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접하면서 평소 이야기하고 싶던 부분이 있어 몇 자 적는다.
필자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덴마크를 세 번 방문하였다. 다만 저자와 다른 것은, 필자는 20년에 걸쳐 세 번을 방문하였다면, 저자는 1년이라는 단기간에 세 번을 방문한 것이랄까. 세 번의 덴마크 방문 중 1994년에 있은 첫 방문은 덴마크의 헬싱외르에 있는 한 회사로 직무 연수를 간 것이었고 나머지 두 번은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덴마크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던 필자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어릴 적, 안데르센에 빠졌던 사람이 첫 해외여행지가 우연하게도 덴마크였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라 할 것이다.
첫 방문 당시에는 덴마크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라곤 동화작가 안데르센과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농촌운동가 달가스와 낙농국가라는 점 외에는 크게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필자들을 연수(직무교육)한 회사에서는 우리들의 편의를 위하여 승용차 한 대를 렌트하여 주었다. 필자가 덴마크까지 우리나라 운전면허증을 소중히 모시고 간 덕택에, 그리고 렌터카회사에서 3개월 이내의 단기간 임시면허증을 발급해 주는 덴마크의 특이한 제도 덕택으로 필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첫 해외여행부터 차를 렌트하여 덴마크를 누비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민간회사인 렌터카회사에서 임시(한정)라 하더라도 운전면허증을 어떻게 발급해 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 답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여행은 그렇다 하고, 네 번의 해외여행 중 세 번이나 덴마크를 택한 것을 두고 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있는데 해외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도 아니고 한 나라만 세 번씩이나 간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끌리는 구석 밖에는. 어쩐지 덴마크를 방문하면 어머니의 가슴과도 같다. 첫 여행에서 이웃 나라인 독일도 며칠 다녀왔는데, 덴마크와는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너무나 달랐다.
덴마크를 처음 방문하기 전에 류달영(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요청으로 덴마크의 농촌계몽운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려다 실패한 사람)이 쓴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 거짓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류달영의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농촌부흥운동 당시, 미국에 가서 몇 백 명의 청중들을 모아놓고 강연한 일이 있는데, 강연을 끝내고 질의응답시간에 그들은 ‘한국에는 비행기가 몇 대냐, 자동차 대수가 얼마냐?’는 질문을 하였고 이에 ‘한국은 비행기도 몇 대 되지 않고 자동차도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는 명을 다할 때까지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문화와 풍습이 있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얼마 뒤 농촌부흥운동을 배우려고 덴마크를 찾아 강연하였는데 덴마크 사람들은 질문의 격부터 달랐다. 그들은 ‘한국에는 다른 나라와 다른 어떤 문화와 풍습이 있느냐?’는 질문에 신바람이 나서 미국에서 강연했던 효도문화를 들려줬더니, 모두들 손수건을 꺼내들고 ‘우리가 짐승이지 사람이냐?’면서 눈물을 훔치더라. 다른 사람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감동하는 사람들이 선진국민이다. 따라서 미국은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고 덴마크야말로 선진국 중 선진국이다.”
그런 덴마크가 여러 국제기구에서 수년간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와 ‘행복’ 연구자들이 ‘행복’에 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 중에서 리처드 레이어드가 정의한 ‘행복’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좋은 감정을 느끼고 삶을 사랑하며, 이런 감정이 지속되기를 원하는 것!”이라 한다. 아마도 대다수 덴마크 사람들에게는 이 말에 해당될 것이다.
필자가 렌터카를 이용하여 덴마크를 돌아다닌 가장 큰 소득으로는 우리와 다른 덴마크의 독특하고도 놀라운 문화를 몇 가지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시의 경험이 20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머리에 생생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것 중 두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자.
하나는 과속할 수 없도록 정책적으로 만든 도로와 교통신호다. 이를테면 다음 신호가 파란불임을 확인하고 과속하면, 그 지점에 도달할 즈음에 이르러 여지없이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다는 것과 직선으로 신호등 없이 1킬로미터 이상 뻗은 도로의 중간에는 S자로 굴곡을 주어 과속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두세 번 경험한 결과, 학습효과로 나타나 시내에서 과속하는 일은 반복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우리와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운전문화다. 그들은 야박하다 할 정도로 끼어들기에는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즉 끼어들기(양심불량)에는 관대와 포용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반면, 정당한 차선 변경은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까지 손으로 유도할 정도로 관대하였다. 우리의 운전문화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신호위반을 하였을 때에는 뒤따르는 차량이 경적을 울리며 쫓아와 자초지종을 묻는 등 그들의 높은 시민참여의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보름간의 첫 덴마크를 여행하고 귀국하여 일이 한동안 손에 잡히지 않은 정신적 충격에 휩싸인 것은 필자만의 경험일까?
그 뒤로 지금까지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에 관한 책이 나왔다 싶으면 구입하여 정독하는 습관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었다.
얼마 전에 읽은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도 그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은 제목부터가 도전적이다. 도전적인 만큼 “정말,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 앞선다. 덴마크를 세 번 다녀 온 필자도 수년 전부터 삶에 부딪치며 이런 의문을 제기해 왔다.
여기에서 잠시 행복의 반대지점에 있는 불행이라는 이야기를 상기하자. 1977년, 작가 조세희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빌려 절규한 대목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내놓은 지 38년이나 지난 지금이 오히려 그때보다 조세희가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한 말이 반세기가 다가도록 변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이 결코 진리가 되어서는 아니 되고 진리가 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누가? 우리 자신이다.
150년 전, 덴마크에서도 그랬다. 당시 프로이센 연합국에 맞서 싸우던 덴마크가 1864년에 항복하는 비운을 맞는다. 그로부터 50년 전인 1814년에도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할양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식민지를 돌려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1864년의 처절한 패배는 자국의 영토 일부를, 그것도 자국의 식량 절반 이상이나 공급하는 옥토를 내줘야 하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하는, 그야말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랬던 덴마크가 지금은 행복지수와 투명지수 1위를 고수하게 된 동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고 했던가? 철학자이면서 시인으로, 그리고 목회자이자 정치인으로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던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가 삼애정신을 들고 나와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덴마크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국민들과 함께 한 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당시 나라의 3분의1이라는 광대한 땅을 잃은 데다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해야 하는 난국 속에서 덴마크 사람들은 실의와 절망에 차 있었고 그 결과로 날마다 술과 도박으로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그야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나락에 빠졌던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실존주의 창시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을 일컬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지 않았던가? 150년 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행복지수 발표시점인 수년 전부터 세계 행복지수와 투명지수 1위에 오른 힘과 저력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그룬트비라는 사람에 의하여 절망이라는 질곡에서 희망으로 바꿔 놓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전 국민이 절망의 질곡에서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누비며 슬픔을 함께 나누며 희망을 불어넣은 결과인 것이다. 그룬트비가 국민들에게 설파한 삼애정신은 이렇다.
“덴마크 사람들이여, 우리나라는 과거에 비하여 국토는 터무니없이 작아졌지만, 나라가 크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가 세 가지를 실천하면 어떤 큰 나라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로 나라(땅)를 사랑하자. 마지막으로 백성(이웃)을 사랑하자.”
이에 덴마크는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개혁과 계몽운동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덴마크 사람들은 절망에서 희망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룬트비에 감명 받아 그룬트비의 뜻을 이룬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교육자인 콜(Kristen Mikkelsen Kold)이라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령으로 예편하여 농촌부흥운동가로 탈바꿈한 달가스(Enrico Mylius Dalgas)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은 덴마크의 교육과 농촌개척의 두 축을 이룬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개혁과 계몽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느냐이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 초반에 덴마크를 본 따 농촌 계몽운동을 하였지만, 실패하였음을 상기하자. 여기에서는 두 사례를 들었지만, 역사적으로 개혁의 성공과 실패의 요체는 아래로부터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인가에 달려있다. 개혁의 성공은 예외 없이 아래로부터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자발적인 동력을 이끄는 데 있어서는 힘이나 물리력이 아닌 참여 당사자의 자발적인 참여(힘)가 가장 크다는 것은 모든 역사에서 증명하고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정말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에 의문의 방점이 찍히는 것도 분명 사실이지만,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 있어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신뢰’를 얼마만큼 담보할 수 있는가, 또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특별히 ‘세월호’와 ‘메르스’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안을 흑백논리로 접근하려는 정치권력집단과 영혼 없는 관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극도로 높은 상황에서 ‘신뢰’를 말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에 이르렀음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필자가 내린 결론은 ‘우리 세대가 아니어도 좋지만, 적어도 행복할 수 있는 토대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힘들고 험난하더라도 우리 세대에 행복사회 건설을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저자의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더라도 저자가 희망하는 ‘행복사회건설’의 절절함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가 다른 덴마크(북유럽) 책과 다른 점은, 시종일관 긴장감이 감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현지인과 한 생생한 인터뷰를 통한 르포 형식을 빌려 입체적으로 서술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저자는 덴마크의 행복 조건으로 여섯 가지의 키워드로 덴마크의 행복사회를 압축 분석하고 제시한다. 적절한 분석이다.
「첫 번째의 키워드로 자유(스스로 선택하니 즐겁다)다.
두 번째의 키워드로 안정(사회가 나를 보호해 준다)이다.
세 번째의 키워드로 평등(남이 부럽지 않다)이다.
네 번째의 키워드로 신뢰(세금이 아깝지 않다)다.
다섯 번째의 키워드로 이웃(의지할 수 있는 동네 친구가 있다)이다.
여섯 번째의 키워드로 환경(35%의 직장인이 자전거로 출퇴근한다)이다.」
저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의 키워드 중 어느 부문 한두 가지만으로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즉 저자가 말하는 여섯 가지의 키워드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결코 행복지수가 높아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웅변하고 있다.
이를테면 다섯 번째까지의 요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여섯 번째 키워드인 환경을 지키려는 시민의식이 낮거나 정부의 환경 정책이 소극적이어서 환경오염이 많거나 자신이 사는 지역의 환경이 열악할 때 행복지수는 높지 않을 것이다. 즉 오염된 공기에서는 건강을 염려하게 되고, 이는 곧 행복지수를 낮추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환경’은 정부의 높은 다양한 환경 및 자전거 정책과 함께 환경을 지키고 개선하려는 수준 높은 시민의식이 톱니바퀴처럼 물린 결과라 할 것이다. 시민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싶어도 정부의 환경저감 정책과 자전거 정책이 없거나 느슨하다면,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현재 우리의 환경이 그렇지 아니한가. 다시 말하면, 저자가 제시한 덴마크의 높은 행복지수의 여섯 가지 키워드는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가지가 서로 맞물려 있는 상호 작용의 결과라 하겠다.
우리 사회는 높은 행복지수의 전제로 높은 국민소득으로 보는 다소 왜곡된 경향이 있다. 물질만능주의의 소산이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상대방을 배려하는 훈훈한 새해 인사인 양 “부자 되세요!”라는 천박한 말이 유행어가 된 시기도 있었다.
물론 덴마크가 국민소득으로도 상위에 속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1인당국민소득이 덴마크보다 두 배 이상인 룩셈부르크나 카타르가 행복지수 상위에 속하지 않는 것은 소득과 행복지수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북유럽 국가이자 복지에서도 큰 차이가 없는, 국민소득으로는 덴마크의 두 배에 달하는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행복지수보다 낮은 것은 행복지수가 소득이나 복지정책과도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덴마크가 유별나게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로, 필자는 저자가 세 번째로 제시한 ‘평등’ 문화와 네 번째 키워드인 ‘높은 신뢰’를 들고 싶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의 평등문화는 제도이기 이전에 역사와 문화로 정착되어 있다. 그 연유는 바이킹에서 비롯된다. 바이킹이 배로 이동하여 주변국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풍파를 만나면 일원 중 한 명을 바다에 제물로 바쳤는데, 제물은 제비뽑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제비뽑기에는 선장도 예외가 없었다고 하니, 그들의 평등문화가 오래 전부터 민중 속으로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북유럽의 모든 나라가 행복지수 상위에 있는 것은 제도와 더불어 평등문화가 정착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같은 북유럽 국가면서 덴마크의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가 세 번을 방문하여 경험한 덴마크의 고유한 특성을 몇 가지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 이유를 대신하자.
덴마크가 북유럽의 다른 나라와 가장 크게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필자는 무한한 신뢰라 생각한다. 필자가 2년 전에 방문하였던 노르웨이와 스웨덴도 ‘신뢰’적인 측면에서는 덴마크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덴마크가 북유럽 국가 중에 다른 나라와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거리에서 감시카메라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과속이나 신호위반 같은 단속카메라를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저서에도 소개된 바 있는, 현지에서 20년 동안 거주하고 있는 오대환 목사에게서 들은 바로는 1년 내내 음주운전 단속은 전혀 하지도 않고 주차단속 또한 거의 없다고 한다. 반면, 이웃나라의 수도인 오슬로와 스톡홀름은 요소요소마다 과속(신호위반)카메라가 도사리고 있어 운전할 때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이 필자의 실제 경험이다.
덴마크의 신뢰도는 전철역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전철역에서 오슬로와 스톡홀름에는 있고 코펜하겐에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출입 게이트’다. 그렇다면 과거처럼 전철역에서 사람이 직접 표를 받을까? 아니다. 승객이 양심껏 승차티켓을 끊어 탑승한다. 그걸로 끝이다. 오대환 목사의 말을 빌리면 전철 안에서도 승차티켓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도 자신이 덴마크에서 직접 경험하고 느낀 신뢰도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나는 우유나 치즈, 버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많이 먹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입에 당기지 않아서 빵을 먹을 때도 버터를 바르지 않는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우유가 과연 인간에게 이로운가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을 보면서 유제품과 더욱 멀어졌다.
그런데 덴마크에서는 달랐다. 우유를 한 잔 쪽 들이켜면 신선하고 맛이 좋았다. 왠지 신뢰감이 느껴졌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덴마크 농부들은 소를 키우고 젖을 짜고 그것을 식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기본을 잘 지킬 것 같은 믿음이 갔다.」
이 대목에서 필자도 한 가지 곁들이자면, 필자는 ‘화학물질과민반응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체질로 한국에서 생산되는 햄이나 쏘시지, 믹스 커피 등 인스턴트제품을 먹지 못한다. 인스턴트 제품을 먹으면 두드러기로 잠자리를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마크에서는 햄, 쏘시지, 과자 등을 몇 차례나 먹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필자가 10년 주기로 세 번의 덴마크 여행 중 변화를 발견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수시로 바뀌는 골목길 상점도 덴마크에서는 20년 전 그대로였는데 유독 바뀐 것은 자전거에 부속된 자물쇠였다. 즉 첫 방문 당시인 1994년에는 자전거에 채워져 있는 자물쇠를 발견할 수 없었던 반면, 10년 후인 2005년에는 자물쇠를 채운 자전거가 절반 정도 눈에 들어오더니 2013년에는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자전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20여 년 전에는 해외여행도 많이 하지 않았을 뿐더러, 더구나 물가가 가장 높은 북유럽 여행은 경제적 한계로 후진국 사람들의 북유럽 여행은 그야말로 꿈의 세계였다. 그 후, 차츰 후진국의 소득 증가와 함께 현재 북유럽은 동유럽과 아시아 여행객들로 붐빈다. 답은 여기에 있었다. 해외여행객들이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가 다른 곳에 옮겨 놓는다는 것이다. 일부 몰지각한 해외여행객들로 인하여 그들의 신뢰사회가 서서히 무너질까 은근히 걱정도 됐지만, 그래도 내국인들 사이의 신뢰도는 과거와 다름없다고 하니 안도감이 든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의 키워드인 공동체 정신(연대의식)은 저절로 굴러 들어온 것일까? 필자는 공동체 정신의 전제가 신뢰(믿음)가 아닐까 한다. 믿지 않은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설령 배려한다 하더라도 그저 시늉에 그칠 것이다. 진정한 배려는 상호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덴마크뿐만 아니라 북유럽 모든 국가의 높은 복지는 공통적인 반면, 덴마크는 다른 북유럽 국가보다 유별나게 높은 신뢰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라 하겠다. 결국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은 평등, 복지와 함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정신이 아닐까?
덴마크의 신뢰지수를 더욱 높이는 데 공헌한 건 노사관계다. 아니, 이를 바꾸어 말하면 신뢰지수가 높기 때문에 노사 간에 대타협이 쉽게 이뤄졌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스웨덴의 샬트셰바덴 노사협약을 노사대타협의 모범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1899년의 덴마크 노사대타협은 샬트셰바덴 협약보다 거의 40년 전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샬트셰바덴 협약은 덴마크의 사례를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노사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를 인정할 때 신뢰가 형성된다는 것을 필자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필자는 10년 전에 75%의 노조 가입률을 자랑하는 노조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필자는 적어도 기업노조가 아닌 공공노조에서만큼은 노사관계의 모범국인 북유럽 스타일의 노사관계가 실현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필자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사전에 약속되었던 일들이 행사 당일에 통보되거나 때로는 통보도 없이 아예 무시되는 사례를 수차례 겪는 기만을 당하면서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신사적인, 그리고 상호 신뢰의 노사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호수를 발견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신뢰의 바탕 없이 건강한 노사관계는 참으로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세 번의 렌터카로 덴마크를 돌아다니며 필자는 위에 소개한 내용 외에 인상 깊은 소중한 문화를 경험하였다.
두 가지만 더 소개하기로 하자.
두 번째 여행의 오덴세에서의 일이다. 오덴세의 안데르센박물관을 방문하고 난 후 민속야외박물관인 Den fynske Landsby로 이동하다가 방향을 잃어 옆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택시 기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는 뭐라 설명을 하다가 잘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직감하였던지, 잠시 후 “나를 따라 오라!”며 차를 앞세우지 않는가? 뒤따라가기를 10분 정도 지났을까, 필자의 배우자가 “꽤나 멀리 온 것 같은데 이러다가 택시요금을 바가지 씌우는 거 아니냐?”며 지레짐작으로 겁을 먹는 것이었다. 먼저 한 번 덴마크를 방문했던 필자가 “괜한 걱정하지 마라. 여기는 서울이 아니다.”고 이야기한 잠시 후, 그는 오른 쪽 마당 안으로 들어가고 차를 돌려 나오면서 “좋은 관광하기 바란다.”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드는 것 아닌가.
다른 하나는 2013년의 마지막 여행에서의 일이다. 코펜하겐의 카스트룹 국제공항에서 렌터카에 내비게이션을 장착하고 덴마크한국센터에 가려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는데 도대체 읽지를 못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10여 분을 내비게이션과 씨름하다가 결국 옆에 서 있던 중년의 사내에게 요청하였다.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씨름한 끝에 주소를 찾아내기까지는 30여 분이 걸렸다. 그 시각이 밤 11시 30분경이다. 11시가 넘는 시각에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습을 목격한 일행들은 덴마크한국센터로 이동하는 내내,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어려울 때마다 각자도생해야 하는 우리의 사정과, 좋은 정부와 따뜻한 이웃이 있어 살아가는 데 전혀 걱정이 없는 덴마크를 생각하면 ‘언제쯤 우리가 덴마크와 같이 될 수 있을까?’는 의문과 함께 자괴감이 들 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기왕에 주제가 ‘행복’이야기인 만큼, 지난 몇 십년동안 우리 아동문학을 이끌었던 두 사람의 실화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맺도록 하자.
의지할 이웃이 없었던 권정생은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후 권정생이 자신의 집을 다녀간 이오덕을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행복은 외모로 판단되는 값싼 것이 아닐 겝니다.”
그렇다. ‘행복’이 그토록 값싼 것이라면 물질을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도 비례해야 할 것이다.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더불어’라는 사실을 이오덕과 권정생은 일찌감치 일깨워주고 있었다.
급하게 쓰고 보니 두서없는 글이 되었다. 독자에게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의 일독을 권한다, 또한 여건이 허락이 된다면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덴마크를 방문하여 그들이 왜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몸으로 직접 부딪치고 느껴서 행복한 사회를 일구는 데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적어도 ‘아름다운 세상’의 씨앗 정도는 뿌려야 시대를 앞서 산 사람으로서의 책무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