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점상층문화의 분포지역은 이전 하가점하층문화의 분포지역 중 노노아호산 서쪽 지역이다. 즉 노노아호산을 경계선으로 그 이북의 내몽고지방 서요하(西遼河)․노합하(老哈河) 유역의 공병식검(銎柄式劍)을 특징으로 하는 ‘청동단검문화권(靑銅短劍文化圈)’이다. 이 지역은 중국 북방지역과 시베리아 문화지역과 가까워, 내몽고 동남부의 커식텅(克什克騰旗) 일대에서 시베리아지역의 유물요소를 중심으로하여 북중국일대의 여러 유물요소가 결합함으로써 성립하게 된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이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은 적봉시(赤峰市) 영성현(寧城縣)의 남산근(南山根)유적으로 편년은 기원전 9~8세기대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비파형동검이 공반되지만 북방계의 오르도스식 동검과 공병식 단검이 주체가 된다. 즉 인접지역의 북방계와 중원계의 청동기가 공반되는 지역적 특징을 보여준다. 하가점상층문화는 중기에 이르러 노노아호산 동쪽의 요서비파형동검문화와 교류하면서 비파형동검을 유물로 포함하기도 하였지만, 주 청동기 유물은 아니었다.
한편 하가점상층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와 시간적으로 선후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두 문화 사이에는 몇몇 기물의 유사성을 볼 때 두 문화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하가점하층문화가 정주(定住)의 농경문화인데 비하여 하가점상층문화는 농경의 특성도 가지고 있지만 유목적인 특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문화인의 주체도 ‘고화북유형’으로 나타난다. 한편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체는 “고동북유형‘으로 나타난다.
하가점상층문화를 영위한 종족에 대해서는 산융(山戎) 계통이라는데 큰 이견이 없다. 남산근유적에서 보듯이 매우 발전했던 세력임을 알 수 있으며, 중원지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산융은 중국 북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수시로 중원을 침략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는 했던 부족이다. 특히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는 춘추시대의 연(燕)나라이다. 산융에게 시달리던 연나라는 마침내 당시 강국이었던 제(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기원전 7세기에 제 환공(桓公, 기원전 685~643년)은 마침내 북벌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관자(管子)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제나라가 산융을 공격하여 멀리 북쪽으로 몰아낸 시기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7세기경에 하가점상층문화도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노노아호산 서쪽지방은 특별한 지표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동호(東胡)가 하가점상층문화 및 비파형동검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호의 특성을 전혀 모르고 단지 한 순간 시기의 일치점을 보고서 무모하게 대입한 것에 불과하다.
먼저 동호는 시대적으로 기원전 5세기 이전에는 중국 선진문헌에 그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가점상층문화와 동호와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또한 동호는 전국시대에 산융이 있었던 자리에 활동은 하였지만 정주생활보다는 유동성이 큰 유목생활을 하여 그 문화의 흔적이 찾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하가점상층문화를 영위했던 산융족을 대신하여 노노아호산 서쪽에 자리잡았지만 뚜렷한 문화의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흉노열전」에 보면 동호족의 생활근거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계곡에 분산하여 거주하였으므로 능히 하나로 통일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대릉하유역의 평원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역이다. 그리고 동호는 흉노(匈奴)의 모돈(冒頓)에게 패하여 역사에서 사라질 때까지 요서지역 서부에 일부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비파형동검문화의 시작 시기에 동호는 역사에 등장하지도 않으며 그 활동 시기도 한대(漢代)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그 위치도 문화의 중심지인 대릉하유역과는 멀리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동호를 비파형동검문화에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많다.
동호가 흉노에게 멸망당한 후 그 잔여세력이 지금의 내몽고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오환과 선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유적에서 아직 비파형동검이나 그 변형된 형태의 어떤 유물도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없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하가점상층문화가 소멸된 이후 특별한 문화를 형성하지 못하였던 노노아호산 서쪽 지역은 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 연나라 진개(秦開)의 동호에 대한 공략으로 인해서 연문화(燕文化)가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마침내 중원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 것이다.
첫댓글 지도부터 잘못되어 있군요. 위영자유적군문화는 대략 1세기 남짓 흔적을 잠시 남기고 어떤 세력권...무슨 문화라 통칭하기에 무리가 있어 위영자유적과 같은 유적몇개를 묶어 유적군 문화라 하는 것이랍니다. 즉 일정한 시기와 영역을 가진 통상의 문화권으로 보기 어려운 유적을 묶어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말도 안되게 시리 위영자문화유적군 문화와 비파형동검문화를 동시대에 연결되는 문화로 표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님의 글을 보니 관련된 다양한, 님의 의견에 반하는 논문 등 많은 논문을 본 것 같지는 않군요. 위영자문화를 님과 같이 그냥 지나가는 문화라고 말하는 논문은 최근에는 본적이 없습니다. 요서지방의 고고학적 발굴이 늘어나면서 위영자문화에 대해서도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위영자문화가 비파형동검문화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시기적으로 위영자문화에 뒤이어 비파형동검문화가 나타나며, 그 시점이 은의 멸망과 겹쳐지면서 은의 유민에 의한 은문화의 영향과 함께 비파형동검문화의 기초가 된 것으로 봅니다.
오강원 박사도 "魏營子式유적群은 遼西지역에 琵琶形銅劍文化가 성립되기 직전에 유행한 문화양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그러나 魏營子式유적群은 遼西지역에서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곧 소멸한다. 이러한 양상은 곧이은 시기 遼西지역에 琵琶形銅劍文化가 성립할 수 있는 외적요건을 형성하였다."고 그 의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하는군요. 위영자유적군과 비파형청동기문화와 연대하여 표시한 위 지도의 표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의 고고문화를 말할때는 청동기 몇개로 말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즉 동반하는 토기문화나 묘제등 유물복합상태를 비교검토하여 상호연관되는 혹은 계승되는 문화인지 말한답니다. 그렇다면 위영자식 유적군과 비파형동검문화의 토기에 있어 표식유물에 대하여 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영자식 유적군에 미송리형토기나 정가애자형 호, 요즘 주목받고 있는 이중구연 심발형토기등이 보이는 지요!!!
기원전 15세기에 소멸하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소멸한 후, 하가점상층문화가 기원전 14세기에 시작한다고요. 정말 앞뒤 연결되는 말을 하길 바랍니다. 통설적인 견해로 보면 하층문화는 15세기에 소멸된다고 보고 상층문화는 기원전 11세기경에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가점상층문화가 기원전 14세기에 시작한다고 말하는 연구자가 하가점 하층문화와 바로 연결된다고 말하던가요. 즉 하가점 상층문화가 기원전 14세기에 시작한다고 말한 연구자가 하가점 하층문화는 언제 소멸한다고 말한것은 모르시는 군요.
하가점하층문화가 현재까지 발굴성과로 보면, 직접적으로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일부 문화요소는 전승되었으나 그 문화를 직접적으로 가령 고조선과 같은 세력에 의한 문화계승으로 볼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발굴성과이랍니다.
결론적으로 하가점 하층문화의 소멸 그리고 3-5세기정도(연구자간의 견해가 다름) 이지역은 문화공백기를 거치는데 그 소멸원인을 언급한 글은 다수 있습니다. 고대의 별님이 이전글에서 언급한 논고들 속에 얼마든지 있답니다. 그 논고 100%읽은 분이라면 이런식으로 자기 논리를 위해 발굴성과나 연구성과를 왜곡하면 안되죠.
제대로 저의 글을 안 읽으시고 댓글을 다시는군요. 하가점하층문화의 소멸에 대한 저의 의견은 기원전 11세기-9세기말로 보고 있습니다. 역시 고고학적 발굴의 증가로 그 시기가 앞당겨진다는 여러 논문의 의견이 있어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기대 교수의 여러 논문은 읽어 보셨는지요. 물론 복 교수가 윤내현 교수처럼 조금 오버하는 경향은 있지만 상당히 혁신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님의 글에서는 편협된 몇가지 책이나 논문을 보고 그것이 다인양 주장하는 것이 보입니다. 글의 전개가 좀 미흡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까지 미흡한 것은 아닙니다.
흥미롭군요. 하가점하층문화의 소멸시기를 기원전 11세기에서 9세기로 본다니 처음 들어 보는 견해군요. 그런 편년을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중국측이나 우리측 연구자들중에 하가점 하층문화의 소멸시기를 기원전 15세기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나요. 저는 과문하여 알지 못하겠군요. 그렇기에 하가점하층문화가 기원전 15세기 소멸후 이후 나타나는 하가점 상층문화나 비파형동검문화는 기원전 11세기 전후로 보는 통설에 따라 그 문화 공백기가 수백년간 존재한다는 것이 현재까지 발굴성과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연구자가 혹 있나요? 고대의 별님이외에.
고대의 별님///하가점하층문화의 소멸시기를 기원전 11세기로 본다고 하는데 어떤유적이 기원전 11세기로 편년되는지 어떤유물인지 예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 잘못 썼군요, 본글에 분명 하가점상층문화의 시작시기를 기원전 11세기게서 9세말로 언급한 것을 옮기면서 실수하였습니다. 저의 글의 본문은 잘 읽지도 않고 무조건 저의 글을 비판하려는 님에게 빌미를 주었군요.
고대의 별님의 글을 보느니 오강원 선생의 박사학위논문을 보는게 좋을듯 ..그리고 위 글등의 내용을 오강원선생의 논고를 중심으로 하였으나 본래의 연구자의 취지와 다르게 윤색하는 것은 올바른 글쓰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글의 앞에 말씀하셨는데. 이전글에 댓글로 반론한 부분에 대하여 논리를 말씀하셨는데 논리적인 반론에 대하여 아무런 해명없이 이런 말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반론한것중 하나라도 답변하시고 반론이 내용이 없다고 말씀하는 것이 도리이랍니다.
현재 저의 반론은 [참역사] 글로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읽어 보지 않아도 오강원 선생의 학위논문 5장 비파형동검문화의 성립과 그 배경에 나오는 하가점 하층문화 상층문화 비파형동검문화 위영자식유적군등을 위주로 글을 쓰고 있음을 알수 있더군요. 그런데 오강원선생의 논리중 자기논리에 안맞는 것은 빼버리는 식. 즉 여러 사실관계중 자기논리와 달리하는 사실은 배제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하기가 아니랍니다. 다음글에는 오강원 선생의 논문 6장 비파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을 위주로 하지 않길 바랍니다.
고대사영광을 부르짓어 그나마 실낱같은 중국측 자료 접근기회마저 원천봉쇄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댓글이 3개 이상으로 카페 수칙에서 어긋났으니, 새로이 글로 써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네. 답글로 하긴 비판적 글이라 댓글로 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좀 공부하신분들이 이런식으로 남의 연구성과를 다루는 것에 다소 화가 납니다. 또한 언론에 주목받기 좋아하는 일부연구자들이 더떨어진 언론플레이로 말미암아 초창기 중국에 가서 자료를 볼수 있는 것과 달리 지금은 자료하나 보기위해서는 바늘구멍을 후비고 들어가서 겨우 볼수 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에 더 화가 납니다. 거기에 더해 이런 역사하기가 아니라 정치하기로 역사를 이용하는 고대사영광을 부르짓는 분들로 말미암아 그나마 바늘구멍마저 막혀 버리지 않길 바랍니다.그리고 님의 지적 수용하며 따르겠습니다.
지나가다..님께서 고대의 별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소 드릴 말씀이 많아 댓글을 작성하다보니 수칙보다 조금 많은 댓글을 달게 되신 듯 합니다. 명치호태왕님의 지적도 있고, 또 카페의 수칙도 댓글 3개 이상은 가급적 답글로 처리해드리길 당부드리고 있으니 차후엔 이에 유의하셔서 협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ㅎㅎ
앞으로 유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