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9시가 넘은 시간 휴대폰이 울린다. 찍힌 번호를
보니 집을 떠나 있는 큰딸이다.
내심 딸들하고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새부터인가 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만 문자를 주고 엄마한테만 전화를 한다.
그래서 큰딸의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아내로부터 들어야 한다.
그런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 것이다.
요것이 언제부터 엄마한테 찰싹 붙었나 살짝 서운한 감정이 있었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더 과장되게 활달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저녁시간이 훨씬 지나 있어서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본다.
몇 마디의 의례적이 대화가 오간 끝에 큰딸이 본론을 꺼낸다.
'아빠, 엄마 사탕 줬어요?'
그럼 그렇지 지가 따로 안부 전화를 할 리가 없지.
사실 큰딸이나 둘째 딸로부터 소외당한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어서
그다지 섭섭한 것도 없지만 짐짓 섭섭한 척 해본다.
'그렇지, 니가 나한테 전화할 리가 있나. 엄마도 있는데' 했더니
아빠, 그게 아니고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전화 안 해서 섭섭했어' 하면서 크게 막 웃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한참 웃고 나더니 '그럼, 푸름이도 안 줬어' 하고 또 물어본다.
이 자식 좀 봐라, 내가 지보다 동생인 둘째딸을 쪼매 편애하기는 했어도
아내도 안 챙긴 사탕을 둘째라고 뒤로 사탕을 줄 리가 있나
생각을 하다가 어제가 이른바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준다는
'화이트데이'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부러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의식적으로 기억을 안한 것도
죄라면 죄이겠지.
하기사 내가 무슨 기념일 무슨 날을 언제 세세히 챙겼던가.
아내 생일 날 외식과 삼페인과 케익은 물론이고 꽃다발 한 번 해 본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큰딸이 집에 있었다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 엄마 동생들 생일은 물론이고 가기 생일이 내일
이라면 전날부터 노래를 부르고 미리부터 운을 떼어놓는 큰딸이다.
그런 큰딸이 전화를 한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달 14일, 여자가 남자에게 초코렛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는 '발렌타인데이' 날
집안의 세 여자들로부터 쵸코렛을 잔뜩? 선물을 받았다.
내가 어떤 맛 어떤 취향의 쵸코렛을 좋아하는 것까지 알고
쵸코렛 틀까지 사다가 녹여서 예쁜 하트모양으로 다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 쵸코렛은 내가 하나 먹을 때,
먹성 좋은 중학교 일 학년인 막내아들이 한 주먹씩 슬쩍슬쩍 가져가 금새 다
없어지고 말았지만.
그러나 나는 지금도 생각이 좀 고루한가보다. 아니면 세태의 적응이 느린가.
그놈의 무슨 '데이 데이' 하는 날들이 당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구적인 풍습인데다 얄팍한 상혼까지 덧칠해져서 너도 하면 나도 무리를 해서라도
해야 한다는 영어과외 열풍처럼 사회현상의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싫었다.
침실의 역사에서 가장 이색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가 바로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하기 위해 생겨난 정조대라고 하는데,
옛날 로마시대 정조관념이 사회적으로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장사를 위해 전쟁을 위해 먼길을 떠나야 했던 상인과 십자군들은 아내와 연인을
고향에 두고 멀리 떠나 있는 것이 늘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장기간 집을 비운 사이 자신의 연인이나 아내가 바람을 피우지나 않을까
혹시, 정조를 유린당하지 않을까 방안을 찾다가
고안한 것이 튼튼한 가죽이나 쇠붙이로 만든 정조대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약삭빠른 상혼이 달라붙어 정조대의 확산과 더불어 그것을 여는
사업도 번창을 했다고 한다.
마치 창과 방패처럼 한쪽으로는 채워서 돈을 벌고
뒤로는 또 열어주면서 또 돈을 벌고
남자와 여자의 중간 사이에서 상인은 왼쪽 오른쪽 고개를 돌려 돈을 벌은 것이다.
그러나 어디 상인들 탓할 수 있으랴.
장사의 원리란 공급이 있어 수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요가 있으니 공급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농사도 하우스로 짓고
전자제품의 발달로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와 육류를 저장 해놓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통조림의 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을 보면은, 그 옛날 냉장기술이 발달되기 전의
선원들은 장기간 항해로 인해 걸핏하면 괴질에 걸렸다고 한다.
19C초 프랑스의 아펠이라는 사람이 간편하고 장기간 저장하면서도 신선도가
떨어지지 않는 보관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당시 오랜 전란 때문에 식량사정이 좋지 못한데다
보관마저 어려워 어려움을 겪고 있던 나폴레옹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썩지 않고
맛도 변하지 않으면서 운반도 편리한 식품저장법을 공모하였다.
여기에 아펠의 아이디어가 뽑히게 되었고 지금의 통조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통조림의 유래처럼, 주전자에 물이 넘치는 것을 안 넘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주전자 뚜껑에 구멍을 뚫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전쟁이 목적이든 돈벌이가 목적이든 이 세상 모두는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을 떠나서 주고받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면
그 작은 뜻에서 큰 의미를 찾아야지
살기도 팍팍한데 수시 때때로 있는 데이는 뭐고 기념일은 또 뭐란 말인가
하면서, 약은 상인들의 상술에 속절없이 넘어가는 사람들을
못 마땅해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산을 다녀도 바위 길은 영 자신이 없는 초보 산꾼이고 운전면허증 땄는지 20년이
다 되어도 차를 몰고 거리에 나가면
우회전 좌회전을 잘못해 골목길을 빙빙 돌며 우왕좌왕하는 만년 운전초보인 것처럼
어디서나 빨리 적응을 잘 못한다.
무슨 문제에 기민하게 대처를 못하고 세상을 사는 방법과 요령을 빨리 터득하지
못한 채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달려나가는 내게 있어 세상은
사는 것도 언제나 초보이다.
그 초보가 어느 덧 5학년,
돌아보면 어눌하게 살아온 세월인데 그 어눌한 세월 속에서도 절로 얻어지는 것도
조금씩은 있는 모양이다.
학년이 높아지다 보니 세월이 조금씩 길을 들이는지
그 5학년이 되어서야 조금씩 세태에 젖어들며 세월의 모양도 알아가고
세상과 조금씩 손을 잡으려고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 기특하기도 하다.
그래,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처럼 세상은 서로 좋은 게 다 좋은 거 아닌가.
무슨 데이 데이 날 고깝게 보지 말고
주어서도 기쁘고 받아서도 기쁜 날, 함께 달콤한 사탕과 쵸코렛을 먹으며
달콤한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달콤하지 않은가.
무슨 날 무슨 데이가 그 목적의 순수성이 없다고 해도
또한 그들이 있기에 스스로 고되게 만들어서 선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벌이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나도 이제는 발상의 전환을 해서 이렇게 한 번 해보려고 한다.
1월 14일은
올 한해 계획을 세워서 기록하는 날이고, 연인에게는 예쁜 다이어리나 수첩을 선물하는
다이어리 데이라고 하는데
다이어리 대신 아내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게 살가운 대화를 자주 나누고.
2월 14일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먼저 사랑(쵸코렛 주며)을 고백해도 흉이 되지 않는다는
발렌타인데이 날에는
아내나 딸이 쵸코렛을 선물하면 감사히 받을 것이며 혹,
묘령*의 다른 사람이 준다고 해도 그 순수성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3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코렛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며, 남자가 여자에게 꽃바구니와 사탕으로 사랑을 고백한다는
화이트 데이 날에는
짐짓 모른 체 하고 있다가 정말 아내를 위해 평생에 깜짝 놀랄 선물을 한 번 준비를 할 것이고.
4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썰렁하게 보낸, 연인이 없는 사람들끼리 검은 복장을 하고 만나 짜장면을 먹는다는
블랙데이 날은
연인이 있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고.
5월 14일은
애인이 생긴 사람은 사랑의 장미꽃을 전하고 받는 날이고 애인사이라면 장미축제에 가는 날이라는 로즈데이 날에는
평소에 너무 화려해서 싫어하는 꽃이지만 아내가 좋아한다면 색색의 장미꽃을 다발로 묶어서 선물을 할 것이고.
6월 14일은
로즈데이에 붉은장미를 주고받은 연인들이 가슴 두근거리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입맞춤을 하는 날이라는 키스데이 날에는
다른 날보다 더 진한 키스를 하고.
7월 14일은
두 사람의 사랑에 변함이 없도록 똑같이 생긴 반짝이는 은반지를 끼면서 장래를 약속하는 날이라는 실버데이 날에는
실버반지가 아니라 골드반지를 선물해야 되겠죠.
8월 14일
나이트 클럽에 가서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연인이 좋아하는 곡을 녹음해서 테이프와 꽃다발을 함께 선물한다는 뮤직데이 날은
귀청 찢어지고 정신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나운 불빛이 정말 싫지만
아내가 가고 싶어한다면 서슴없이 따라가 안 돌아가는 엉덩이도 한 번 흔들어 주고.
9월 14일은
청명한 가을하늘아래서 연인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자신의 연인을 친구들이나 주변사람들에게 공식화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포토데이 날에는
바닷가로 가서 손잡고 사진도 찍고 회 한 접시에 소주 한잔도 쭈욱 들이키며.
10월 14일
와인잔을 기울이며 꽃과 와인의 향기로움 안에서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붉은 와인을 마시는 날이라는 와인데이 날에는
비싼 포도주가 아니더라도 분위기를 잡고 은은한 음악을 들으며 포도주를 한 잔 마시면 좋겠지요.
11월 14일은
사랑하는 연인과 손을 꼬옥 잡고 극장에 가서 행복한 마음으로 즐겁게 영화를 본다는
무비데이 날에는
영화 내용에 관계없이 가는 것만으로도 다 좋아하니 방안에서 비디오를 보지 말고
극장으로 가야겠지요.
12월 14일
무얼 어떻게 쓰든 남자가 여자에게 돈을 팍팍 쓰는 날이라는
머니데이 날에는
일년 내내 아껴두고 모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팍팍 써야겠지요.
그런데 과연 잘 지켜질거나 확신을 할 수가 없네요.
특히 여자에게 돈을 팍팍 써야 한다는 저 12월의 14일을 어찌할꺼나.
첫댓글 하이트데이날 같은 근무지내 사람들과 모임을 하면서 어그지로 사탕을 받아 냇답니다. 겉포장은 이쁘고 화려하지만 속 내용물은 맛이 없어서 못 먹게더라고요..
통아몬드 사탕이 맛있는데 그 걸 사달라고 하지 그랬나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