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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해남/연동] 500년 사대부가를 만나다. 녹우단 둘러보기 #1
길손旅客 추천 1 조회 221 13.05.28 10:3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500년 묵은 사대부가의 기록,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102-1 / 061-530-5548

 

연동에 터를 잡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역사를 전시한 공간입니다.

정치적 불행을 글로서 승화시킨

고산 윤선도선생과

자화상을 비롯한 실학의 시작을 알린

공재 윤두서선생을 알리는 공간으로

녹우단의 초입에 자리한 전시관입니다.

 

 

 

 

녹우단(綠雨壇)’,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역사를 만나는 공간입니다. 녹우당, 어초은 윤효정묘와 사당, 고산사당, 추월당, 그리고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아울러 녹우단이라고 합니다.

해남 여행에서의 답사1번지라 불릴 수 있는 만큼 500년 이상을 이어 온 사대부가의 전통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특히,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에서는 정치인이자 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의 삶과 함께, 화가로서 명망을 알린 그의 증손 공재 윤두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공재 선생의 예술적 감각은 대를 이어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 손자 청고 윤용에게 전해지지요. 유물전시관 특별전시실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박물관의 자료를 협조 받아 이들 3대의 작품을 기획전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녹우단을 방문하기 위해 고산선생을 만나봅니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정치인이자 시인, 작가, 음악이면서 의원이기도 합니다. 특히, 국문학에 있어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 ‘노계 박인로(盧溪 朴仁老, 1561~1642)’와 함께 조선3대시가인(朝鮮三大詩歌人)’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대표작으로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어부사시사가 있습니다. 그의 시조는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를 하였는데, 우리의 말을 쉽고 간소하게 구사하면서 국어의 가치를 예술적으로 승화 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화가인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입니다.

 

고산선생은 선조20(1587) 한성부 동부 연화방(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윤유심(尹唯深, 1550~1604)과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 1551~1609)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8세 되던 해 큰아버지인 관찰사(觀察使) ‘윤유기(尹唯幾, 1554~1619)’의 양자로 입적하게 됩니다. 이는 어초은 윤효정(魚樵隱 尹孝貞, 1476~1543)’4대종손이었으나 늦도록 아들이 없던 이유로 고산 선생은 해남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을 잇게 되는 것입니다.

 

 

공재 윤두서의 작품들

 

 

어린 시절부터 기억력이 좋고 글을 잘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양아버지는 이러한 그에게 저명한 학자를 불러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11살이 되던 선조30(1597)에는 절에 들어가 학문에 매진하게 됩니다. 17세가 되어 판서 죽창 윤돈(竹窓 尹暾, 1551~1612)’의 딸 남원 윤씨(南原尹氏, 1588~1655)와 가례를 올렸으며, 18세가 되어 진사초시에 합격하게 되지요.

 

그러나 성격이 강직하고 원칙론에 입각하여 시비에 타협이 없어 그의 정치생활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성격으로 인하여 잦은 유배를 당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림이 동, 서로 나누어질 때 동인이었으며,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 될 때 남인이었습니다. 광해군8(1616)에는 광해군을 등에 업은 이이첨, 김개시, 권신, 박승종, 유희분등의 월권행위와 인목대비 폐모론,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의 죽음을 규탄하며 북인계열을 비판하다가 이듬해 유배를 당하였고, 유배 중 견회요(遣懷謠)’5, ‘우후요(雨後謠)’1 등의 시조 6수를 지었습니다.

이 후 인조반정으로 8년만의 귀양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서인의 집권시대였지요. , 인조와 고산과는 인연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한 서인 영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과의 악연이 시작 됩니다. 이이첨의 탄핵을 함께 도모하던 송시열은 유배 후 돌아와 그 공을 인정받았으나 고산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주에 의하여 벌인 일이라며 그를 깍아 내리기까지 합니다. 서인들은 반정의 명목을 위하여 남인에서도 인재를 등용하자며 고산을 불러 들였으나, 그들의 술수를 느낀 고산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해남으로 내려갑니다.

 

그러던 인조6(1628), 인조의 사돈인 우의정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1638)’의 추대로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 =조선17대왕 효종)’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스승이 됩니다. 그러나 악연이었던 송시열도 두 대군의 스승이 되었지요. 당시 두 대군을 견제하던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측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강직한 성품의 고산선생을 세자에게 이롭지 못한 스승이라며 모함하자 이들과 부대끼며 벼슬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인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버리고 다시 해남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인조14(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고산은 왕을 보필하고자 강화로 향하였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뱃머리를 돌립니다. 그러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화의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은거를 결심하여 뱃길을 제주도로 향합니다.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풍랑을 만나 작은 섬 보길도에 닿았는데,

섬의 수려한 산세에 마음을 빼앗긴 고산은 보길도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며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붕당은 그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인조16(1638) 인조의 피난지 근처에 있었으면서도 왕을 보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인들에게 탄핵 되어 경북 영덕으로 유배를 당하였고, 이후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거금도로 들어가 야인생활을 합니다.

거금도를 금쇄동(今鎖洞)’이라 하며 그곳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짓게 됩니다.

 

 

 

낙서 윤덕희의 작품들

 

 

그러던 인조25(1649),

인조가 승하하자 슬퍼하지도 않으며 칩거한다하여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습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한때 스승이었던 고산을 조정으로 불렀으나 거듭 사양하며 시문과 글을 가르치며 지내다가 효종의 거듭된 부름에 조정에 들어갔으나 시무팔조(時務八條)’등을 건의하면서 다시 탄핵을 받았고, 이에 더욱 깊이 은거하게 됩니다.

 

그러던 효종10(1659),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문제와 함께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대두된 1차예송논쟁이 일어났으며 송시열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1660년 함경남도 삼수로 유배되었고, 1665년에는 전남 광양으로 유배가 됩니다. 그로부터 2년 뒤 현종은 고산을 석방하라 하였고 80세가 되어서야 정치적 망명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종12(1671), 보길도 낙서재(樂書齎)’에서 향년 84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치열한 당쟁속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내면서 수많은 시가를 지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사학자들에게서는 단지 유배생활의 적적함을 승화시킨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암튼 정조15년에 왕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산중신곡(山中新曲)’18,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2,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40, ‘몽천요(夢天謠)’5, ‘우후요(雨後謠)’ 1등은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고 윤용의 작품들

 

 

앞서 말씀드린대로 녹우단은 해남윤씨 어초은공파의 역사를 간직한 곳입니다. 고산선생과 함께 화가로서 이름을 알린 3대가 있습니다.

고산선생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입니다.

공재 선생은 정치에 뜻을 두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산선생의 맏아들이자 공재선생의 할아버지 윤인미(尹仁美, 1607~1674)’가 병과급제 하였으나, 고산의 예송문제에 대한 연좌제가 적용되어 등용되지 못하고 13년의 금고형을 받았습니다. 훗날 남인이 집권하면서 사면되지만 곧 병사하였습니다. 고산의 사망 후 4년만의 일입니다. 이 때 공재선생의 나이 6세였음을 감안한다면 벼슬에는 애당초 관심이 멀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숙종19(169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계열로 당쟁이 심화 되던 시기였던 것도 이유가 되겠습니다. 45세 되던 해에 고향 해남으로 내려 왔으며, 48세 되던 해 겨울, 독감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사실상, 당쟁으로 인하여 귀양을 간 친형의 사망과 절친이 장희빈을 두둔하다 장형으로 맞아 죽음을 맞이한 것은 더 이상 벼슬에 미련을 두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학문과 시, , 화로 생애를 보내게 됩니다.

공재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인화가로서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과 함께 조선후기의 삼재(三齎)로 불리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 중기와 달리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바뀌면서 실사구시의 회귀를 알리며 진경산수화를 표방하였고, 실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생은 일반 백성들의 내면에 전해지는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18세기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10)’의 풍속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선생의 그림은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으나 그 중 인물화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림에 그려질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 정신이 전해지는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붓을 들어 정확한 묘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현미경으로 관찰을 해도 수염, 주름 하나까지 세밀하고 완벽하게 그려졌다는 자화상’, ‘노승도(老僧圖)’등이 있지요.

특히, 심득경초상화(心得經肖像畵)’는 학문을 하던 친구가 17108월에 요절을 하자 그해 11월에 생각만으로 그린 초상화로 가족들이 그 그림을 보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온 것 같다.’며 온 집안이 놀라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하지요. 또한 이전까지는 중국식의 말 그림 이었으나, 공재선생은 말 그림을 변화하여 팔준도(八駿圖)’, ‘백마도(白馬圖)’등 생기 넘치는 우리만의 그림으로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공재선생의 뛰어난 그림실력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게 되지요.

아들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1776)’는 글씨와 그림 모두에 능하였고, 특히 말 그림과 신선의 표현을 잘하여 부친 공재의 화풍을 충실히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손자 청고 윤용(靑皐 尹, 1708~1740)’은 그림에 대한 재능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기품 있으며, 술을 좋아하면서도 맑은 성격을 가졌다고 합니다. 집안의 화풍을 충실이 이어받아 섬세한 묘사로서 그림을 그렸는데 조카뻘인 다산 정약용선생이 전하기를 초충도(草蟲圖)’를 그릴 때 나비, 잠자리등의 미세한 부분을 상세히 살피고 난 이후에야 꼭 같은 모습을 그렸다고 전합니다. 산수화는 남종화풍(南宗畵風), 풍속화는 공재선생의 그림을 따르면서 집안의 그림화풍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하였으나, 33세의 나이로 요절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녹우단 내의 고산윤산도유물전시관에서는

우리나라 국문학의 대표적인 시인 고산선생과 그의 증손자 공재선생, 고손자 낙서선생, 5대손 청고선생까지 해남 연동에 터를 잡고 500여년을 이어 온 해남 윤씨 어초은 공파의 학문과 문학, 그림, 글씨등과 함께 사대부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특별전시실과 1, 2전시실, 영상관으로 이루어집니다.

1전시실은 어초은공파의 고문서와 서책들이 전시되어 당시 해남윤씨 집안을 둘러 볼 수 있으며, 2전시실은 고산선생과 공재선생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별전시실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박물관에서 자료를 협조 받아 낙서선생과 청고선생의 작품들을 한 곳에서 만나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20135월 현재)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

 

 

INFO..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0 (연동리 102-1) / 061-530-5548

관람시간 : 09:00~18:00

관람요금 : 성인 1,000, 소인 700

휴관일 : 11, 매주 월요일

가는길 :

 

 

글,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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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5.29 19:42

    첫댓글 해남 여행 가서도 가 보지못한곳입니다. 좋은 정보로 잘 보고갑니다. 감사^^*

  • 13.06.01 09:58

    먼길 해남 녹우당을 다녀오셨군요 좋은사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좋은건물 유물을 잘 보고갑니다 가서 유물은 제대로 보지 못한듯 합니다 좋은날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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