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클로드는 “콜베르 집안이 어떤 정보도 넘기지 않아 프랑스 재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을 정도입니다. 회계는 권력이었고, 절대로 양도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지요. 콜베르라는 개인의 죽음은, 프랑스 재정의 죽음과도 같았습니다. 시스템으로 움직이지 않는 국가는 모래 위에 지어진 성이었습니다.
고삐 뿔린 말이 되어버린 루이14세
“짐은 유럽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
콜베르라는 고삐가 사라지자, 태양왕의 야심은 더욱 더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서 부르봉 왕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점점 성장하는 개신교 국가들을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루이14세는 독실한 가톨릭이기 때문이었지요. 퐁텐블로 칙령을 통해 국내 개신교 박해를 공식화하기도 했습니다.
네덜란드·영국·합스부르크 제국은 이에 맞서 동맹을 결성합니다. 유럽의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루이14세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9년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은 승패 없이 지지부진. 막대한 빚만 남았습니다. 스페인 제국의 황제 카를로스 2세가 후계 없이 죽으면서 이를 둘러싼 전쟁이 또 다시 이어집니다. 결국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지만 치러야 할 비용은 너무나 컸습니다.
프랑스의 국력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이뤄진 개신교 박해로 프랑스를 떠난 사람들이 90만명에 달했습니다.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프랑스 경제의 윤활유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콜베르는 생전에 종교 탄압에 반대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콜베르의 죽음 이후 프랑스가 경제보다 정치를 우선시하면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켜켜이 쌓인 재정적 부담은 결국 프랑스를 무너뜨립니다.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터져 부르봉 왕조를 몰락시킵니다. ‘르 그랑 콜베르’가 죽은지 100년이 조금 지난 뒤였습니다.
여전히 유효한 콜베르의 경제학 정신
오늘날 경제학의 관점에서 ‘콜베르주의’는 조악한 구석이 많습니다. 자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나친 국가적 개입이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외국 수입을 제한하면서 자국 소비자 이익을 해친 것도 단점으로 지적됩니다.
콜베르의 정신은 그럼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튼튼한 국가 재정이 부국의 기본임을 입증해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은 열렬히 콜베르를 존경했습니다. “프랑스가 번영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위대한 콜베르’의 능력과 불굴의 노력 덕분이다.”
해밀턴 역시 콜베르처럼 중앙집권적인 재무시스템만이 부국의 기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국’ 미국의 기원에 콜베르의 정신이 녹아있던 셈입니다.
2024년 8월 대한민국과 가계 채무가 합계 3000조원을 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저는 콜베르를 떠올렸습니다. 재정의 튼튼함이 부국의 기본이라고 태양왕 앞에서도 설파하는 그의 모습을. 위대한 회계, 방만한 재정의 반대자는 번영의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네줄요약>
ㅇ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인 루이14세가 향락을 즐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튼튼한 국가 재정이 있었다.
ㅇ이 국가 재정을 설계한 이가 회계사 콜베르였다.
ㅇ콜베르는 ‘다르타냥’과 함께 국가 재정을 좀먹는 이들을 적발하고, 세금제도를 개편했다.
ㅇ콜베르가 사망한지 100년이 조금 지나서 부르봉 왕조는 방만한 국가 운영으로 무너졌다.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