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말의 이야기니 좀 지났지만, 신칸센이 얼마나 복잡한 상황에서 건설되는지 잘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5년전에 제가 쓴 글을 읽으시면 상황이 더 잘 이해되실지도 모르겠군요. 지도도 있습니다.
http://cafe.daum.net/kicha/ANp/2097
가장 늦게 착공된 정비신칸센이자, 일본 최초의 가변 궤간 열차(프리게이지 트레인)가 운행할 예정인 큐슈신칸센 나가사키 루트. 또는 니시큐슈(서 큐슈) 루트는 복잡한 이름 만큼이나 복잡한 사정을 가진 노선입니다.
물론 SOC사업에 있어 중앙정부, 지역, 건설기업들의 이권이 끈끈하게 뒤얽혀 있는 일본의 사정상 신칸센 건설이 복잡하지 않았던 적이 있기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구간은 특히 복잡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노선은 기개통된 큐슈 신칸센 카고시마 루트의 신토스역에서 분기해 나가사키에 이르는 143km 정도의 노선입니다. 70년대에 정비신칸센으로 지정되었지만,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노선이나 운행방식, 건설방식, 심지어는 신칸센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조차 합의를 보지 못하던 복잡한 노선이었죠.
대표적인 갈등 관계는 신칸센이 지나는 두 지방자치단체인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사이에 있었습니다.
신칸센 건설로 수혜를 보는 입장인 나가사키현은 물론 찬성이었지만, 사가현은 신칸센 자체가 필요없다는 입장이었거든요. 큐슈의 중심인 후쿠오카시(하카타)에서 가까운 사가현으로서는 신칸센이 건설되면 건설 분담금은 분담금대로, 운임은 운임대로 오르는데 워낙 후쿠오카와 거리가 가깝다보니 시간 단축 효과는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현 간의 논쟁 뿐 아니라, 노선이 지나는 시. 정. 촌들도 각자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도 그럴게 신칸센이 개통되면 JR에서 기존 노선을 잘라내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래서 2009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합의가 끝나 첫구간이 착공되었습니다.
다만 온갖 정치질의 폐해로 철도매니아들이 뒷목을 잡을만큼 기괴한 노선으로 결정되었는데요.
하카타~신토스 26km : 카고시마 루트 공용(신칸센 규격, 표준궤)
신토스~사가~히젠야마구치~타케오온천 51km : 나가사키 본선, 사세보선(단선) 공용(재래선, 협궤)
타케오온천~이사하야 45km : 신설(신칸센 규격, 협궤)
이사하야~나가사키 21km : 나가사키 본선 공용(재래선, 협궤)
그야말로 협궤와 표준궤, 신칸센 규격 신선과 재래선, 심지어 일부 공용 구간은 단선이기까지 한 짬뽕노선입니다.
특히 '신칸센 규격의 협궤'란건 '슈퍼 특급'이라고 해서, 신칸센 규격으로 건설은 하는데 협궤라는 애매한 등급입니다.
지금까지 신칸센 건설 논의 때 마다 떡밥 뿌리기 용으로 제기된 적은 있지만, 실제로 건설된 적은 없는 등급으로 '풀 규격' 신칸센에 비해 건설비는 조금 적게 들어가지만 그래봤자 협궤라 속도가 나오지 않는데다 정작 신칸센이 직통할 수 없는 이상한 등급이죠.
다만, 이번에는 표준궤와 협궤 양쪽에 대응 가능한 프리게이지 트레인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이 '슈퍼 특급' 방식으로 공사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이 구간에서 상정된 최고 속도는 200km/h.
개통시 운행 형태는 최고속도 300km/h의 프리게이지 트레인이 하카타에서 신토스까지 표준궤 신칸센으로 주행하다가 신토스역에서 궤간 변경(3분 정도 걸립니다), 재래선을 달리다가(재래선은 잘해야 130km/h가 한계입니다) 타케오온천에서 이사하야까지는 슈퍼 특급 노선이므로 최고속도를 200km/h로 올려서 달리고, 다시 이사하야에서 나가사키까지는 재래선을 이용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하카타 이북으로는 산요 신칸센과의 직결도 생각해 뒀습니다.
아무리 봐도 정치인들만 좋아할 것 같은 복잡한 계획이었죠.
반대파에서는 이것 저것 고려하면 결국 재래선 특급보다 나을게 없다고 항의 했습니다. 하지만 찬성파에서는 산요신칸센과 직통이 가능한 것도 크다면서 무시했죠.
그런데 작년 4월에 이 프리게이지 트레인이 사실 협궤에서 130km/h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지 테스트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착공 당시 비용 대비 효율 계산을 할 때는 투입되는 프리게이지 트레인의 제원을 최고 300km/h, 협궤에서 200km/h까지 낼 수 있는 것으로 잡았었는데, 실제로는 270km/h - 130km/h이 목표 였다는거죠.
계산 다시해라.
상관없다.
상관없다면서 왜 공개를 안 하냐. 같은 왠지 익숙한 말싸움이 이어진건 물론입니다.
결국 작년 12월 말. 슈퍼 특급 방식으로 건설되던 타케오온천~이사하야 구간이 표준궤 신칸센, 그러니까 '풀 규격' 신칸센으로 건설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추가로 이사하야~나가사키 구간도 '풀 규격' 신칸센으로 건설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절반 이상의 구간에서 고속을 낼 수 있게 된 거죠. 그리고 단선 구간인 사세보선의 복선화도 결정되었습니다(여기에 또 고가화를 외치는 마을도 있다는 건 넘어가도록 하죠ㅡ_ㅡ).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카타~신토스 26km : 카고시마 루트 공용(신칸센 규격, 표준궤)
신토스~사가~히젠야마구치~타케오온천 51km : 나가사키 본선, 사세보선 공용(재래선, 협궤, 사세보선 복선화)
타케오온천~이사하야 45km : 신설(신칸센 규격, 표준궤)
이사하야~나가사키 : 신설(신칸센 규격, 표준궤)
하지만 이렇게 되고보니 표준궤 - 협궤였던 운행구간이 표준궤 - 협궤 - 표준궤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잖아도 소요시간으로나 기술적으로 부담이 큰 궤간 변경을 두 번이나 하게 된 거죠.
나가사키현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장 행복한 상황은 나머지 구간도 전부 풀 규격으로 건설하여 가격도 비싸고(10% 정도) 기술도 검증되지 않은 프리게이지 트레인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소요시간도 훨씬 줄겠지요. 하지만 신토스~타케오온천 간의 협궤 구간은 전부 사가현 구간이고, 애당초 신칸센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던 사가현 입장에서는 풀 규격 신칸센 신설에 따르는 비용 분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완공 목표는 2022년. 그 때까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우리나라가 개념있게 보이네요 (완전 막장...)
우리나라도 각종 민원이나 이해관계자들 간의 알력으로 계획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건 일본이 원조입니다. 워낙 지방들의 자치성이 강한 탓도 있고... 역시 근본적으로는 만악의 근원인 협궤 탓이 크죠(...)
사세보선 공용구간을 복선화 할거면 차라리 표준궤 재래선 규격으로 쌍단선을 설치하는게 바람직해 보이네요.
그나저나 지하화 요구 안하니 다행이군요(...).
협궤 주행구간은 좀 길어지겠지만 어차피 협궤도 달려야 하는 상황이니 그냥 복선화가 나은게 맞습니다. 궤간이 다른 쌍단선보다야 복선이 좋지요. 지하화는... 뭐. 어차피 그 동네가 별로 큰 동네도 아니고...
프리게이지 동차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득일...줄 알았는데 지도로 보니 나가사키본선은 이미 복선이라 건드릴게 없다는게 문제군요.
아니면 좀 험악한 발상으로, 토스 이서를 전부 표준궤화 하고 야마가타 신칸센처럼 굴린다거나(...). 후쿠오카쪽은 니시테츠하고 공용하면 해결되니 말이죠.
프리게이지 트레인이 차량 비용은 비싸도 개궤 비용보다는 싸다는 결론일 수도 있을 것이고, 나가사키 루트에는 처음부터 미니 신칸센이 고려 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을것 같군요. 그러고보면 미니 신칸센 방식은 도입된지는 오래됐는데, 아직도 JR동일본에서만 사용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죠.
위키에 뜨는 카더라로는 미니신칸센 계획이 있었는데 어른들의 사정으로 취소되었다네요. 프리게이지 차량이 성공하거나 하면 수출모델이 될 수도 있고 해서인가, 아무튼 그런가봅니다.
프리게이지랑 미니신칸센이랑 다른 건가요???
네. 다릅니다.
프리게이지라는 말 자체는 표준궤/협궤 구간을 모두 달릴 수 있는 '열차' 를 말하는 것이고, 프리게이지 구간 이라고 할 때는 통상적으로는 이번에 시도되는 협궤 신칸센 구간을 말합니다.
하지만 미니신칸센은 협궤 노선을 개궤해 신칸센의 직통운전이 가능하게 만든 만든 표준궤 '노선' 을 말합니다. 미니신칸센은 궤간이 표준궤일 뿐 나머지 규격은 재래선과 비슷해 최고속도 향상은 크지 않습니다.
재래선과 고속선의 궤간이 다르니 결국 저고생을 하네요... 우리나라의 전노선 표준궤가 상당히 크다는게 느껴집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도주제 이야기가 있어도 현재의 도도부현제가 폐지될 것 같다는 생각은 영 안드는게... 일본이니까요. ㅡ_ㅡ
우리나라에서 시도제 폐지 후 전국을 수십개의 시로 나눈다는 의견은 민주당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에서도 나왔었습니다. 여야의 의견이 맞는 셈이지요. 물론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난리가 날 것인데, 이걸 공론화하고 조율하는건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심각한 논의로는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여야 모두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지만 일을 벌릴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인 헌법 개정 문제와도 비슷하지요.
우리나라의 표준궤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ㅎ
아주 다행인거죠.
일본이 협궤를 극복하기 위해 싸워온 역사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결과가 좋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각 지자체의 의견을 모두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참 흥미롭네요. 우리나라는 통합 아니면 건설을 아예 안한다는 식으로 나갔을 것 같은데, 저쪽은 타협된 안이 차악만되도 그걸 존중하는 느낌입니다. 지난번부터 구민님의 글을 읽으면서 일본은 지자체의 본연 의미를 잘 알고있고 서로의 힘이 균형있게 분포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건 그게 좀 극대화 돼서 부작용을 낳은 케이스 같지만.
지난 수백년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 하에 있다가 20여년 전에야 지방자치를 시작한 우리와, 19세기 메이지 유신 때 까지 지방 봉신들이 남아있었고,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지방의 힘이 강했던 일본은 차이가 크지요. 물론 요즘들어서는 일본도 지방의 인구와 경제력이 토쿄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상황이 안 좋아지고는 있다지만요...
힘이 강한만큼 의무도 많고, 지역 간 협력이나 효율성 문제도 있고 해서 부작용이 많지만, 모든 지방이 수도권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는 우리나라 상황보다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3선(표준궤+협궤) 궤도를 설치하고 플랫폼을 조금씩 깎아서 규격을 늘려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이네요. 3선 궤도는 이미 일본에서도 몇번 실적이 있고, 규격을 늘려놓는 공사도 오리엔트 특급이 일본 방문했을 때 해본 적이 있으니 그닥 낯선 공사는 아니지요.
물론 유지보수에 돈이 들겠지만 그건 궤간가변차량, 미니신칸센 건설과 차량도입도 마찬가지이고 차라리 초기투자비용은 좀 들어도 이렇게 하면 전압이랑 신호문제 외에는 신경 쓸 일이 없죠.
이미 몇몇 분들은 아시겠지만 일본도 20세기 초에 궤간을 어떻게 정할지를 놓고 논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협궤로 부설된 국철(및 매수 노선)을 모두 표준궤로 뜯어고칠지 그냥 협궤로 밀고 나갈지 설전을 벌였는데 결국 협궤를 유지하자는 쪽이 승리했고 그 부작용이 지금까지 악영향을 미치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