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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결국, 선생이 갔다. 떠났다. 난 아직 눈물을 채 그치지 않았는데, 나를 달래지 않고 가 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눈물을 말렸다. 얼굴이 시리다. 무엇보다 추웠고 믿기지 않았다. 나를 내버려두고, 선생이 떠났다. 여자에게. 슬픔과 분노, 혼란, 절망……. 갖가지 감정이 나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해 펑 터져버릴 것 같던, 스스로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던 그 때.
“그래서. ……네 선택은 결국 저 남자?”
등골이 다 시릴 만큼 스산한 목소리. 느릿한 걸음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온 몸을 짓누르는 냉기와 충격에 눈물도, 입도 얼어붙어 버렸다.
“학원은 안 다닐 테니까 학교 선생인가? 대단해. 너를 이렇게 울게 만들 정도라니……. 물어보지 않아도 알겠어. 아주 많이 좋아하나봐? 무슨 과목일까? 국어? 아냐. 배려 없는 대화능력……. 국어라기엔 무리다. 역시 수학?”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내 등 뒤에서 좌우로 움직였다. 느리고도 여유로운 발걸음. 왼쪽, 오른쪽. 몸이 굳어버려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약간 거친 듯한 목소리가 모든 것을 얼린다. 내 몸, 내 눈물. 믿을 수 없게도 공포였다. 어둠처럼 내 깊은 곳을 건드리는 공포.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아니,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었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그냥 널 내버려 둘까 했지. 여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기회잖아. 그렇지? 나 따위에게는 관심도 없는 너니까. 그래. 나 따위.”
점점 사내의 걸음이 빨라졌다. 왔다갔다. 불안정한 걸음걸이가 어느 순간 작정한 듯 나를 빙 돌아 앞으로 다가왔다. 옥상 바닥 시멘트에 고정된 내 고개를 사내가 부드러이 잡아끈다. 차갑고 창백한 사내의 기다란 손가락이 뱀처럼 입으로 흘러든다.
“아. 아…….”
“몰랐지? 언제나 네 옆에 있었는데. 나를 봐 주길 기다리면서. 조용히 네 옆에 있었는데.”
“아, 아아…….”
“네가 대기실에 있을 때도, 네가 1위를 할 때도, 네가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도 심지어는 네가…….”
남자가 우습다는 듯, 킥- 소리를 내 뱉으며 웃었다.
“휘겸이라는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할 때조차.”
남자가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지며 곡선을 만들어낸다. 옆에 있었는데, 옆에, 옆에……. 남자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쿨럭, 기침이 터져 나온다. 손가락이 거칠다.
“언제나 내 기타를 만지느라 손이 바빴는데…….”
“아, 아아, 아…….”
“언젠가부터 너를 쫓느라 바빠졌어. 내 눈이, 내 코가, 내 입이, 내 손이.”
히죽- 웃는 사내는, 언제나 조용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듯 보였던 논슬립의 기타리스트였다.
“그 예쁜 목소리로, 내 이름은 단 한 번밖에 불러주지 않았어. 내가 외우게 만들어 줬는데도 말이야. 자, 이제 우리 둘 뿐이야. 마음껏 불러 봐.”
유민성.
-Common people, Special love-
“넌 정신이 있어, 없어! 대체 어디를 갔다…….”
“…….”
“……너. 팔! 팔 왜 이래?”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나는 이런저런 변명 대신 똑바로 허리를 굽혀 사죄했다. 내 리허설 차례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생방송이 코앞까지 다가와 버린 시간이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굴 것은 없다. 잠꼬대를 하다 조금 다친 것뿐이다.
“왜 이러냐고 묻잖아!”
“……그냥. 다쳤어요.”
“그러니까 어디서!”
“화장실에서 졸다가요.”
아마 조금 징그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피를 다 씻어내었는데도 상처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마 꿰매야 할 것 같은 상처다. 무서운 꿈이었다. 그나저나 꿈을 꾸면서도 몸을 거칠게 움직이다니. 몽유병인가. 이제는 내 몸을 꽁꽁 묶어두고 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실없이 웃었다. 매니저 오빠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장실에서 졸다가, 이렇게 크게 다쳤다고?”
“네.”
“……가자.”
“……어디를요?”
“어디기는! 병원에 가야지!”
“……괜찮아요.”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속살이 다 보이잖아……!”
화를 내는 매니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을 두고 그랬을 리 없다. 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죽으려 하다니. 말도 안 돼. 정말…… 하하. 웃긴 꿈이었다.
“하하. 괜찮다니까요? 그건 그렇고 오빠.”
내 웃음에 매니저가 기겁을 한다. 이렇게 아픈데 웃음이 나와, 딱 그렇게 소리치고 싶어 하는 모양새다.
“오빠. 제가 지금 죽는 게 말이 돼요?”
“……뭐? 네가 왜 죽어?”
“그렇죠. 말이 안 되죠. 그럼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몇 년을 공들여 진심을 바친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거는요?”
“……뭐라고?”
“아, 참. 그냥 대답해 보세요.”
“……뭐. ……너보다 잘 생긴 남자냐?”
“아니요. 엄청 못생겼을 걸요.”
“그럼 뭐. ……너 싫다고 하겠냐. 설마.”
“그렇죠. 설마요. 말이 안 되는데……. 그게 다 거짓말인데…….”
“……도화리!”
왜 눈물이 나냐.
“……너 빨리 말해. 무슨 일 있었지. 너 바른대로 말해. 아까 코디가 화장실 갔었어. 너 찾으러. 너 거기 없었다며. 어디 갔었어. 제대로 말해.”
“…….”
“말해. 너 누가 때린 거야? 누가 너…….”
“생방송……. 잘 할게요.”
꿈이었다고……. 꿈이라고…… 그냥 그렇게…… 하자. 그냥…… 그렇게.
-Common people, Special love-
“……할 말이 뭐야.”
나 있잖아. 오늘은 너한테 져 주지 않으려고. 또다시 몹쓸 꿈을 꾸게 될 까봐 잠들지 않았던 오늘 새벽 내내, 마음을 먹고 또 먹었어. 맞아. 꿈속의 선생이 옳아. 비록 찢어지게 아프게 되더라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 그게 옳은 것이야.
“대답 들으려고…… 왔어.”
기대에 찬 휘겸이의 눈을 프렌치아에서 다시금 마주한다. 정확히는 그냥 보통의 자리가 아니라 직원들의 티타임용으로 쓰는 격리되고 가려진 공간이다. 사장님이 특별히 허락해 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제법 많아졌다.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했어. 저번에 네가 왔던 수능 전 날, 그 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해서 너한테 제대로 답을 주지 못했는데…….”
“…….”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나와 휘겸이를 무거운 침묵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휘겸아. 너도 그렇게 해. 너도 나처럼 그렇게 해. 그냥 한 번 소리 지르고, 목이 쉴 때까지 울고, 그친 다음에는 꿈이었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그러면…… 살아져. 많이 아파도, 어긋난 느낌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나는 살아져. 살면, 살아져.
“……그 사람도 너 사랑해?”
“…….”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게 와.”
“……그런다고 변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어.”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아?”
“원해. 그 사람한테 사랑받고 싶어. 그 사람한테. ……네가 아니야.”
휘겸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단번에 그보다 더할 수는 없을 만큼 구겨져 버렸다. 아마 그렇게 외쳐대고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 프렌치아에서 선생과 여자를 조우했을 때처럼. 아니. 이건 말도 안 돼. 도화리, 네가 날 이렇게 버릴 리 없어. 너만 기다려온 내가 이렇게 쉽게 버려질 리 없어……. 하지만 휘겸아. 사랑이란 게 다 그래.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지? 절대 그러면 안 될 것 같지? 우리 둘이 사랑하고 행복해 하는 것이 네가 생각하기에는 더 없이 분명하고 진실한 해답인 것만 같지? 아니. 그렇지 않아. 그런데, 그렇지 않아. 그럴 것 같은데, 나도 그거 아는데, 그렇지 않더라.
“……그럴 수 없어.”
“…….”
“도화리. 그 남자를 사랑한다고……? 잠깐, 흔들린 거야. 너 내게 올 거야. 난 네가 날 기억하는 그 어렸을 때부터, 네 인생의 기억이 최초로 시작된 그 사고부터 마음에 너밖에 담지 않았던 사람이야. 언제나 하루도 빠짐없이 너만 생각한 사람이야.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야. 자그마치 17년이야. 그 동안 너는 내가 가진 가장 큰 감정이었어. 어렸을 때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었고, 자라갈 수록 사랑이었어. 헤어진 다음에는 버팀목이었고, 다시 만난 지금은 내가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야.”
“…….”
“……나라고. 공휘겸.”
“알아. 하지만…….”
“너 그거 안다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거절할 수 없어. 너 그 선생 사랑한 거 고작 길어야 5년이야. 그건 쉽게 변할 수도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만 선생에게 외쳐 대었던 것들을 휘겸이는 고스란히 내게 쏟아 내놓고 있다. 이렇게 무겁고 부담되는 것이었나. 받을 수 없는 마음은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나. 몰랐다. 너무나 간절한 마음에 알아주지 않음을 서운히 여겨 토로하는 데만 급급했지, 그걸 받는 선생의 입장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꿈이나 꾸는 거지. 벌 받은 거라고, 너.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너처럼.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 앞에 두고, 다른 여자와 함께인 그 사람 앞에 두고 너처럼 생각했어. 그럴 리 없다고. 그럴 수 없다고.”
“…….”
“하지만 휘겸아. 가능했어. 그 사람 나, 조금도 여자로 보아주지 않았어. 그것처럼 나도 너를…….”
“그 남자랑 넌 달라.”
“그 남자랑 나는 다를지 몰라. 하지만 너랑 난 다르지 않아.”
“…….”
“너도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나도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 똑같아. 생각하는 것도, 마음도 똑같아. 네가 날 놓을 수 없듯, 나도 그 사람 놓을 수 없다는 뜻이야.”
“…….”
아이의 손이 점차 떨려왔다. 한동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탁자를 내려다보다가, 그 떨리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집어 든다. 컵 받침 바로 위에 있는 컵에 진동이 전해져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그냥 내려 놔.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내려 놔.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카페를 찾아가, 다른 예쁜 여자를 앞에 두고, 다른 차를 주문하는 거야. 휘겸아. 그게 힘든 일이란 거 알아. 왜냐하면 나 역시 힘들어서 하지 못하는 일이거든. 그 남자를 떠나서 다른 남자를 찾는 거. 하지만 그래도 그래달라고 이기적이게 너한테 말하는 이유는…….
“그리고 난 처음으로 사랑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뭐?”
이미 나는 멈출 수가 없어.
“그 사람이 날 바꾸어 놓았어. 나는 분명히 사랑 받기를 원했지만, 이제는 꼭 받지 않아도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어져 버렸어. 내가 줄 수 있다는 것에, 나 같은…… 나 같은 거지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에 현혹되어 버렸어. 이제 나는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렸어.”
“……배부른 소리야.”
“그래. 그럴 지도 몰라. 하지만 휘겸아. 어쨌든 너는 아니잖아. 너는 내게 받아내야, 굳이 받아내야 하잖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잖아. 이전의 내가 그랬으니까 나도 그게 뭔지 알아. 하지만…… 그건 아무런 진척도 가져오지 못해.”
“……그러니까. 나더러 놓으라.”
“……미안해.”
선생이 내게 했던 미안하다는 사과가 겹쳐 들리고 나는 휘겸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굳어진 표정에서 휘겸이가 느끼는 혼란을 알 수 있다. 단 한 번도 장난기가 전부 가신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었던 휘겸이가 저렇듯 표정을 굳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이기적이게도 얼른 그 표정을 풀어주기를, 웃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해도 괜찮아. 그 사람 곁에 머물며 사랑을 줄 수 있으면 돼. 하지만…… 그래도 미움 같은 건 두 번 다시는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웃어 줘.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휘겸이가 기어코 그 떨리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입가로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뜨겁게 타오르는 눈동자를 무연히 바라보다가 할 말을 잃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휘겸이가 기어코 그 쓴 차를 목구멍 너머로 삼킨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멈추지 않고 원 샷.
“안 되겠는데.”
“……휘겸아.”
“그렇게는, 난 못하겠는데.”
휘겸이의 그 말이 사형 선고라도 되는 것처럼 무겁게 들려왔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 챈 것일까. 휘겸이가 이제 조금은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내게 말을 내뱉는다. 화. 언제부터 내가 너에게 화가 되었지. 언제부터 선생이 나에게 슬픔이 되었지. 그 화는 언젠가는…… 슬픔이 될 거야. 나는 알 수 없는 생존 본능에 사로 잡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되풀이 해 외쳐대는 휘겸이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 때는 나도 그랬어. 짐승마냥 반드시 주는 만큼 받아야 한다고 으르렁거렸어. 그래, 나도 그랬어. 하지만 그건 결국 그 사람 아프게만 했을 뿐이야. 그 사람에게 나를 불쌍한 사람으로 각인은 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사랑은 받을 수 없어. 사랑은 보다 온전하게 그를 사랑해주는 여자에게로 흘러가 버려. 나는 그렇게 맥없이 사랑을 놓쳐.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그 남자가 너랑은 다르듯, 나도 너랑은 다른가 보지.”
“…….”
“아니. 나는 못해. 못 놔. 처음부터 내 거였다고 생각했어. 세상에 단 하나 내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너라고 생각했어.”
“…….”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고민했어. 어디서 뭘 할까, 길을 잃고 어두운 데로 빠져 버렸으면 어쩌나하는 고민은 하루에 스물네 번도 넘게 했어. 죽어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고아원 다시 찾아가서 너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물었어. 이제야 내가 잘 되었다고 전과는 다르게 날 대하는 원장 보면서 속 뒤틀려도 기어코 참았어. 너 인터넷에 연습 동영상 퍼지기 전에는 과거에 클럽에서 일했었다는 얘기 겨우 알아내서 찾아가기도 했어. 클럽이란 클럽은 다 가 본 것 같은데 거기도 넌 없었어. 정말로 잘못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숨도 못 쉬고 살았어. 하루 스물네 시간이 다 걱정이었어.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매일을 자책에 보냈어. 성적이 떨어지고 부모라는 사람들한테 온갖 협박당하고 회유 견디면서도 너 놓을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았어. 어느 날 인터넷에 연습 동영상 올라 왔을 때는 한 달음에 회사 앞으로 와서 하루 종일 너 나오길 기다린 적도 있어. 멀리서만 보다가 돌아간 적이 수십, 수백 번이야. 네가 알바 시작하기 몇 시간 전부터 와서 주문 다 해 놓고 너만 뚫어지게 보다가 자정까지 카페에 있었던 적도 많아.”
“…….”
“그게 다 네 눈이 다시 나를 향하는 그 순간을 위한 것들이었어. 그 한 순간을 위해 견뎌낸 모든 시간이자 고통들이었어. 그걸 네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어.”
이제 떨고 있는 것은 나였다. 달그락. 달그락……. 아. 소리가 거슬린다. 왜 하필 유리 찻잔과 유리 컵 받침이지. 왜. 나는…… 휘겸이 옆에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선생의 생각을 떨칠 수 없고, 밤에 잠을 잘 때마저도 꿈을 꾸는데 어떻게 놓으란 말인가. 그럼 휘겸이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저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사랑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둘 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휘겸이 자신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는 바라지 않았다.
“…….”
“……."
나는 휘겸이가 저런 밝은 성격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잘 안다. 원래 소극적인 아이라 고아원에서도 겉돌았는데, 나를 구해준 다음 친하게 지내다가 나는 휘겸이가 의외로 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외적인 요소들 때문에 우울하게 가라앉아 버린 그 애의 마음은 어린 내게도 상처였었다. 같이 놀고, 같이 웃고 그러면서 휘겸이는 조금씩 밝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나는 그게 보기 좋았고 휘겸이가 웃으면 나도 행복했으므로, 언제나 휘겸이가 웃기를 바랐다. 지금 이런 상황은 결코 원한 적이 없다. 사랑받는 걸 분명 원했지만 이렇듯 본인이 먼저 망가지는 사랑은 아니었다. 휘겸이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 내 옆에서는 행복할 수 없다. 그 마음 돌리거나, 변해야 한다.
“그래도…….”
“…….”
“나는 안 돼. 그래도 나는 내 마음 어쩔 수 없어.”
네가 그동안 아무리 나를 원해 왔어도 나는 그렇게는 못 해. 네게 아무리 미안해도 나는 그렇게는…… 못 해. 달그락 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나는 식어버린 차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별로 많지 않던 양이라 결국 바닥이 났다.
“그럼…… 난 너 피할래.”
“도화리.”
겁이 나. 난 그렇게 아파하는 너 볼 자신이 없어. 선생은 그런 상처 온전히 견디고 견디며 나를 곁에 두었지만 나는 그렇게 못 해. 휘겸아, 나는 선생님처럼 인자하지 않고 속도 넓지 못해. 그래서 그렇게는 못 하겠어.
“갈래.”
“가지 마.”
“놔.”
찬우 보다 얼마나 길까. 너는,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괜찮아 질 수 있을까. 상처에 비례한다면 찬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걸릴지 모른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별다른 수가 없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손목을 비틀어 휘겸이의 손을 떨쳐 내었다. 있는 힘껏 잡았다면 절대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휘겸이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무모하게도 희망을 걸어 보고 싶었다.
“당분간은 나 찾지 마. 나도 너 안 찾을 거야. 네가 날 찾아도…… 안 만날 거야.”
아는 얼굴들 앞에 애써 웃으며 인사를 한 후, 나는 프렌치아를 떠났다. 휘겸이가 쫓아올 까봐 걸음이 조금 많이 빨라져 있었다. 이미 이현 언니와 약속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또 혼나겠네. 애써 밝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며 숙소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내 손목을 거칠게 뒤에서 잡아끌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벽과 벽 사이. 좁은 공간. 유민성과, 나. ……결국 왔네. 오지 말라고 빌었는데. 결국엔, 그래. 이런 거지. 결국엔.
“도화리. 말 잘 듣네. 무서웠어?”
조용히 속삭이듯 사내가 말을 건다. 나를 달래주려는 듯. 아니. 틀렸어. 내가 무서웠던 건 네가 아냐. 휘겸이를 버리라는 네 말을 들은 것도 아냐. 휘겸이는 어차피 정리해야 될 사람이었어. 그래서 한 것이지, 그건 네 새끼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 ……사내의 차가운 손가락이 지난 번 방송국 옥상 이래 두 번째로 입 안을 파고든다. 피식-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춘다. 멍청한 새끼.
“다시는 기타 못 치게 만들어 줘?”
조금 짠 맛이 나는 사내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몸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치아라고 했었나. 어떻게 해 줘. 잘라줘? 씹어줘? 약간 새는 발음을 똑바로 하려 노력하며 나는 무연한 시선을 사내에게 고정시켰다. 언제나 스산하고 가라앉아있던 눈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흥분해있다. 황당함, 분노 그리고 창피함. 치부를 들켜 혼란스러워하는 눈. 난, 익숙해.
“무서웠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게.”
“…….”
“너 같은 새끼, 참 오랜만에 만났거든. 지겹고, 또 시작인가 하는 생각에 무서웠어. 이곳에도, 저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떠돌았던 때, 클럽에서 나한테 말 거는 새끼들 중 5할이 너 같은 사이코였지. 머리에 든 게 여자의 얼굴과 여자의 몸뿐인 한심한 새끼들.”
벌써 5, 6년 전 일이다. 치근덕대는 사내들은 다 화라고 했던가. 그건 사실 화보다는 견딜 수 없는 혐오에 더 가까웠다. 사랑만 줬으면 고맙게 받았을 텐데. 꼭 덤으로 내게 개 줄을 씌우려고 하더란 말이야. 왈왈. 날 묶어두고 짖게 하려고. 그것에 쾌감을 느끼는,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들.
“지들이 날 가질 수 있을 줄 알아.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엄청 헐값에 넘어 올 여자 같나 봐. 자기 옆에만 있으래. 그럼 먹고, 자고…… 아무 걱정 없게 해 주겠데. 지랄.”
“…….”
“그래. 네 조건은 뭐야? 네 옆자리? 그럼? 그럼 넌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제일 높은 가격 불렀던 개새끼가 기억 나. 마누라랑 이혼할 테니까, 비밀리에 결혼을 하자고. 아기도 낳고, 알콩달콩 살자고. 알콩달콩……. 알콩, 달콩. 씨발. 말 할 때마다 토 나올 것 같은 기분이야. 손가락 떨지 마. 정말 토할 것 같으니까.”
“……!”
“난 열심히 노래 부르며 살고 싶었는데 언제나 그 새끼들이 날 우롱했어. 나 말이야.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때, 사실 마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도 더 부자였어. 클럽 매니저가 공연 표 팔아서 얻은 이득을 빼돌리고 나한텐 푼돈만 쥐어줘도, 난 부자였어. 행복했어. 가진 게 많은 기분이었고, 충족된 느낌이었어.”
“놔. 놔…….”
“그런데 너 같은 새끼들이 다 망쳐놨어. 언제나 날 거지 취급했지. 난 거지가 아니었는데, 다 네 새끼들이 그렇게 취급을 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날 그렇게 봤어. 내 인생 처음 시작이 잘못 된 건 내 팔자라고 쳐도, 그 다음을 망쳐 놓은 건 바로 너 같은 인간 말종 쓰레기 새끼들이야.”
굳어버린 사내 대신, 나는 직접 손을 들어 사내의 손목을 잡고, 그 차가운 손가락을 입 안에서 빼 내었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사내의 눈, 사내의 손, 사내의 모든 것. 마침내 사내의 다리가 풀리고, 사내가 주저앉는다. 나는 천천히 따라 앉아 사내와 시선을 맞춘다. 덜덜. 덜덜덜. 무서워? 무서워서 그래, 민성아? 나는 히죽- 웃는다. 뭐가 무서운데? 난 너보다 힘도 약하고, 키도 작은데. 뭐가 그렇게 겁이 나? 나 화나잖아. 응? 나 슬퍼서 울어도 미쳐버리지만, 화나도 미쳐버리는 거……. 그래. 네가 알 턱이 없지. 응. 맞아. 모르지. 모르니까 이렇게 설쳐대지. 꼭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 자기가 뭐라도 된다는 듯이.
“뭐라고? 휘겸이를 정리하지 않으면, 원조교제 혐의로 선생님을 사회에서 매장시키겠다고? 또 뭐? 네 옆에 있지 않아도 마찬가지라고?”
“……!”
“민성아. 내 눈을 봐봐.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냐. 도화리가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지? 그래서 꼭 장난 같지? 장난 같으면, 이게 재밌으면, 한 번 끝까지 가 볼래? 넌 처음이지만 난 경험 많아. 쭈글쭈글한 늙은이도 이겨봤고, 가정 있는 유부남도 이겨봤어. 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거나, 책임져야 할 여자와 아이들이 있다는 그런 시시한 이유로 져 주지는 않아. 살 날 얼마 없는데도 그 따위인 것들은 진작 죽었어야 할 인간이고, 그런 형편없는 인간이 가장으로 있는 가정은 진작 깨졌어야 할 가정이야.”
나는 사내의 턱을 움켜쥐고,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눈을 마주친다. 난, 네가 아니라도 이미 지쳤어. 그만 하라고 할 때, 그만 둬.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괴로워.
“오랜만이라고 했지? 5년 전쯤부터 그런 사이코들이 완전히 사라졌거든. 그래서 아예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었지. ……왜 사라졌게? 내가 양지로 나와서? 회사의 보호를 받아서? 아……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더 큰 이유가 있어. 네가 그걸 모르고 나한테 이러는 가 본데.”
“…….”
“죽여 버렸어. 내가.”
어리석은 사내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한 번 공포에 질린 사람은 늘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다.
“다시는 내 앞에 못 나타나게 다리를 자르고, 나를 못 보게 눈을 파내고,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못 놀리게 혀를 잘라 버리지. 너도 그 상태가 되어보면 알겠지만, 죽는 거랑 다름이 없어. 그리고 그건 칼이나 톱 든 오빠들한테 눈웃음치면서 해 달라고 하면 다 해 줘. 눈웃음이 모자라면 뽀뽀, 뽀뽀가 모자라면…… 뭐, 그 이상의 것.”
“놔, 놔…….”
“너랑 나, 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은 전부 비밀이야. 알았어? 네가 죽는 건지 깨달을 틈도 없이 죽기 싫으면, 입 다물라고.”
넌 아마 오래오래 잘 살 거야. 언제나 그렇지. 순간의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보여도, 결국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너 같은 사람들은 잘 살아가. 그리고 또 예쁘고 없어 보이는 여자를 발견하면 똑같이 굴지……. 결국 다치는 건, 결국에 더 많이 다쳐 있는 건, 억울해 미쳐버릴 지경이지만. 그래, 나야.
“거지.”
가진 거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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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관전 포인트는
화리가 휘겸이를 거절하는 방법과 민성이를 떼어내는 방법의 '차이'
라고 할 수 있겠네요.
화리는 자기 자신에게 그 사람이 얼마나 의미가 있냐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아이랍니다.
오늘 화리는 지칠대로 지쳤네요.
다음 흔/흔/특 19편 연재 예정 시간은,
2월 5일 금요일 저녁 7시 00분 - 7시 30분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
p.s. 저 오늘 졸업했어요 >.<
첫댓글 졸업축하드려요!!!! 그리고 화리... 쪼끔 무섭네요 ㅎㅎ;
감사해요~ ㅋㅋ 사랑을 하는 화리는 간절하고 화를 내는 화리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재밌어요~~
이번 편이 재미있게 보여질 수도 있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졸업축하드려요!!! ㅋㅋㅋㅋㅋㅋ
ㅠ.ㅠ 기쁘긴 한데 뭔가 좀 허전하기도 하네요 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우왘ㅋ저도내일졸업해요민성이가그런앤줄몰랐어요ㅠ
우왘ㅋ 축하드려요!!ㅋㅋ 민성이, 음. ㅠㅠ 사람은 겉만보고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ㅠ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민성이 자식 꼴 좋다
아 민성이 ㅋㅋㅋ 왜 전 준성이를 떠올리고 있었을까요... 한참 이해가 안 되서 생각하다보니 '민'성이 군요. 아 눈이 미쳐가나 봅니다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