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권혁웅
그해 여름 정말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 멱을 따기 위해 우리에서 끌어낸 중돈이었다 어설프게 쳐낸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돼지는 우아하게 몸을 날렸다 자진하는 슬픔을 아는 돼지였다 사람들이 놀라서 칼을 든 채 달려들었으나 꼬리가 몸을 들어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일렁이는 물살을 위로하고 돼지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가을이 되어도 우물 속에는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그리고 돼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는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틀렸어. 저 퉁퉁 불은 얼굴 좀 봐 겨울이 가기 전에 사람들은 결국 입구를 돌과 흙으로 덮었다 삼겹살처럼 눈이 내리고 쌓이고 다시 내리면서 우물 있던 자리는 창백한 낯빛을 띠어갔다
칼들은 녹이 슬었고 식욕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어디에 우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봄이 되자 작고 노란 꽃들이 꿀꿀거리며 지천으로 피어났다 초록의 상(床)위에서, 지전을 먹은 듯 꽃들이 웃었다 숨어있던 우물이 선지 같은 냇물을 흘려보내는, 정말 봄이었다
죽음과 상처의 망각, 그리고 삶의 아이러니한 순환
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도살을 피하려 우물에 빠져 죽은 돼지의 비극적 사건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망각의 순환을 그려낸다. 우물 속 썩어가는 돼지의 시신은 시간이 흐르며 흙으로 덮이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폭력의 흔적인 칼은 녹슬고 비극은 잊혀지지만, 이듬해 봄 우물터 위로 아무렇지 않게 피어나는 ‘노란 꽃’과 ‘선지 같은 냇물’은 생명의 아이러니를 극명히 보여준다. 비극을 지우고 다시 돋아나는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삶이란 타자의 슬픔과 상처를 덮고 이어지는 잔인하도록 아늑한 순환임을 번뜩이는 감각으로 포착해낸 시다.禹
권혁웅 (權赫雄)
출생: 1967년 충청북도 충주
학력: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 졸업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199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시 당선
주요 경력: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주요 문학지 편집위원 역임.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미래파’ 담론을 주도한 대표적 시인이자 평론가.
주요 시집
《황금나무 아래서》, 《마징가 계보학》,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소문들》,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등
주요 수상: 현대시 동인상, 한국시인협회상 젊은시인상, 미당문학상, 이상화시인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