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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 가풍(馬祖家風)
이 부처님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진리의 법은 감출 수도 없고 덮을 수도 없다. 두두물물(頭頭物物)의 모든 형상(形相) 있는 바가 진리의 고풍(古風)을 항상 드날리고 있음이라.
진리의 옛 바람이 항상 드날리고 있음이여!
바람을 따라서 비가 화(化)해서 앞산을 지나가누나.
바람을 따라 비가 화(化)해서 앞산을 지나간다는 이 말의 뜻을 알 것 같으면, 삼세 제불(三世諸佛)과 역대 조사(歷代祖師)와 더불어 함께 손을 잡고 억만 년이 다하도록 부처님의 열반락(涅槃樂)을 수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오한 진리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느 누구라도 나고 죽는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의 몸을 받기도 어렵고, 사람몸을 받았다 하더라도 불법(佛法) 만나기 어렵고, 불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최상승(最上乘)의 진리를 아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비유하건대, 깊은 바다 속에서 눈 먼 거북이가 수백 년 만에 한 번씩 쉬러 올라오는데 그 때, 그 가없는 바다 위에 큰 나무토막이 떠 있는 것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최상승 진리를 아는 선지식을 만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어렵고 중요한 것은, 참으로 고준한 진리의 법문을 듣고서 실천에 옮겨 바르게 수행해 나가는 일이다.
그 좋은 법문을 듣고도 행(行)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하루 이틀 미루다가 백발이 되고 눈과 귀가 멀어지도록 허송세월하지 말고, 당장에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하여 자기사(自己事)를 밝힐 수 있기를 바라노라.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도인이라면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를 꼽을 수 있는데, 그 분의 탁월한 안목(眼目)은 감히 어느 누구도 능가할 사람이 없다 하겠다.
달마 대사의 스승이신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께서 예언하시기를,
“네 밑으로 7대(代)의 아손(兒孫)에 이르러 한 망아지가 출현하여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다.”
했는데, 그 예언이 전해 내려와서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에 이르렀다.
어느 날 육조께서 제자인 남악 회양(南嶽懷讓) 스님에게 은밀하게 부촉(付囑) 하셨다.
“그대 밑에 천하 사람을 밟아버릴 만한 한 망아지가 출현할 것이네. 그리하여 그 밑에 수많은 도인 제자가 나와서 불법이 크게 흥성(興盛)하리라고 반야다라 존자께서 예언하셨으니, 그대만 알고 잘 지도하게.”
회양 선사께서 회상(會上)을 열어 법을 펴시니, 마(馬)씨 성(姓)을 가진 한 수좌가 와서 신심(信心)을 내어 불철주야 공부를 지어갔다. 그런데 이 수좌는 항상 좌선(坐禪)하는 것만을 고집하여 자리를 뜨는 법이 없었다.
회양 선사께서 하루는, 앉는 데 국집(局執)하는 그 병통을 고쳐 줘야겠다고 생각하시고, 좌선중인 마조(馬祖) 스님에게 말을 건네셨다.
“수좌는 좌선하여 무엇 하려는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자 회양 선사께서는 암자 앞에서 벽돌을 하나 집어와서 마조 스님 옆에서 묵묵히 가시기 시작했다. 마조 스님이 한참 정진을 하다가 그것을 보고는 여쭈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마조 스님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회양 선사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무주법(無住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림이 없어야 하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선(禪)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네.”
마조 스님은 여기에서 크게 뉘우치는 바가 있어서 좌선만을 고집하던 생각을 버리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사위의(四威儀) 가운데서 일여(一如)하게 화두를 참구하여 순일(純一)을 이루어서 마침내 크게 깨쳤다.
그 후 회양 선사를 모시고 10여 년 동안 시봉하면서 탁마(琢磨)받아 마침내 천하 도인의 기봉(機鋒)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훌륭한 안목(眼目)을 갖추어 출세(出世)하시니 승속을 막론하고 참학인(參學人)들이 무수히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마조 선사의 지도하에 84인의 도인 제자가 나왔으니 충분히 수기(授記)를 받을 만한 분이라 하겠다.
백장(百丈) 스님이 마조 선사를 시봉할 때, 하루는 마조 선사를 모시고 들판을 지나가게 되었다.
큰 저수지에서 들오리들이 놀다가 인기척을 듣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마조 선사께서 백장 스님에게 물으셨다.
“저기 날아가는 것이 무엇인고?”
“들오리떼입니다.”
“어디로 날아가는고?”
“산너머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조 선사께서는 백장 스님의 코를 잡고 세게 비틀어 버리셨다.
“아얏!”
백장 스님이 아파서 소리를 지르니, 마조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일찍이 날아갔으리오.”
하였다. 날아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백장 스님은 절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잊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들었다.
‘오리들이 어디로 날아갔느냐고 물으셔서 산너머로 날아갔다고 말씀드렸는데, 마조 선사께서는 왜 코를 비트셨을까?’
이 한 의심(疑心)에 빠져 있다가 일주일이 지나서 그 의심이 홀연히 해결되었다. 마조 선사께서 코를 비트신 뜻을 알게된 것이다.
그래서 곧 조실방(祖室房)으로 달려가서,
“스님, 어제까지는 코가 아프더니 오늘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이 말에 마조 선사께서 백장 선사의 눈이 열렸음을 아시고 운집종(雲集鍾)을 치게 하시니, 몇백 명 되는 대중들이 모두 법당에 모였다.
대중들이 청법(請法)을 하고 마조 선사께서 법상에 좌정(坐定)해 계시는데, 백장 스님이 맨 마지막에 들어오더니 절하는 돗자리를 걷어서 어깨에 메고 법당을 나가 버렸다.
이에 마조 선사께서는 한 말씀도 설(說)하시지 않고 즉시 법상에서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가셨다.
이렇게 척척 통해야 되는 법이다. 마음땅 지혜가 열리면 이렇게 일거일동(一擧一動)의 낙처를 서로 안다.
백장 스님이 돗자리를 걷어서 어깨에 메고 나가버린 뜻은 어디에 있으며, 마조 선사께서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설하지 않고 즉시 법상을 내려와 조실방으로 돌아가신 뜻은 어디에 있는가?
[양구(良久)하신 후 송(頌)하시기를,]
龍袖拂開全體現(용수불개전체현)
須彌倒卓半空中(수미도탁반공중)
곤룡포(袞龍袍) 소매를 떨치니 전체가 드러나고
수미산이 반공중에 거꾸로 꽂힘이로다.
마조 선사께서 어느 달 밝은 밤에, 세 제자를 데리고 도량(道場)을 거닐면서 이르셨다.
“그대들이 이제까지 수행한 바를 저 밝은 달을 가리켜 한마디씩 일러 보게.”
그러자 서당 지장(西堂智藏) 스님이
“바로 공양(供養)하는 때입니다.”
라고 답했고, 백장 회해(百丈懷海) 스님은
“바로 수행(修行)하는 때입니다.”
라고 답했다.
그런데 남전 보원(南泉普願)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양팔을 흔들면서 그냥 가버렸다.
마조 선사께서 세 제자의 답처(答處)를 점검하여 이르시기를,
“경(經)은 지장(智藏)에게 돌아가고, 선(禪)은 백장(百丈)에게 돌아가는데, 남전(南泉)만이 홀로 형상 밖으로 뛰어났구나.”
하고 남전 스님을 칭찬하셨다.
이 도인 문중에서는 진리의 물음에 한 마디 답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 답처를 꿰뚫어 상대방의 살림살이를 점검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남전 스님이 양팔을 흔들면서 그냥 가버린 뜻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시회대중(時會大衆) 가운데 이 뜻을 아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산승(山僧)이 이 주장자를 두 손으로 전하리라.
세월이 흐른 후, 마조 선사께서 법상(法床)에 앉아 계시던 차제에 백장 스님이 들어오니, 선사께서 법상 모서리에 걸어 놓은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셨다.
그러자 백장 스님이 여쭙기를,
“이를 바로 씁니까, 이를 여의고 씁니까?”
하니, 마조 선사께서 그 불자를 원래 걸려 있던 자리에다 도로 걸어 두셨다.
한동안 백장 스님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니 마조 선사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장차 대중을 위해서 어떻게 법을 설하려는고?”
그러자 이번에는 백장 스님이 걸려 있던 불자를 들어 보이니, 마조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다.
“이를 바로 씀인가, 여의고 씀인가?”
백장 스님이 아무 말 없이 불자를 도로 제자리에 걸자, 마조 선사께서
“억!”
하고 벽력 같은 ‘할’을 한 번 하셨다.
이 ‘할’에 백장 스님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사흘 동안 귀가 먹었다가 깨어나서 마조 선사께서 ‘할’ 하신 뜻을 깨달았다.
백장 선사는 여기에서 마조 선사의 법(法)을 받아서, 분가(分家)하여 다른 곳에 주(住)하며 법을 펴셨다.
몇 년 세월이 흐른 후에, 황벽(黃檗) 스님이 백장 선사를 방문하여 친견하고 며칠 머물다가 하직인사를 하였다.
“어디로 가려는가?”
“강서(江西)에 마조 선사를 친견하러 가고자 합니다.”
“마조 선사께서는 이미 천화(遷化) 하셨네.”
“저는 인연이 없어서 그 위대한 마조 선사를 한 번도 친견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래도록 마조 선사를 모시고 지도 받으셨으니 저에게 마조 선사의 고준한 법문을 한 마디 설해 주십시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는 두 번째 마조 선사를 참예(參詣)하였을 때 불자(拂子)를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시고는 말씀을 덧 붙이셨다.
“내가 그 때 마조 선사께서 ‘할(喝)’ 하신 소리에 사흘 동안 귀가 먹었었네.”
황벽 스님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는 결에 혀를 쑥 내밀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조 선사의 ‘일할(一喝)’에 두 분이 활연대오(豁然大悟)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벽 선사는 백장 선사의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되어 법을 이으셨다.
그러면 마조 선사의 이 ‘일할(一喝)’이 얼마나 위대하길래, 두 분 선사께서 그 아래에서 몰록 깨치셨을까?
이 ‘일할’ 가운데는 비춤[照]도 있고, 씀[用]도 있고, 줌[與]도 있고, 뺏음[奪]도 있고, 죽임[殺]도 있고, 살림[活]도 있다.
마조 선사의 이 ‘일할’을 좇아서 후손들이 ‘방(棒)·할(喝)’을 썼으니, 새로운 종풍(宗風)을 일으킨 위대한 분은 바로 마조 선사이다.
일러라. 마조 선사의 이 ‘일할(一喝)’의 낙처(落處)가 어디에 있느냐?
蒼天後更添怨苦(창천후갱첨원고)
곡(哭)을 한 후에 다시 원한의 괴로움을 더함이로다.
하루는 마조 선사의 제자, 남전(南泉)·귀종(歸宗)·마곡(麻谷) 선사 세 분이 남양 혜충(南陽慧忠) 국사를 친견하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당시는 마조(馬祖)·석두(石頭)·혜충(慧忠), 이 세 분 선사께서 삼각을 이루어 선풍(禪風)을 크게 드날리시던 때여서, 누구든지 이 세 분의 도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중국 천하를 횡행(橫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용맹 있고 당당한 사자의 조아(爪牙)를 갖춘 분도 으레 이 세 분 도인을 친견해서 탁마(琢磨)하여 인증을 받아야 했다.
며칠을 걸어가다가, 남전 선사께서 길바닥에 커다란 원상(圓相)을 하나 그려놓고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이 원상에 대해서 한 마디씩 분명히 이를 것 같으면 혜충 국사를 친견하러 가겠거니와, 바로 이르지 못할 것 같으면 친견하러 갈 수 없네.”
이에 마곡 선사는 그 원상 안에 주저앉으셨고, 귀종 선사는 원상을 향해 여자 절[女人拜]을 한 자리 나붓이 하셨다.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남전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그렇게 이른다면 국사를 친견하러 갈 수 없네. 도로 돌아가세.”
그러자 이 말 끝에 귀종 선사께서,
“이 무슨 심보를 행하는고?”
하고 한 마디 던지셨다.
참으로 귀종 선사는 불조(佛祖)를 능가하는 안목이 있다.
알겠는가?
만약 알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차별삼매(差別三昧)를 바로 보는 명철(明徹)한 지혜의 눈을 갖추었는지, 선지식은 그 진위(眞僞)를 점검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불법정안(佛法正眼)을 갖춘 선지식은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다. 그 낙처(落處)를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입을 여는 순간에 바로 그 진위(眞僞)를 척척 가려내지 못한다면, 아직 정안(正眼)을 갖추지 못한 참학도중인(參學途中人)인 것이니, 마땅히 다시 참구해야 옳다.
그러면 남전 선사께서 귀종·마곡 선사의 답처(答處)를 보시고 혜충 국사를 친견하러 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시회대중(時會大衆)은 남전 선사를 알겠는가?
대중이 아무 말 없자 스스로 이르시기를,
백주 대낮에 도적질을 하다가 도적의 몸이 드러나 간파(看破)당함이로다.
세 분의 도인들이 한가하게 사는 세계를 알겠는가?
相喚相呼歸去來
不覺露濕全身衣
서로 부르고 부르며 오가다
전신이 이슬에 젖음을 깨닫지 못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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