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도 아니고. 또 산 거야? 신발장에 신발 넣을 데가 없어." 엄마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신발을 '사재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우리 집 신발장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우리 집 신발장은 미미한 존재라는 걸 성수동 수제화 거리를 알게 되면서 깨달았다.
20여 년 전만 해도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대한민국 신발의 메카였다. 수제화 장인들이 쉴 새 없이 신발을 만들었고, 수십만 켤레의 신발이 성수동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대가 변하면서 기성화의 강세에 사람들 발길이 끊겼었지만, 수제화 장인들은 가죽 냄새 들이마시며 오래된 거리를 지켜냈다. 그 결과 지금은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새로운 명소로 거듭났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 벽화
슈스팟 성수를 들려야 하는 이유
이름이 알려진 지역마다 그곳을 대표하는 물건이 있다. 신당동 떡볶이, 종로 보석처럼. 성수동을 대표하는 건 수제화다. 1990년대, 천여 개에 달하는 구두 공장이 있을 정도로 국내 최대 수제화 생산지였다. 지금도 우리나라 수제화의 70%는 성수동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성수동=수제화'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구두 생산업체 300여 곳, 중간 가공과 원부자재 유통업체 각각 100여 곳 등 총 500여 곳의 수제화 업체가 밀집되어 있다.
슈스팟 성수에 진열된 구두 골 [왼쪽/오른쪽]우리나라 수제화 산업의 역사를 알려주는 전시 / 수제화 장인들이 쓰는 연장
성수동 수제화 거리 탐방에 앞서 꼭 들려야 할 곳이 구두박물관 슈스팟 성수다. 서울지하철 2호선 성수역 내에 마련된 이곳에서 수제화 거리는 물론 구두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나면 수제화 거리가 깊이 있게 다가온다.
여기서 문제 하나. '구두'는 순우리말일까? 정답은 '아니요'다. 구두는 일본말이다. 일본에서 제화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일본어 '구쓰(くつ )'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구두'가 되었다. 슈스팟 성수에는 가벼운 상식부터 서울역 염천교에서 성수동까지 우리나라 수제화 산업의 변천사, 수제화 거리에 입점한 가게를 표시한 지도 등이 꼼꼼히 전시되어 있다. 장인들의 구두 제작 작업실을 재현한 공간도 소소한 볼거리다.
수제화 장인의 모습을 새긴 거리 벽화
성수동에 난다 긴다 하는 구두장이들이 모여든 건 1990년대부터다. 그 전까지 서울에 사는 최고 멋쟁이들은 일명 싸롱화(살롱화)라 불리던 명동 양화점에서 고가의 수제 구두를 맞춰 신었다. 90년대 이후 국내외 고급·저가 브랜드 구두가 공급되고,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싸롱화가 쇠퇴하자 구둣가게들은 임차료가 저렴하고 금강제화 본사와 가까운 성수동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고난은 계속 되었다. 제작기간이 10일은 족히 걸리는 수제화는 소비자의 마음을 잡아 당기지 못했다. 소비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살 수 있는 기성화를 선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업화 바람이 잦아들었다. 성수동은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가죽, 굽, 액세서리 등 부자재로 꽉 들어찬 창고도 텅 비어갔다. 성수동이 생기를 되찾은 건 시간이 조금 흐른 후의 일이다.
드림핸드메이드 대표 수제화 명장 1호 유홍식 명장
그는 왜 성수동을 떠날 수 없는가, 수제화 명장 1호 유홍식 명장
1990년대 수제화 거리에 모여든 장인 중에는 수제화 명장 1호 유홍식 명장도 있다. 드림핸드메이드 대표인 그는 손님이 와도 흘깃 곁눈질만 할 뿐, 비좁은 가게 한편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느질에만 열중하는 구두장이다. 2013년, 성동구 수제화 명장 선발대회에서 최고의 구두 장인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그뿐인가.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신은 신발도 그가 만든 것이다.
"올해로 56년째 구두를 만드는데 대통령 구두까지 만들었으니 더 이상 바람은 없어요. 이제 몇 년 일하다 후배를 양성하고 은퇴하는 게 꿈이지요." 유 명장은 말하면서도 한 손엔 실, 한 손엔 구두를 놓지 않는다. 내년이면 일흔이건만 신발을 바라보는 눈매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매섭다.
"아이고, 지금은 몰라보게 발전했지요." 그가 성수동에 온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구두 명장도 외환위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전 재산 18억을 몽땅 잃었다. 19살 때부터 남의 구두를 만들며 구둣방 한편에서 쪽잠 자며 모은 돈이었다. 무작정 고향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성수동에 공장이 있던 친구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그땐 성수동이라는 동네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달랑 현금 8만 원이랑 구두 연장만 들고 왔지요. 밥만 먹고 살면 됐다 싶었는데 여기 와서 운이 트였죠."
[왼쪽/오른쪽]유홍식 명장의 '문재인 대통령 구두 작업지시서' / 우측에서 두 번째 신발 디자인이 독특하다. 옛날 사람들이 짚신 만들 때 쓰던 기법을 구두에 접목했다. 바느질하는 장인의 정밀한 손
그에게 성수동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곳이자 빼어난 손기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별천지였다. 원부자재 유통 업체부터 중간가공 업체까지 수제화 관련 인프라가 튼튼하고, 솜씨 좋은 구두 장인들이 이웃하니 이보다 더 좋은 작업장이 없었다. 그렇게 성수동에 터를 잡은 지 올해로 17년째. "은퇴하는 날까지 여기 계속 있어야죠." 유 명장에게 성수동은 제 2의 고향이다.
그에겐 큰 과제가 남았다. 자신의 기술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서 더 좋은 구두를 만들게 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당신만 안다면 당신은 매국노요. 누군가에게 반드시 전수하시오." 그는 옛 손님이 남기고 간 말 한 마디를 붙들고 산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하루 13시간씩 구두를 매만지며 누군가를 위한 신을 만든다. 아직도 '노병'은 건재하다.
[왼쪽/오른쪽]성수수제화타운에서 신발을 둘러보는 고객 사진 / 성수수제화타운에는 여성화, 남성화, 아동화 등 다양한 수제화가 있다.
장인들의 '콜라보', 성수수제화타운
가수들뿐 아니라 장인들도 컬래버레이션을 한다. '사람들이 수제화를 좀 더 편하게 접하게끔 새로운 판로를 만들 수는 없을까.' 수제화 장인들이 만든 공동판매장, 성수수제화타운(SSST)은 이런 문제의식 속에 탄생했다. 장인들은 협업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11개 업체가 모여 하나의 마을기업을 이룬 것이다. 결과적으로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성수수제화타운은 설립 7개월 만에 매출 5억 원을 달성, 행정안전부의 우수마을기업으로 선정되었다. 매장 벽에 붙은 마을기업 지정서는 성수수제화타운의 존재 의미를 잘 보여준다. "위 기업을 지역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지역일자리를 창출하는 '마을기업'으로 지정합니다."
수제화는 비싸다고들 말한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성수수제화타운에서 판매하는 수제화는 고가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여성화는 12~15만 원대, 남성화는 11~19만 원대, 아동화는 5~6만 원대다. 이 정도면 기성화와 큰 차이가 없는 가격이다.
수제화 거리는 새로운 힙스터 성지다.
성수동이 젊어졌다
젊은 예술가들은 늘 새로운 공간과 영감을 찾아 헤맨다. 그들의 레이더에 성수동이 잡힌 건 2010년께 일이다. 임차료가 저렴한 데다 서울 중심부라 교통도 편리하고 가죽·원단·부품 공장이 있으니 인프라도 구축됐겠다, 젊은 아티스트들이 성수동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붉은 벽돌 공장 일색이던 성수동이 되살아난 건 그 무렵부터다. 칙칙한 폐공장이 카페로, 버려진 창고가 문화예술 복합공간으로 변모했다. 과거의 인프라와 장인의 손길, 젊은 아티스트의 감각이 어우러지자 발길 뜸하던 거리에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의 선두에는 카페 어니언이 있다.
옛 금속공장 외관을 그대로 살린 카페 어니언 [왼쪽/오른쪽]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칠이 묘한 안정감을 준다. / 어니언의 아이스아메리카노와 팡도르
카페 어니언은 성수동의 과거를 보여주는 유적지다.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 위에 새로운 시간을 증축한 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 유적이다. 힙스터들이 가는 카페, SNS에서 입소문이 난 카페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면, 그건 어니언의 일부만을 아는 것이다.
어니언은 1970년대에 처음 지어졌다. 5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슈퍼, 정비소, 금속공장으로 쉼 없이 모습을 달리했다. 벗겨진 페인트칠이나 이 나간 시멘트 벽돌에서 과거의 흔적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커피는 물론 빵 맛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달달한 슈거파우더가 소복이 쌓인 팡도르와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고소미 버터롤이 인기 메뉴다.
[왼쪽/오른쪽]수제화 거리의 구두 조형물 / 부자재 상가의 가죽 원단 [왼쪽/오른쪽]성수동 구두테마공원에 있는 전태수 장인 동상. 전 장인은 김정숙 여사의 버선코 구두를 만들었다. / 성수동 거리는 다시 활기가 감돈다.
공장에서 찍어낸 신발에 발이 아프다면, 갈팡질팡하며 삶의 무게중심을 잡느라 발이 뻐근하다면 수제화 거리를 걸어보자. 디자인부터 조립까지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신발을 신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할 것이다. '신발이 편하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 성수역 교각 아래, 동판에 새겨진 글귀다. 나만을 위한 신을 선물하고 싶은 곳, 그렇게 발의 존재가 잊히는 곳, 성수동 수제화 거리다.
여행정보
- 주소 : 서울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일원
- 문의 : 서울 성동구청 문화체육과 관광팀 02-2286-6305
주변 음식점
- 성수족발
- 제주국수
- 쉐어드테이블: 파스타, 피자, 타파스 / 서울 성동구 연무장길 47 / 02-467-0303
숙소
- 호텔아띠성수: 서울 성동구 성수이로 96 / 02-2205-0702
- 성수오슬로: 서울 성동구 성수일로8길 39-1 / 02-464-1457
- 빅토리아: 서울 성동구 아차산로 90 / 02-464-1700
글 : 이수린(여행작가), 사진 : 장명확(사진작가)
첫댓글 3일이라는 다큐멘다리에 나오든군요
그나마 사라지지않고 명맥을 유지하니 즐겁습니다
아름답고,소중한 인연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