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법을 지키게 하심으로 죄악과 그 저주를 기억하게 하시며, 그것들을 피하여 성결에 힘쓰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정결하게 되어야만 했습니다. 먼저 암송아지의 재를 취하여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한 사람이 우슬초를 취하여 그 물을 찍어서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되, 제3일과 제7일에 뿌려야 했으며, 당사자는 옷을 빨고 몸을 씻고서야 그 날 저녁부터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경결하리라”(17-19절)
정결케 하지 않은 자
만일 부정한 자가 이러한 규례대로 행하여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은 여전히 부정하여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부정을 정결하게 하지 않은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힌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라”(13절).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임재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막이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정을 정결케 하지 않은 자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이스라엘의 진영에 들어가는 것은 거룩한 공동체를 더럽히는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손상시키는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을 정결하게 하지 않는 것은 큰 죄가 되었으며, 가장 큰 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표하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로 쉽게 부정해질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 1세대들이 광야생활 40년 동안 다 죽어 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죽음과 시체로 인하여 항상 부정해질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우연히 뼈에 접촉되어도 부정해졌으며, 길을 가다가 무심코 무덤을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부정해졌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이처럼 부정해지기 쉽도록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부정한 것에서 회복되어 정결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정결하게 되는 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살면서 날마다 죄로 더럽혀지기 쉽습니다. 그 누구도 죄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범한 죄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는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기 위하여 암송아지가 죽임을 당했고 불에 살라져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재를 물에 타서 뿌림으로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것이 온전하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않은 송아지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순수성을 설명합니다.
암송아지를 진 밖에서 잡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성 밖(골고다)에서 죽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불에 살라졌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완전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암송아지의 피를 일곱 번 뿌린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기 위해 죽임을 당한 암송아지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 모든 일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히9:13-14)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조차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죄로 인해 이렇게 영원히 멸망을 당할 소망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저주와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얼마든지 은혜를 힘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지 모릅니다.
늘 범죄하는 우리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받은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죄를 짓습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에는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해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상이 생깁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멀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이러한 죄를 해결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했다 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복되고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중 한 사람이라도 부정한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정을 씻는 암송아지의 잿물을 예비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죄에 오염됩니다.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주님의 보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7:19)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죄의 은총을 힘입어 늘 정결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
민 19:1-10 / 피영민 목사
서 론
민수기 19장에는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물에 타서 뿌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의 재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 한 가지를 다루는데, 바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매일매일 짓는 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 받는 순간 우리는 죄의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됩니다. 결코 지옥에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칭의의 구원(Justification)’이라고 말합니다. 고인이 되신 백영희 목사님은 이를‘기본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면 기본 구원을 받습니다. 기본구원의 기능은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으면 이미 기본구원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천국 갈 기본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늘 죄의 영향력 가운데 있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천국 갈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셨지만 수시로 죄에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백영희 목사님은 이 성화를 가리켜서 ‘건설구원’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건설구원은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천국에 가면 얼마만큼 상급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죄로부터 차츰차츰 벗어나서 거룩함에 이르면 성화를 크게 이루고 천국에서도 많은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매일 짓는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가도 큰 건설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조그만 상급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짓는 죄를 제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과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에 간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삶 가운데도 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베드로는 그 죄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그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더욱 귀하게 쓰이고 천국에 큰 상급을 쌓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서 간접적으로 살인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은 시편 32편 4절의 고백처럼 마치 몸의 모든 진액이 여름 가물에 마름과 같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계속해서 그런 죄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큰 손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속히 반성문을 씁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반성문을 쓴 것이 시편 51편입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편 51:7)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정결케 해주심을 간구했기 때문에,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왕으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큰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밖에 나와서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을 때에 면목 없는 모습이지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베드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큰 삶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매일 죄의 오염을 처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때때로 영적인 침체와 인생의 좌절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붉은 암송아지의 재’ 교훈은 한 마디로 ‘매일 매일 죄의 오염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광야 40년의 삶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염되기 쉬운 환경 속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불신앙을 통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무려 60만 명이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평균적으로 40년 동안 하루에 약 40명씩 죽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장례를 치르고 곡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행진은 한 마디로 장례 행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염될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를 통해 오염되는 경우는 네 가지입니다. 먼저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19:11). 시체와 직접 접촉하면 그 사람은 부정해집니다. 두 번째로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무릇 그 장막에 들어가는 자와 무릇 그 장막에 있는 자가 칠일 동안 부정할 것이며”(19:14). 장막에서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다면 시신을 만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장막에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오염되어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무릇뚜껑을 열어 놓고 덮지 아니한 그릇도 부정하니라”(19:15). 장막 안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 장막 안에 뚜껑을 덮지 않은 그릇이 있다면 뚜껑 덮지 않은 그릇과 함께 그 내용물도 부정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부주의함에서 오는 부정입니다. 마지막으로 16절입니다.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19:16) 들을 지나가다가 전쟁통에 활에 맞아 죽은 군인의 시신이나 뼈에 몸이 닿아도 그 사람이 부정해 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오염의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2. 오염 처리의 필요성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죄에 오염될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늘 죄인들과 접촉하고, 죄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때문입니다. 이 오염을 처리하지 않게 되면 큰 위험과 손해가 옵니다. 오염을 처리하지 않고 부정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13절과 20절 말씀이 그 결과를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어떻게 보면 작은 범죄에 비해 너무 큰 형벌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벌이 큽니다. 또 20절을 보면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고 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시체 한 번 건드렸다가 암송아지의 잿물 한번 안 뿌렸다고 해서 이스라엘에서 그 사람을 끊어버리는 것은 너무 가혹한 형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사소한 부정에도 큰 벌을 명하셨을까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죄에 오염된 채 살면서도 그 부정을 날마다 처리하지 않으면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요, 엄청난 손해를 초래하는 일이라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건설구원에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을 대단히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3. 오염 처리의 방법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체에 접촉했을 때, 그 오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서 그 재를 받은 후에, 흐르는 물을 취하고 그 재를 물에 타서 우슬초로 찍어 정한 사람이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뿌렸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문헌을 참고할 때 일주일 동안 부정하기 때문에 제 삼일과 제 칠일에 각각 일곱 번씩 뿌려서 그 사람이 정함을 입게 하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19:2)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붉은 빛이 나고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흠 없는 암송아지만이 오염을 제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붉은 암송아지(red heifer)는 흔한 짐승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이 붉은 암송아지는 아홉 마리 밖에는 탄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세시대 한 마리, 에스라 시대에 한 마리, 그리고 그 후에 일곱 마리가 태어났는데 마지막 붉은 암송아지는 AD 69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서 재를 만들고 난 후에 로마의 장군 타이투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AD70년대의 아홉 번째 붉은 암송아지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2년 3월에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가 자연적으로 이스라엘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러자 예언을 좋아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 이 붉은 암송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별 이야기를 다합니다. 2002년 4월 11일자 National Review라고 하는 잡지에서 로드 드레어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글에 “지난달에 태어난 이 작은 암소가 이스라엘에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킬 것인가?”라는 타이틀을 붙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의 제목부터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지만 예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심각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정도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붉은 암송아지가 예수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징조이며, 예수님께서 오시면 모리아 산에 있는 회교 성전을 부수고 그 곳에 여호와를 섬기는 성전을 지으심으로 소위 제 3성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이 붉은 암송아지가 신기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야기들은 다 헛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상징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이 아닙니다. 그럼 이 붉은 암송아지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붉은 암송아지가 태어나면 제사장에게 가져옵니다. 본문 당시의 제사장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붉은 암송아지를 엘르아살에게 데리고 오면 엘르아살은 붉은 암송아지를 끌고 이스라엘 진영바깥으로 나가고, 그 송아지를 끌고 온 사람은 제사장 앞에서 붉은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피를 받은 후에 손가락에 찍어서 회막 정문을 향해 일곱 번 뿌렸습니다.
이처럼 붉은 암송아지는 재도 중요하지만 피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재로 정결함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피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피를 일곱 번 뿌린다는 것은 완전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피가 재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것은 사람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설구원 이전에 기본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천국에 가서 상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 받기 이전에 기본구원을 받는 것이 필수요소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기본구원만 받았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의 대열에 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공해도 실패고, 실패해도 실패입니다. 살아도 비참하고 죽어서 더욱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공하면 성공이고, 실패해도 성공입니다. 살아서도 복을 누리고 죽어서도 영원한 복을 누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가운에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신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붉은 암송아지의 상징
제사장이 피를 손으로 찍어서 일곱 번 뿌린 후에 피를 뿌린 붉은 암송아지의 고기와 가죽, 피와 똥까지 모두 불사르게 됩니다. 이때 제사장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는 곳에 세 가지를 더 던져 넣게 됩니다.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입니다. 이 세 가지와 함께 붉은 암송아지가 다 타면 남는 재를 거둬서 깨끗한 항아리에 담아 진 밖에 둡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정을 입게 될 때에는 흐르는 물을 받아다가 그 재를 물에 타서 우슬초에 찍어 제 삼일과 제 칠일에 뿌려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더럽게 된 것을 정결케 하는 목적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피와 재를 생각할 때에 이 붉은 암송아지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이냐 하는 데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흠없고 죄 없이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이 백향목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우슬초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홍색실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성경 민수기 19장은 대단히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거가 일맥상통하게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에게 기본구원도 주고 건설구원도 줍니다.
결론
이처럼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죄에 오염된 채로 살지 말라는 교훈을 줍니다. 요한복음 13장 10절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유다는 목욕을 못한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목욕은 기본구원을 말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미 목욕을 하셨습니다. 기본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 죽어도 지옥에는 갈 수 없고 천국에 갈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목욕한 것이 끝은 아닙니다. 인생을 가다가, 길을 가다가 발이 자꾸 더러워지면 발 씻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발 씻는 일이 매일의 오염을 씻는 성화의 작업이요, 건설구원의 작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목욕한 사람은 발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발을 살펴보십시오. 내 발은 깨끗한지, 내 발을 씻었는지 날마다 살펴보면서 건설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만약 씻지 아니한 오염, 고백하지 아니한 죄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면 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 마라톤 경주에 참가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진 마라토너는 빨리 뛸 수도 없고 금방 지쳐 버려서 결국 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오염된 죄를 씻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염된 죄를 씻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에는 붉은 암송아지 잿물을 뿌렸습니다만, 지금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필요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오염된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지만, 자백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깨끗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고 오염된 죄를 자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게 되면 우리의 심령은 날마다 깨끗해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4절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이 죄를 짓고 와서 하루에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를 빌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하물며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얼마나 신속하게 자주 우리를 용서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민수기 19장의 말씀을 통해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날마다 죄악 가운데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날마다 자백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 심령이 정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민 19:1-10 / 주병열 목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조상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그 땅을 얻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말 엄청나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함께 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냥 그들의 요구를 있는 그대로 100% 들으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엄마 아빠가 자기의 요구를 잘 들어줄 때만 자기를 사랑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장성하게 되면 때로는 꾸중과 매를 맞을 때조차도 부모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의 응석을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때로는 꾸중을 하시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는 적도 있고,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매를 대실 때도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이 있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우리를 몰아가시기도 합니다.
그 목적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소원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민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시작해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 중에 결정적으로 몇 가지 큰 사건, 아주 큰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가나안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 중에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서 ‘가나안으로 갈 수 없다’. ‘가지 말자,’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극에 달했습니다. 모세는 돌아갈 수 없으니 새로운 지도자를 뽑자는 여론까지 확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10명의 부정적인 보고자들이 죽고, 이 사건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져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는 급하게 가나안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지만, 이로 인해 다시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 후 고라를 중심으로 한 레위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수장들이 250명의 족장들을 모아서 모세와 아론을 배반했습니다. 이 일로 250명의 족장들과 주모자들이 지진과 여호와의 불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어서 250명의 지도자(족장)들을 잃은 백성들은 그 책임을 다시 모세와 아론에게 돌리고, 책임을 묻자 하나님은 다시 백성들에게 염병(전염병)이 돌게 하셔서 14,700명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런 사건들이 민수기 13장 이하 16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있고, 그 절망은 그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죽음의 엄청난 힘에 눌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가나안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가나안 땅을 한 번 밟아보고 죽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힘들어도 참았고, 그런 소망과 비전은 그들에게 더 강한 생명력을 주기에 충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가나안 입성을 40년이나 늦춘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것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아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 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바라볼 것이 없어졌습니다. 갑자기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지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근본적인 이유는 광야 생활 40년을 선언하시고, 20세 이상 된 자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언은 실제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큰 절망을 가져오게 했고, 더 이상 삶과 생명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면서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이 때부터 알 수 없는 일들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 죽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러가지 질병과 재난으로 죽는 사람들도 꾸준히 생겨났습니다.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의 남자들 605,330명이 나왔습니다. 물론 여자들도 죽었겠지만, 이들 수만 본다고 해도 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60만명이 40년 동안 죽는다면 1년에 15,0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약 40명이 죽었습니다. 한 달에 1,200명이 죽었습니다. 거기에 여자들의 수를 합하면 단순하게 계산해도 두 배의 수가 됩니다.
그들은 매일 죽음을 보고 경험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의 이유가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의 죽음을 볼 때마다 결국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소망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매일 해야할 일은 단지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뿐이었습니다. 죽음을 보면서 절망하지만, 사실은 절망하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더 컸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딜레마를 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모양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사사기를 보면 알지만, 출애굽 1세는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광야세대들만 모여서 가나안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이방인들로부터 영향을 지나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자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런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신뢰하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흔적도 없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동화되어 버리고 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프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오도록 기다리셨습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광야 죽음의 영향이 너무도 컸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죽음과 절망, 패배감의 기운이 깊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매일 시체를 보고 처리해야 하는 그들의 일상은 모든 사람이 어차피 다 죽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선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에 죽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눈으로 보고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더 큰 절망으로 빠지게 했습니다.
죽음을 자주 접하다 보면 죽은 자를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사람이 죽으면 가장 먼저 보는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목사입니다. 장례를 집례할 때마다 매번 죽은 이와 죽은 이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다 보면 그런 죽음이 담담하게 와 닿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집니다.
여기에 두 가지 현상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를 만지거나 대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아마도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자를 대하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었고,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그렇게 멀게 느끼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당시 광야에서 매우 위험한 일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생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죽은 자로부터 오는 질병의 문제는 매우 심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여성들의 출산 후 오는 산욕열이 처음 시작한 것은 죽은 자를 다루던 의사가 바로 출산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패를 위한 특별한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던 고대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수 없이 나오는 시신을 처리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죽은 자에 대한 익숙함이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또 다시 위협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현상은 죽은 자를 장례지낼 때마다 느끼는 죽음에 대한 절망입니다. 목사가 되어 장례를 자주 집례할 때조차도 장례를 지낼 때 느끼는 아주 깊은 절망, 허망함을 경험합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바로 죽자 마자 입니다. 심방이나 다른 일로 바쁘다가도 성도의 죽음의 소식은 목회자에게 제일 일순위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중단하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먼저 간단히 말씀을 보고 위로합니다. 그런 후 장례에 대한 진행을 의논하고 필요한 도움을 줍니다. 때때로 집에서 돌아가셨을 때는 병원과 경찰에 알리고, 또 간단한 염도 합니다. 이 때 우선 죽음에 대한 허무함을 경험합니다.
두 번째 느끼는 절망은 입관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요즘은 한국 같은 경우는 병원에서 워낙 잘 하기 때문에 아주 깨끗하게 하고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게 합니다. 유족들이 보는 가운데 수의를 입히는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매우 전문적인 사람들이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로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얼굴에 간단한 화장까지 하고, 머리에 빗질을 한 후 유족들로 하여금 한 마디씩 하게 합니다. 그렇게 모든 유족들이 한 마디씩 하고 나면 병원의 수의를 입히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수의로 얼굴을 가립니다. 얼굴을 감쌀 때 그 짧은 순간 죽음이 무엇인지를 느낍니다. 수의로 가려진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 ‘이것이 죽음이구나’라고 느끼게 합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마음에 찾아옵니다.
세 번째가 발인예배와 하관예배 때입니다. 하관예배 때 고인의 시신이 땅 밑 깊은 곳까지 내려 안치하고 흙을 뿌리고 덮을 때 더 이상 다시 보지 못하겠구나 라고 생각할 때 꼭 유족이 아니더라도 죽음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절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죽은 자의 부패로 인해 오는 육체적 질병 혹은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고, 또 하나는 죽은 자를 장사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찾아오는 영혼의 절망감입니다. 이런 절망을 매일 경험해야 한 것입니다. 이런 절망감은 이전에 가나안 정탐의 실패나 고라 일당의 배반으로 통해 왔던 이스라엘 민족의 혼란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더 이상 무슨 반역을 할 힘도 없었겠지만, 이젠 무엇을 하자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 드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도 광야 세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집니다. 이 땅에는 지금도 여전히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그런 반신앙적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광야에 40년을 머물면서 어떤 길도 제시하지 못하는 모세와 아론을 향해 그대로 있을 수 없는 백성들의 답답한 모습이 반역으로 나왔던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날마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존의 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죽은 자를 장사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절망, 결국 나도 이렇게 죽을 것이고, 더 이상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는 절망감이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듯이, 그렇게 오늘날도 세상은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 깊은 절망과 탄식을 갖게 합니다. 몰려오는 절망감을 피해갈 방법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인가요? 사람들의 절망을 봅니다.
주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들게 합니다. 암송아지를 잡아서 불에 태우는데, 그것은 온전한 것으로 흠이 없어야 하고, 붉은 것이어야 하고, 또 한 번도 멍에를 매어보지 않은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암송아지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세심하게 골라서 택해서, 그것을 성문 밖으로 가지고 가서,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함께 암송아지와 함께 살라서 그 재를 잘 거둡니다. 그리고 그 재를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습니다. 그런 후 죽은 자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제 삼일과 제 칠일에 그들의 몸에 우슬초로 그 물을 찍어서 그 몸에 뿌리게 했습니다.
시체를 만졌을 때마다 그들은 이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시체를 만지고도 이 예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정결입니다. 당시 그들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광야는 물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기 몸을 씻으라고 하면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하고 자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런 일은 곧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큰 재앙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을 부어주는 것도 아니고 우슬초로 찍어서 뿌려준다고 하니 그것으로 얼마나 그들의 몸을 씻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광야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살리는 가장 최선의 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늘 의식하게 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예식은 그들을 육체적으로 정결하게 지켜줬음에 틀림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영적인 문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들은 죽음의 사건을 볼 때마다 흔히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 이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조상들이 죽었던 것과 같은 죄로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준행합니다. 우슬초로 이 물을 찍어서 자기 몸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식이었습니다. 속죄제라고 본문은 표현합니다. 이것이 예식이라는 말은 단지 육체적인 정결함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사건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 예식을 행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정결하게 하셨다는 하나의 선언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선언을 역설적으로 본문에서는 이 예식을 하지 않는 자가 끊쳐질 것이라고, 죽게 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예식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자기 죄로 인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선언을 소망하는 다윗의 심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시고 하나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와 영혼을 갉아먹는 죽음의 세력을 이 속죄제를 통해 회복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오늘 주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생명력을 불어넣으십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을 경험할 때마다 그들은 제사장이 만들어 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뿌려서 자신의 정결함을,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해졌음을 계속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광야를 통과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 날 시체로부터 오는 부패된 병균이 아니더라도 이미 마음의 질병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인 절망의 포로가 되어 결국 죽어버리고 말 것이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광야입니다. 얼마나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일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게 합니다. 실패가 무엇인지 보게 하고, 낙심과 패배감에 휩싸이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늘 주님께로 돌아와서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뿌려서 정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함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은 나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오늘날 큐티를 의미합니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날마다 정결함을 얻어야 합니다. 그저 몇 방울 떨어지는 물 같지만, 사망의 그늘이 우리를 덮을 때마다 지속적으로, 한 번도 빼놓지 말고, 하루도 거르지 말고 말씀의 생명수로 우리를 정결케 하는 것이 곧 승리의 길입니다. 거룩함을 다시 강조하시는 오늘의 말씀을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오늘 우리 모두를 정결케 하십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세상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본래 광야입니다. 개스 값도 올라가서 삶의 위기가 찾아오고 주변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나를 덮어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때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정결을 위한 잿물 제조방법
민 19:1-10
오늘 본문은 9절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들기 위한 재료인 재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완전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죄와 부정에 쉽게 노출되고 오염됩니다. 때문에 그들이 유지해야할 정결이 계속해서 훼손되고 깨뜨려집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건강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정해지거나 잠깐동안 죄로 넘어지더라도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부정을 씻는 수단을 열어 두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정결을 위한 잿물이었습니다. 이처럼 부정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더러운 것이 묻어 있거나 시간을 두고 여유있게 처리해야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정의 최종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부정을 씻는 물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이 물에 들어갈 재를 만드는 과정은 기독교에 대한 배경이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다소 주술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재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그 자체에 어떤 화학적 혹은 주술적 효능이 있다기 보다, 만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요한 교훈을 반복해서 각인시키게 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주로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지만 특이하게도 본절에서는 모세와 아론, 두 사람에게 말씀 하십니다. 재를 만드는 사람은 아론이나 모세가 아니라 아론의 가문에 속한 제사장 엘르아살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듣고 엘르아살에게 가르쳐 주라는 뜻입니다. 그 재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인 붉은 암송아지가 등장합니다. 강렬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암송아지는 사람으로 치자면 청소년 정도로 성장한 것으로, 온전하여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점이나 티가 없다는 뜻이고 더나아가 장애도 없고 상처도 없다는 뜻입니다. 쇠나 나무로 된 멍에는 짐슴의 목에 상처를 줄 수 있기에 그런 흠이 아예 생기지 않도록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송아지로 골라야 했습니다. 또한 이 멍에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속박을 당하거나 노예의 상태를 상징할 때 자주 쓰였습니다. 멍에를 메지 않았다는 것은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순결하고 무죄한 상태임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부정한 자들의 죄도 대신 짊어 질 자격이 있다는 이면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3-4)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3절의 ‘너’는 원문에서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어 모세와 아론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암송아지를 재를 만드는 총책임자인 엘르아살에게 주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제물을 진영 내 성소에서 잡는 것과 달리 이 암송아지는 진영 밖에서 잡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진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공간인 성막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죄나 부정함이 침투되거나 오염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정하다고 판단되는 물건이나 사람은 모두 진영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붉은 암송아지 역시 죽음으로 부정케 된 자들의 속죄를 위한 짐승이므로 그들의 부정을 짊어지고 진영 밖에서 잡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부정과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케 합니다.
(5-6)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제물로 사용된 암소는 전부 태워져야 했습니다.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 등 구체적인 부위를 모두 지칭한 것은 이 제물의 전체가 완전히 태워져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 인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함께 태워야 했습니다. 백향목은 당시 레바논의 특산품으로 내구성이 좋아 건축물의 들보나 기둥의 고급 건자재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왕궁이나 성전을 지을 때 사용되었고 그렇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백향목은 힘과 장수, 그리고 생명의 영원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귀한 대접을 받던 백향목과는 달리 우슬초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식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우슬초는 구약에서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당시, 장자의 죽음을 피하고자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좌우설주에 바를 때 이 우슬초가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14장에서는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었을 때에도 우슬초가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51편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도 우슬초로 정결케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우슬초는 죄와 부정을 정결케 하는 도구로 상징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홍색실에서 이 홍색은 중동 지방에서 서식하던 붉은 벌레(아마도 연지 벌레로 추정됩니다)에서 뽑아낸 염료를 말합니다. 앞서 붉은 암송아지의 설명과 더불어 주홍색은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데 그 색을 귀하게 여겨 고급 옷이나 제사장들의 의복을 염색하는데 사용되어졌습니다. 이러한 상징들을 가진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은 속죄제를 사르는 불 가운데 함께 태움으로써 정결케 하는 잿물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7-8)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송아지를 불사른 자도 자기의 옷을 물로 빨고 물로 그 몸을 씻을 것이라 그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 모든 작업의 책임자인 엘르아살은 암송아지를 잡은 날을 기준으로 그날 하루가 끝나기까지 부정하다고 합니다. 이는 속죄 제물에 전가된 죄와 죽음에 의해 이를 집행한 사람도 오염되어 부정하게 된 것임을 뜻합니다. 때문에 암송아지를 잡을 때 입었던 옷도 빨고 몸도 씻으면서 다시 진영으로 들어갈 기한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9-10)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 자도 자기의 옷을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그중에 거류하는 외인에게 영원한 율례니라
암송아지와 백향목과 우슬초, 그리고 홍색실은 불태워져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집행했던 사람은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재를 수거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재를 만드는 데 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부정도 없는 새로운 사람이 그 재를 정해진 특별한 장소로 옮겨야 했습니다. 이 재는 정결케 하는 물의 재료가 되어, 이스라엘 중에 부정이 발생 할 때 사용되어 졌습니다. 예를 들어 사체를 만지거나 분비물이나 하혈과 같은 유출병이 발생하거나 그외 하나님이 정하신 부정의 사례들이 발생할 때 그 부정을 깨끗하게 하는 의식에서 이 물이 사용 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재를 수거한 사람도 부정해진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부정해진 사람을 정결케 하기 위한 잿물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재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부정해진다는 말입니다. 다소 납득이 가지 않던 이 율례는 신약시대로 넘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선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정결한 자로 세우시기 위해 우리의 모든 죄와 부정을 대신 짊어지시되 주님의 거룩안으로 우리를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사용되었던 정결케 하는 잿물은 만드는 사람이나, 들어가는 재료로 보나 여러모로 불완전하고 유효한 기한도 짧기 그지 없었으나, 이 땅에 내려오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영단번의 제물로 우리의 죄와 부정을 영원히 씻어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저와 우리 교우님들은 세상의 것으로 부요해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 외에는 인생의 답이 없음을 인정하며 주님만 붙잡을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시간 눈을 들어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주님의 거룩안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그 나라가 주시는 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든 교우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 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불완전하고 한계 투성이인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성도의 신분을 살아감에도 죄에 넘어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어리석을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을 배신했던 유다의 길로 가기보다 베드로처럼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생명의 물이신 주님 앞에, 즉각 회개하며 나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를 위해 제물이 되신 주님처럼 이제 우리 이웃들에게도 사랑으로 헌신 할 줄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의 인생도 주님의 손을 의지하오니 복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구약의 제사장들은 정결용 잿물을 만들 때마다 부정과 정결에 대한 교훈을 반복적으로 되뇌였습니다. 내 삶 속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게 만드는 경건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사시 부정이 발생했을 때 보관된 정결용 잿물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회개의 기회가 열려있었는데도 미룬 적이 있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3. 제사장들은 다른 사람의 정결을 위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가족과 주변 이웃들에게 헌신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까?
4.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하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부정해진 자의 정결례
민 19:1-10 / 구성교회
성경에 쓰인 단어는 고대 사회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하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복’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무엇을 얻음으로써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완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의(義)”라는 단어도 윤리,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형성을 통해 말씀을 삶에서 실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거룩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고대 수메르에서는 ‘거룩’이 “신성한 영역에 속한 것”이라고 정의 내립니다. 아카드어에서는 추문(醜聞)이 많은 신들도 거룩하다고 표현하고 있기에 신성(神性)의 영역이라고 표현합니다. 우가리트에서는 “신에게 속하는 자격”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거룩’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므로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면(레 19:2),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온전하여 흠이 없고 멍에 메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끌어오라고 명령합니다. ‘온전하다’라는 말은 다치지 않고 탈이 없어 건강한 상태를 말하고, ‘흠’은 얼룩이나 반점, 살이나 가죽에 상처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신체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멍에’는 소가 일하기 위해 짊어지는 도구로서 멍에를 메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세속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붉은 암소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피의 색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악이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이 붉은 암소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하나님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붉은 암소를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엘르아살이 보는 앞에서 죽여 그 피를 손가락에 묻혀 회막 앞을 향해 일곱 번 뿌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론이 아니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이 일을 진행하는 이유는 아론의 나이가 많아 더는 제사장 직무 수행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피를 찍어 회막을 향해 일곱 번 뿌리고 송아지의 고기와 피와 똥까지 모두 불살라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속죄제를 드릴 경우, 제물의 피를 향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아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했고, 동물의 특정 부위는 번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 고기는 진영 바깥에서 불살랐습니다(레 4:1~21). 그러나 민수기 19장에 나오는 제사는 레위기에 나오는 속죄제(4장)와 다릅니다.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와 양식과 의식에서도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유사한 면도 많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성경에서 민수기 19장에만 언급되기에 매우 특별한 제사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론이 아니라 엘르아살이 제의를 진행하기에 출애굽 1세대가 마무리되고 2세대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물을 진영 밖으로 가져간 것은 레위기 16장의 “아사셀 염소”와 오늘 본문의 “붉은 암송아지” 뿐입니다.
암송아지를 태울 때 백향목과 우슬초, 홍색 실을 더해 함께 태워 재를 만듭니다. 구약성경에서 백향목은 힘과 위엄, 우슬초는 정결, 홍색 실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즉, 송아지를 태운 재에 이 재료들을 함께 넣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많은 범죄를 한 번에 정결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는 듯합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태운 재를 물과 함께 섞어 진영 밖에 두었다가 부정을 씻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 정화수는 일종의 속제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많아 그들의 죄를 한 번에 대속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진영 밖에서 이루어졌기에 이 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물로 씻고 저녁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날마다 부정과 죄악의 그늘 속에 사는 우리가 정결과 거룩의 자리에 서기 위해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떠올리며 주님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거룩’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은혜 안에서 늘 정결과 거룩의 은혜를 누리는 하나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