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가을
김선중
오랫 만에 남산에 갔다. 십 수년전 포항제철에 근무차 있던 시절 가을 친구 몇과
두 번 남산에 갔었다. 안내하는 사람없이 불적을 보러 갔는데 좀처럼 우리에게 보
이질 않는다. 산을 한 참 올라 가서야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마애불. 보고 어
루만지며 좋아하니 물어 보기를 불교 신자냐고 “신라 사람을 만나니 좋아서 그러
지”옆의 친구가 대신 대답한다.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롭고 또한 그립다. 그 동안 나
는 한 것이 무엇이고 늘은 것이 무엇인가. 어쩌면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던 순수
한 마음만 이지러진 것은 아닐까. 그 때의 가을 바람을 되살리며 남산의 북쪽 기슭
에 내렸다.
경주 향토 사학자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이 먼저 도착한 곳이 남산리 사지. 두
탑이 동네 입구에 서 있어 우리 일행을 반긴다. 동네의 정원이 되어 사찰이 아닌
민가의 기와 지붕이 절 대신 둘레에 서 있다. 5미터 정도의 크지 않은 탑이 기와 집
과 잘 어울리고 있다. 뒤에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남산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남천
이 흐르는 전원 건너 편의 야트막한 마을의 앞 동산 신령스런 낭산이 보이고 무엇
하나 거스르는 게 없는 평화로운 마을. 옛 절은 다 쓰러지고 탑만이 서 있는데 마
을 앞의 정원에 저런 탑을 배치한다고 생각하면 그 값은 얼마일까. 도저히 셈이 되
지 않는다. 집 앞의 나무는 낙엽을 흩날리고 파란 하늘에 높은 구름 시원한 가을
바람에 상쾌하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서측 탑을 종이에 스케치 하였다. 면석
부처의 미소는 어눌한 내 솜씨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높다란 기단부 사면의 면석에
는 돋을 새김으로 두 분씩 여덟 분의 화불을 조각하였다. 가부좌한 모습은 안정되
어 있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교해 통일 신라의 조각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2단
의 기단위의 1층 탑신은 높고 2층 3층은 차례로 좁아져서 아름다운 비례를 하고 있
다. 석가탑과 같은 형식이면서도 조금 크기가 작고 개석 처마의 마지막 조금의 치켜
올림이 날렵하다.
삼국 시대의 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지만 이 탑들은 절의 마스코트라 할까 그 의미가
약간 달라진 것 같다. 통일 신라 후기부터 금당에는 부처님이 중심이 되어 모셔져
있고 탑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배치하며 금당과 조화를 이룬 것은 탑파 자체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기능에서 절마당의 행사시 경배의 대상으로 바뀐 게 아닌가
한다. 불상 얼굴의 어렴풋한 미소를 보며 그것을 만든 신라인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들
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측의 탑은 모전 탑의 형식을 딴 석재의 탑으로 장식없는
자체의 형식만으로도 훌륭한 조형이다. 안내자의 기단부 설명은 귀솟음에 의해 면석이
어긋나 있다고 하나 그것 보다는 구조의 안정성을 위한 맞춤형식으로 보였다.
큰 돌이 일체로 연결되어 있을 때는 지진이나 흔들림에 강하게 지탱 할 수 있다.
기단부의 부조가 추가되었다.
조용하고 흐르는 듯한 풍경을 감상하며 발 길을 서출지로 돌렸다. 삼국사기에 나
오는 내용은 남천 아래의 연못에 개구리가 삼일간 울어 선덕여왕이 말하기를 여근
곡에 적병이 있다하여 가보니 백제군이 매복하고 있어서 섬멸하였다는 기록이있다.
연못은 음이요 희니 서쪽이요 개구리는 양이니 여근곡에 적병이 있음을 직감했다고
하거니와 그것은 영특한 여왕이 외적 방어에 능하였음을 상징한다. 선덕여왕 시대
의 신라는 동쪽으로 왜와 서쪽으로는 백제의 공격으로 누란의 위기였고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던 때였다. 고구려는 진흥왕 때의 구토 반환을 요구하며 백제
와 연합하여 후환을 제거하려 시도한다. 고구려 외교의 실패 후 당에 원병을 청하
자 고구려와 일전을 계획하고 있던 당나라는 양쪽으로 전선을 펼칠 수 없어 태종
이세민은 신라의 용렬함을 핑계하며 여왕이 섭정하여 주위에서 얕보니 폐위하라는
권고와 엉뚱한 세가지 안을 제시한다. 이에 신라는 자장으로 하여금 황룡사 탑을
세우며 왕실의 위엄을 보이고 당과의 외교에 진력한다. 내부에서는 화백회의 의장
인 상대등이 당 태종의 폐위 권고를 빙자로 내란을 일으켜 김유신, 김춘추가 진압
을 한다. 진골인 김춘추가 화백회의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성골과 진골의 내환에서 승리한 김춘추는 김유신과 같이 권력을 공
고히 한다. 선덕여왕은 그 와중에 승하하여 낭산에 장사 지낸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시달렸는지. 삼국 시대의 유물은 황룡사 구층탑, 첨성대, 남산 삼존불, 남산
감실부처님등 선덕여왕 때의 것이 많다. 서출지 옆의 조그만 연못은 옛날부터 있었
다고 한다. 어느것이 사기에 나오는 연못인지는 불분명한 듯하다. 서출지는 연꽃 밭
이 되어 있다. 여름에 연꽃이 피면 햇 빛을 받아 꽃 잎을 오무린다고 한다. 차례로
잎 다무는 모습을 보며 차 한잔을 마시기에 제일 좋은 장소라는 설명이었다. 이 장
소에서 차 한 잔 마시고 연꽃과 낭산의 아침 햇살을 보며 옛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좋을까.
서출지를 보고 일행은 발 길을 감실 부처님이 있는 산자락으로 돌렸다. 대나무가
많은 곳에 축대가 있는 곳은 거의 옛 절터라 한다. 과연 대나무 있는 조그만 축대
를 지나자 바위의 감실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보게 되었다. 인정 많은 할머니 같
은 단아한 불상은 미소를 띠고 우리를 본다. 할머니 두 분이 지성을 드리고 있다.
옛 날 신라의 할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생각하는 희생적인
모성은 변함이 없다. 고졸한 미소라고 표현하는 향토 사학자의 말마따라 그 미소는
나를 사로 잡는다. 내적인 충만함에 의해 생기는 만족의 미소, 대중들의 고뇌를 쓰
다듬는 자비의 미소, 손자를 바라 보는 할머니의 흐뭇한 미소 같은 것이 아닐까. 온
전하게 보전되어 옛 날의 할머니가 살아 움직이는 듯. 감실에서 오랫동안 홀로 계
셨기에 사람의 손을 안타고 비바람에 깎이지 않고 미소가 보존된게 아닌가. 왕실
중심의 불교가 대중화 하면서 중생 제도를 우선하며 현실 도피의 출가 수행보다 재
가의 속인 생활로 마음과 행실이 청정하며 무애할 것을 저서인 “금강삼매경론”에서
강조한 당시의 원효 대사의 철학이 구현되어 그 분위기에 서민적인 부처님이 조성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 숲에서 부는 갈 바람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하는 소리
가 들리는 듯하다.
산을 내려온 일행은 마을의 길을 따라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을 맞으며 둘이 혹은
셋이서 걸으면서 이야기하며 어제까지의 번뇌를 덜어내고 있었다. 탑골 마애군상
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라인들은 남산에 불사를 하며 무엇을 이
루고자 했을까. 극락을 지상에 실현하려 한 것 인가. 서민들의 염원은 무엇이었을
까. 그 마음이 내게 와 닿는 듯 하다. 정말 마음의 고향 같이 편하고 좋은 곳이다.
1998.10.25
첫댓글 가의 속인 생활로 마음과 행실이 청정하며 무애할 것을 저서인 “금강삼매경론”에서
강조한 당시의 원효 대사의 철학이 구현되어 그 분위기에 서민적인 부처님이 조성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 숲에서 부는 갈 바람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하는 소리
가 들리는 듯하다.
산을 내려온 일행은 마을의 길을 따라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을 맞으며 둘이 혹은
셋이서 걸으면서 이야기하며 어제까지의 번뇌를 덜어내고 있었다. 탑골 마애군상
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라인들은 남산에 불사를 하며 무엇을 이
루고자 했을까. 극락을 지상에 실현하려 한 것 인가. 서민들의 염원은 무엇이었을
까. 그 마음이 내게 와 닿는 듯 하다. 정말 마음의 고향 같이 편하고 좋은 곳이다.
일행은 마을의 길을 따라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을 맞으며 둘이 혹은 셋이서 걸으면서 이야기하며 어제까지의 번뇌를 덜어내고 있었다. 탑골 마애군상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신라인들은 남산에 불사를 하며 무엇을 이루고자 했을까. 극락을 지상에 실현하려 한 것 인가. 서민들의 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 마음이 내게 와 닿는 듯 하다. 정말 마음의 고향 같이 편하고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