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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벚꽃
비가 오네요.
창을 타고 주룩주룩 흐르는 빗줄기에 내 마음도 묻어 함께 흘러내려갑니다.
이 비가 그칠 때쯤이면 내 심장에 아프게 박혀있던 이별의 슬픔도 함께 멈추어 주기를 기원합니다.
헉헉헉.. 숨이 차올랐다. 민수가 어디까지 와있는 지 궁금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 녀석이 나를 앞질러 달려갈 것만 같았다. 결승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와... 오늘도 수영이 언니가 이겼다.”
“흐아 흐아 흐아..... ”
밑둥이 넓은 나무에 한 쪽 끝이 묶인 붉은 노끈의 줄이 평평해지도록, 다른 쪽 끝을 잡고 서 있던 민자는, 수영이 가슴으로 줄을 밀치며 힘차게 달려 들어오자 기뻐서 손벽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민수의 여동생인 민자는, 제 오빠가 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기 경주에서 매 번 민수를 이기는 수영에게 오늘도 아낌없는 환호를 보낸다. 수영도 가쁜 숨을 몰아시며 민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 오빠가 오늘도 우리 가방 다 들고 가는 거네. 와.. 신난다.”
그랬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기 전에 이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여 달리기 경주를 한다. 언제나 민수와 수영이 대결을 하고 민자는 심판을 본다. 경주의 패자는 승리한 사람의 가방을 집까지 들어다 줘야 한다.
“둘 다 가방 이리 줘.”
수영이 결승점에 들어서는 순간, 그 때부터 아예 터덜터덜 걷기 시작한 민수는 결승점에 도착하자 나무에 묶은 줄을 풀어서 여러 번 감아 칭칭 동여맨 후에 가방에 넣었다. 오늘도 잔뜩 신이 난 수영과 민자는 민수의 앞으로 가방을 쑥 들이밀었다. 자신의 가방을 등에 멘 민수는 민자의 가방을 받아 가슴 앞 쪽으로 매고 나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수영에게 건내 준 다음, 수영의 가방을 받아 한 쪽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는 수영이 땀을 닦은 손수건까지 받아 주머니에 잘 챙겨 넣고 두 사람이 출발하기를 기다린다.
달리기 경주의 조건은 평등하지 않았다. 민수가 질 때는 민자와 수영의 가방을 모두 들고 가야했지만, 수영이 질 때는 수영이 민수의 가방만 들어주면 된다. 그러나 수영은 한 번도 민수의 가방을 들어 준 적이 없다. 이 경주에서 민수는 늘 패자였다.
“언니 언니 저기 벚꽃 예쁘다.”
“응, 진짜 예쁘다. 활짝 피었네.”
“우리 저것 좀 따자.”
만개한 꽃나무가 아치를 만들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꽃 잎을 바닥에 흩뿌리는 벚꽃나무 길이었다. 민자가 민수를 바라보았다. 뒤따라 오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수는 말 없이 벚나무 아래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무를 올라갔다. 민자가 가리키는 꽃은 제법 높고 가는 줄기에 피어있었다. 나무의 굵은 몸통을 다 기어오른 민수는 가느다란 줄기를 향해 살금살금 기어가다가 쭉 손을 뻗으며 점프를 했다. 수영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어.. 어.. 민수야. 위험....”
“와아... 우리 오빠 멋있다.”
어느 새 사뿐히 바닥에 내려 선 민수의 손에는 활짝 탐스럽게 피어난 벚꽃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들려있었다. 이 어린 기사는 벚꽃보다 더 탐스러운 어린 두 숙녀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오빠 오빠.. 이거 우리 머리에 꽃아 줘.”
민수는 가장 탐스러운 꽃 두 송이를 골랐다. 먼저 한 송이를 따서 민자의 머리에 두른 머리띠 밑으로 꽃 줄기를 넣어 고정을 시켰다, 다음으로 수영에게 다가서 머리를 쳐다본 민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핀도 머리띠도 없는 짧은 커트 머리였다.
잠시 고민을 하던 민수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수영에게 줄 꽃을 벚나무 가지에서 따냈다. 그리고는 꽃의 줄기를 두 갈래로 나누고 나무 밑으로 다시 가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노끈을 꺼냈다. 노끈의 끝을 가르고 잘라서 줄을 얇게 뽑아낸 민수는 수영을 마주보고 서서 수영의 왼 손을 잡아 올려, 엄지와 검지로 수영의 약지를 눌렀다.
“손 이렇게 놓고 손가락 잘 벌리고 있어.”
“어..으..응..”
“언니 건 왜 반지야?”
“수영이는 머리에 꽂을 수가 없어서.”
왼 손등의 약지 위에 놓인 탐스런 벚꽃 송이가 수영의 손을 온통 뒤덮었다. 민수의 따뜻한 손길이 스칠 때 마다 그 안의 따뜻한 마음까지 전해져 와서 수영의 가슴 속에도 함께 꽃이 만발했다. 민수는 수영의 손을 뒤집고 길이가 짧은 꽃 줄기 양 끝에 노끈으로 만든 줄을 꿰어 손바닥 쪽에서 단단하게 묶어 반지를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민수는 수영의 손등을 위로 오게 하고 반지가 잘 보이도록 손바닥을 받쳐 살짝 올려주었다.
“와아.. 언니 반지 진짜 예쁘다.”
“와아... 민수야.. 고마워. 너무 예뻐.”
수영의 입에서도 민자처럼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넘치는 사랑을 느끼면 기쁨도 복받치는 지, 그러자 왠지 핑그르르 눈물이 고였다. 수영에게로 흐르는 민수의 따뜻한 미소와 마음만큼이나 아름다운 꽃 비가 그들의 머리 위로 내리고 있었다.
“오빠, 나도 다음에는 반지 해 줘.”
“응.”
민수에게서 벚꽃나무 가지를 받아든 민자는 깡충깡충 뛰듯이 걸었다. 어느새 민수와 수영은 그 뒤에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민수야. 민자야.”
“엄마”
이들이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한적한 길 가에 서 있던 민수의 엄마 혜린이 아이들을 먼저 발견했다. 민자는 엄마를 보자 반색하며 달려간다. 혜린이 판을 벌려 민자를 안았다. 혜린의 품에 정신없이 안겨버린 민자의 손 끝에서 잊혀진 꽃가지의 얇은 끝이 부서지고 꽃송이가 뭉개져버렸다.
“오늘 저녁은 짜장면 먹자. 수영이도 같이 가자.”
“와.. 엄마 최고.”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짜장면이었다. 민자는 더욱 신나서 어쩔 줄 모른다. 민수는 평소처럼 조용히 웃고 있는데, 수영은 평소와 다른 혜린의 모습이 신경 쓰인다. 어린 눈에 봐도 혜린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정하기도 이를 데 없었다. 민수는 그런 혜린을 영락없이 빼다 박았다. 그림 같은 외모에 단정하고 깔끔한 성격 거기다 따뜻한 마음까지 모두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혜린은 머리도 옷차림도 조금씩 흐트러져 있다. 늘 단정하게 올리던 머리는 길게 풀어놓았는데 빗질이 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저기 엉겨져 있고, 멋지게 달고 있던 팔찌며 귀걸이, 브로치 같은 악세사리도 전혀 없다. 평소의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화장은커녕 지금은 얼굴에 화장기조차 전혀 없다. 혜린의 모습을 볼수록 커져가는 불안감에 짜장면을 앞에 두고도 수영은 잘 삼켜 넘길 수가 없었다.
“와아.. 맛있다. 언니 우리 집에 가서 새로 산 인형 보여줄게.”
짜장면을 다 먹은 민자가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하는데도, 혜린은 미소만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영의 눈에는 혜린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왠지 모를 근심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활짝 열어놓은 중국 집 창 밖으로 물에 젖은 꽃잎이 축축 늘어지고 있었다. 어느 새 비가 오고 있었다.
“디리링 디리링”
중국집 카운터에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홍화반점입니다.”
[...........]
“누구요? 민혜린씨요? 지금 여기 그런 손님이 없는데...”
“사장님. 제 전화인가 보네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혜린이 달리듯 카운터로 가서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저예요.”
[.........................]
“네....”
[..........................]
“네... 알겠어요.”
통화를 끝내고 돌아선 혜린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다행히도 민수와 민자는 카운터를 등지고 앉아있었다. 수영과 눈이 마주친 혜린은 고개를 잠시 고개를 돌려 눈물을 추스르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수영아. 아줌마가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오늘은 안되겠다. 먼저 집에 갈래.”
“안돼 엄마, 나 언니한테 인형 보여줄거야.”
“민자야 미안. 오늘은 언니 먼저 보내주자. 응. 그건 다음에.”
“오빠가 다음에 더 예쁜 꽃을 따줄게.”
혜린에게 민자가 계속 때를 쓰자 민수까지 나서서야 겨우 민자를 달랠 수 있었다.
“아줌마. 짜장면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깍듯이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영은 왼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녀의 손바닥은 우산이 돼서 약지에 낀 반지를 가려주고 있었다. 민수는 수영이 떠나자 민자가 옆 테이블에 올려둔 망가진 벚꽃가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도 근심이 서려 있다. 평소라면 이렇게 비 오는 날 어린 여자아이를 우산도 없이 홀로 보낼 혜린이 아니었다.
“아이고 홀딱 젖었네. 왜 이렇게 늦었어. 배 고프겠다.”
“엄마 나 배 안고파.”
“뭐 먹었어?”
“응.. 짜장면.”
“어디서?”
“민수네 엄마가 사주셨어.”
딸의 대답을 들은 수영의 엄마 현숙은 표정이 잠시 굳었다.
“수영아. 이제 민수랑 놀지마라.”
“왜?”
“놀지 말라면 놀지 마.”
“왜... 엄마...”
수영은 엄마에게 애원하다시피 물었다. 툭 하고 건드리면 바로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길 가에서 혜린을 만났을 때부터 불안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영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상관없었다. 민수와 놀지 말라는 엄마의 명령만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다시 민수가 있는 중국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빗줄기는 계속 거세지기만 했다.
“엄마...”
“싫어. 안돼. 안갈거야. 으아아아앙..”
홍화반점 안을 민자의 울음소리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혜린은 강한 여자였다. 아이들 앞에서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가슴으로 눈물을 삼켰다.
“엄마, 저 잠시만 다녀올께요.”
혜린의 대답도 듣지 않고 민수가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센 빗줄기만큼 힘찬 동작으로 민수는 한달음에 혜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빗속을 달리는 민수를 본 민자의 입이 벌어졌다. 그 동안 계속 수영이 경주에서 민수를 이겼던 것은 수영의 실력이 아니었다. 수영의 집 앞에 도착한 민수의 손에는 비에 젖은 벚꽃나무 가지가 들려있었다.
“딩동”
“누구세요? 민수인데요. 수영이 좀 보려고요.”
“..없어. ...지금 딴 데 갔어.”
“........네.. 아줌마.. ”
민수는 대문 한 켠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에 꽃가지를 세우고 돌아섰다. 다시 빗 속으로 들어가는 민수의 눈에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덜컹...”
“민수야!”
“안된다니까. 수영아.”
엄마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영이 대문을 나왔을 때 민수는 이미 빗줄기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한달음에 뛰어간 민수의 집 대문은 잠겨 있었다. 중국집까지 달려가 보았지만 수영을 기다리는 것은 망가진 꽃가지 뿐이었다.
‘그게 뭐 어떻다고..’
“민수 엄마가 세컨드였던 거네.”
“오늘 본처가 들이닥쳐서 그 민수엄마가 도망갔잖아.”
“얌전한 줄 알았더니 인물값 하는 여자였어.”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니까.”
수영의 뒤를 이어 집으로 방문한 동네 아줌마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온통 민수엄마 이야기뿐이었다. 그 와중에 민수가 수영을 보러 왔다. 동네 여자들이 민수의 방문을 모르도록 조용히 처리한 것은 수영이 민수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민수가 동네여자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현숙의 배려이기도 했다. 아줌마들의 이야기에 안절부절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꽃반지를 빼서 만지작거리다가, 인터폰 소리에 방에서 나온 수영은 주방으로 가는 현자를 다그쳐 민수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민수는... 벌써 ...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거센 빗줄기도 수영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다 식히지는 못할 것 같았다. 빗 속을 하염없이 걷던 수영은 벚꽃길에 이르러 주저앉고 말았다. 동네를 헤매던 현숙이 찾으러 올 때까지 수영은 꽃잎 위에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가는 길. 빗줄기도 수영의 눈물도 잦아들었다.
‘민수야. 어디를 가야 볼 수 있는 거니.’
그러나 수영의 애타는 마음은 잦아들지 않는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 그 때, 대문 한 켠에 놓인 벚꽃가지를 발견한 수영.
‘민수야.’
수영은 다시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렸고, 잦아들었던 빗줄기도 다시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 본편 끝 * * * *
번외
혜린의 이야기
“시골 촌년이 분에 넘치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받고 대학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예쁜 아이들도 낳았습니다.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이대로 조용히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 조차 큰 욕심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흑.. 엄마가 필요하잔아요.
제가 부족하지만 아이들 엄마이지 않습니까. 으흐흑흑흑흑...“
혜린은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애원했다. ‘어머님’ 소리는 입 안으로 삼켜야 했다. 민수의 친할머니 옆에 앉은 여자, 또한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여자 앞에서 ‘어머님’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오늘 마을의 소녀들은 모두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기는 했지만, 아직 열대야는 시작되지 않았다. 내일이면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내려온다. 뽀얗고 잘난 얼굴에 세련된 매너를 가진 도시의 청년을 마주할 생각만으로도 소녀들의 가슴은 벌써부터 설레었다. 저 혼자 콩닥콩닥 뛰는 심장이 매년 이 맘 때면 밤이 되도 가라앉지를 않았다. 하지만 서울의 대학생들을 대면할 일이 없는 혜린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혜린은 내일부터 어린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오늘 저녁 읍내로 나가야했다.
혜린의 집은 형편이 어려웠다. 혜린이 어렸을 때 산에서 굴러 몸을 심하게 다친 그녀의 아버지는 목발에 의지해 겨우 걸을 수 있는 정도여서, 어머니가 밭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 형편에 보통의 경우였다면 혜린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자 형제라도 하나 있었으면, 혜린이 감히 학교 문턱을 넘는 일은 형편상 엄두도 낼 수 없었겠지만, 그녀는 무남독녀였다.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라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혜린의 부모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의 인물이 지나치게 빼어난 것을 불안해했다. 인물 덕에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이라도 가면 그 이상의 복이 없겠지만, 미인박명이라 하지 않았는가. 중학교를 졸업하자 읍내에 있는 공장을 보내 집안 형편을 돕게 하려던 생각도 접고 말았다. 남들의 시선을 끄는 혜린의 외모 때문에 공장에 보내는 일이 통 맘이 놓이지를 않았다. 거기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일가붙이조차 없었던 탓에, 제 스스로를 보호하고 앞가림 할 능력이라도 키워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딸을 읍내의 고등학교로 진학 시켰다.
다행히 혜린은 성실하고 공부도 잘 했다. 내내 장학금을 탔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권유한 중3의 담임선생님은 혜린의 일자리까지 계속 소개시켜주고 있다. 그 덕에 혜린은 방학이면 읍내의 부잣집 아이들을 가르치며 집안의 생계를 도울 수 있었다.
이번 방학에는 특히 운이 좋았다. 서울에서 전학 온 아이의 부모가 후한 보수를 제시하며 입주 가정교사를 찾았고 혜린에게 그 기회가 왔다. 이른 저녁을 먹고 짐을 싼 혜린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는 딸이 안쓰럽기만 했다. 불편한 자신의 육체보다 그를 더 불편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부인과 어린 딸에 대한 미안함이다.
“아버지. 금방 다녀올께요. 어머니. 나오지 마세요.”
배웅하려는 어머니를 만류하고 혜린은 빠르게 집을 나섰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참고 있던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위에서도 그녀는 울지 못했다.
“혜린이 이제 가는구나. 수고가 많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저희 부모님 잘 부탁드려요.”
혜린이 오늘 떠나는 것을 아는 동네 어른들이 길 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혜린을 배웅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마을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힘주어 가두었던 눈물이 혜린의 손등에 떨어졌다.
읍내에 있는 아이의 집은 큰 길 가에 자리하였고 눈에 띄도록 커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딩동”
혜린은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을 열어 준 것은 아직 어려보이기까지 하는 청년이었다.
아이의 아빠이기에는 너무 젊다 못해 어리다. 누굴까?
나이 터울이 큰 오빠이려나?
도통 가늠할 수 없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혜린은 스스로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전혜린 선생님이시죠?”
자신의 모습이 탐색당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체불명의 청년이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네”
혜린의 목소리가 죄를 짓다 걸린 사람처럼 기어들어간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강지의 사촌 오빠 민경호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민경호의 목소리는 밝고 유쾌했다.
“들어가시죠.”
혜린은 그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마당이 눈 앞에 펼쳐졌다. 외곽을 따라 가꾼 정원과 나무들 그리고 한 귀퉁이의 텃밭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바닥에 듬성듬성 넓은 돌을 박아 비 오는 날 발이 진창에 빠지지 않게 해놓은 것 말고는 특별한 꾸밈이 없다. 그 동안 많은 부잣집을 구경한 혜린은 이렇게 마당이 넓은 집도, 넓은 마당에 이렇게 장식이 없는 집도 처음 보았다. 탁 트인 마당이 혜린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가방을 이리 주세요.”
경호가 혜린의 앞으로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은 이미 가방 손잡이에 닿아 있다. 어깨에 가방을 메고 또 다른 가방을 들고 있던 혜린은 경호의 움직임에 움찔하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에 든 가방을 넘겨준다.
“나머지 가방도 마저 주세요.”
“아.. 이건 제가....”
“힘드실 겁니다. 마당이 넓어서 한참 가야되거든요. 이리 주세요.”
건네받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경호가 활짝 웃으며 계속 팔을 내밀고 있다. 혜린은 못이기는 척 어깨에 멘 가방을 마저 경호에게 넘겨주었다. 경호는 가볍게 혜린의 가방을 받아들고는, 바닥에 깔아놓은 넓은 돌을 밟으면서 앞서서 걸어간다. 구두를 신은 혜린의 발이 그 뒤를 따라 움직일 때마다 폭 넓은 치마가 나풀거린다.
넓다고 생각은 했지만, 걷다보니 경호의 말처럼 대문에서 건물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좀 멀죠”
지붕의 절반을 기와로 덮은 2층 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 문 앞에 도착하자 혜린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경호가 돌아서며 말한다.
“아.. 네... ”
경호가 돌아보자 혜린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현관문을 연 경호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빠르게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어서 들어오세요. 전혜린 선생님”
마치 혜린의 역할을 각인시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경호는 다시 혜린에게 깍듯이 호칭을 붙여준다.
“강지야. 선생님 오셨다.”
“안녕하세요.”
경호의 부름에 2층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강지는 초등학생(혜린 세대에는 국민학생이긴 한데) 치고는 키가 훌쩍 크고 말랐다. 피부염이 심한지 목덜미나 팔다리 여기저기 울긋불긋한데 인사하는 목소리만은 경호처럼 쾌활하다.
“안녕. 강지구나. 나는 전혜린이야. 반갑다. 우리 악수할까?”
혜린이 강지와 인사하는 모습을 본 경호는 다시 놀랬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가씨가 강지를 대하는 폼이 아까와는 영 딴판이다. 정말 선생님 같다. 고등학생이지만 벌써 3년째 아이들을 가르쳐온 아가씨라고 듣고 있었는데, 대문 앞에서 처음 봤을 때는 놀라고 걱정도 밀려왔다. 예쁜 아가씨가 여려 보이고 너무 수줍기만 해서 강지를 잘 가르치고 보살펴 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강지를 대하는 걸 보니 역시 3년째 쌓아온 가정교사의 내공이 다르긴 하구나 싶다. 경호는 나보다 더 나은걸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안심이 되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이 시골 가정교사 아가씨.. 너무 예쁘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지나치게 예쁘다.
이제 불안한 건 강지가 아니다. 나 민경호다.
글이 리턴을 당했습니다. ㅠㅠ
눈물에 젖은 리턴 글, 번외편과 함께 다시 올립니다. 흑흑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글이 사라진 걸 보고 처음에 무척 당황했어요. 처음엔 머리 속이 하얗게 되더니 상황 확인 후에는 밀려오는 슬픔, 꺼이 ㅠㅠ 그대로 금방 적응이 됬는데, 리플들이 날아간 것은 끝까지 슬프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