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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0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크 의무착용이 선포된 2년5개월 만에 해제
2023년 호주서 폭염으로 물고기 수백 만 마리 떼죽음
2020년 미국 가수 케니 로저스 세상 떠남(81세)
2016년 하역노동자 출신 안케르 헨리크 예르겐센 덴마크 총리 세상 떠남(93세)
2014년 통신장애로 SK텔레콤 퇴근 무렵부터 자정까지 불통
2013년 주요 언론사와 금융권 전산망 마비시킨 3.20 사이버 공격
2012년 ISIS(IS의 전신) 이라크 바그다드 외 48개 도시 연속 테러 사망 52명 부상 250여 명
2006년 서울대 황우석 교수 파면
2000년대 초 줄기세포 연구로 언론에 의해 노벨상 수상 가능성까지 점쳐지며 한국에서 각광받던 황우석 박사가 2005년 MBC PD수첩의 보도로 줄기세포 논문을 조작한 것이 밝혀져서 서울대로부터 최고의 징계인 파면 처분을 받아 소송을 제기하여 1심으 유죄 2심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04년 ‘국민여왕’ 칭송 줄리아나 네덜란드 전 여왕 사망
어머니 빌헬름미나 여왕의 뒤를 이어 1948년부터 1980년까지 네덜란드 여왕으로 재위했던 줄리아나는 폐렴과 심장병으로 6년간 투병생활을 해왔다.
그는 즉위 후 왕궁에 갇혀살아야 했던 전통을 ‘황금새장’에 비유, 수퍼마켓에서 직접 쇼핑을 하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국민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등 국민들에게 스스로 다가갔다. 특히 ‘폐하’ 라는 호칭을 ‘마담’ 으로 바꿔부르도록 하고, 자녀들을 일반 국립학교에 진학시켜 ‘국민 여왕’ 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역사적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 승인과 동인도제도 식민통치 종식 등 변천 과정을 겪었다. 개인적으로는 남편인 번하르트 왕자와의 파경위기, 이렌느 공주의 가톨릭 개종 등으로 곤경을 겪기도 했다. 줄리아나는 히틀러 청년단원 출신인 독일 태생의 클라우스 반 암스버그와 결혼해 물의를 빚었던 딸 베아트릭스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2003년 미국, 이라크 개전(開戰)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공격이 2003년 3월 20일 시작됐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최후통첩 시한을 2시간15분 넘긴 19일 오후 10시15분(이라크시각 20일 오전 6시15분·한국시각 20일 낮 12시15분) TV로 생중계된 연설에서 “이라크를 무장해제하고 그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 개시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미국은 이번 작전명을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으로 명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첫 번째 공격은 선별적인 군사 목표물에 대한 공격”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방부의 고위관리들은 첫날 공격이 본격적인 대규모 공습보다는 이라크 지도부 제거를 위한 제한적인 공격이라고 설명했다. 미군의 공격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국 정보당국이 추정한 바그다드 안팎의 ‘가능성 있는 목표물(target of opportunity)’에 대해 홍해·지중해·아라비아해상의 미군 함정 6척에서 40여발의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고 워싱턴포스트와 CNN방송 등이 전했다.
미국 국방부 관리는 후세인을 목표로 한 크루즈 미사일 발사를 ‘목 베기 공격(decapitation attack)’이라고 표현했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미국의 공격이 시작된 지 3시간쯤 뒤인 이날 오전 8시30분(한국시각 오후 2시30분) TV로 중계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대미 항전’을 촉구하고 ‘승리’를 다짐했으나, ‘녹화 테이프’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이날 오전에만 30분 간격으로 3차례의 공습이 단행됐으며, 오후에도 항공모함 링컨호에서 발진한 7대의 전폭기들이 또 한 차례 공습을 했다. 국제적십자사(IRC)는 이날 공습으로 이라크 민간인 1명이 숨지고 14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2003년 미국 전역에서 사상최대 이라크전 반전시위 개최
반전·평화 목소리가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들끓는 가운데 미국 내 ‘반전 운동의 요람’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서는 20일 하루 동안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벌어져 일부 지역의 교통이 두절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샌프란시스코 시위에서는 1300여명이 경찰에 체포됐고 LA 역시 40여명이 경찰과 관계 당국에 연행됐다.
반전운동단체 회원과 시민, 학생 수백명은 이날 오전 7시쯤 샌프란시스코 파이낸셜지구와 마켓 스트리트, 밴 니스 애비뉴 등에 버스와 승용차 통행을 차단한 채 “이라크전쟁 반대” 를 외쳤다. 트랜스아메리카 피라미드 외곽에서도 100여명이 반전 구호를 외치며 클레이-몽고메리 교차로를 점거한 채 경찰·소방대원 등 진압부대와 대치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1일에도 이틀째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반전·평화 운동의 메카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날도 불법 집회로 116명이 체포됐다. 시카고에서는 전날 1만명 시위에 이어 이날 수백명이 연방 정부 청사를 에워싸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진압과정에서 10여명이 체포됐다.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중동 성지 순방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2000년 3월 20일 부터 이틀간 요르단 방문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의 성지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종교적 화해를 호소한 뒤 26일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교황의 이스라엘 방문은 1964년 교황 바오로6세 이후 36년 만으로 예수탄생 2000년을 기념해 이루어진 순방은 기독교의 부활절 준비기간인 사순절에 맞추어졌다.
교황은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과 성장지 나사렛 등을 순례했으며 유대교 성지 `통곡의 벽`과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이슬람교 3대 성지중 하나인 하람 알 샤리프도 방문했다. 댜드 바솀에선 홀로코스트 당시 침묵을 지킨 가톨릭 교회의 과거에 대해 사죄했다.
2000년 바이러스성 가축 질환 `구제역` 파주에 첫 발병
전염성이 매우 강한 수포성 가축질병 `구제역`이 2000년 3월 20일 파주에서 발생해 경기 화성, 충남 홍성-논산-보령 등으로 번져 나갔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사건발생 12일이 지난 4월 2일에야 중국과 대만 등 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구제역 `O`타입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1934년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뒤 자취를 감췄다가 이번에 66년 만에 발병했다. 발생지역이 파주, 홍성 등 거의 서부지역에 몰려있는 점, 일본에서도 3월에 서부지역에서만 발생한 점때문에 유력한 감염 경로로 황사현상이 지목됐다. 전염병 발생으로 발병 가축들이 모두 도축되는 등 돼지가격이 폭락하기도 했다.
구제역은 1514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발생, `소의 전염병`으로 기록됐다. 이후 18세기 독일에서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확인됐으며 전 세계적으로 발병해 왔다. 1997년 구제역이 발생해 돼지 380만마리를 도살한 대만은 수출길이 막혀 양돈 농가 2조4천억원, 수출가공공장 1조8천억원의 손실을 보았고 양돈관계 종사자 18만여명이 실직하는 등 국가적 총 손실이 41조원에 달했다. 구제역 파동으로 내려졌던 규제조치는 발생 3개월 만인 7월 7일 충남 홍성을 마지막으로 해제됐고 발생 5개월 만에 제주산 돼지고기가 홍콩에 첫 수출돼 구제역 파동은 완전 종결됐다.
1999년 유럽, 광우병 파동
영국산 소고기가 사람에게도 전염되는 광우병에 오염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럽연합(EU)는 영국산 소고기 전면 금수 조처를 내렸고 대륙과 영국은 긴장 상태에 빠졌다. 영국 정부는 460만 마리가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다 도살하는데는 최소 6년은 걸릴 것이라고 밝혔다. EU회원국은 이들을 당장 모두 도살하지 않을 경우 금수 조치를 풀 수 없다고 버텼다.
첫 도살은 5월 3일 30개월 이상된 소 8만 마리에 대해 이뤄졌다. 화장 시설이 갖춰진 영국내 9개 공식 도살장이 완전 가동되면서 한달간 20만 마리를 도살했다. 파동은 곧 대륙으로 번져,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포르투갈, 독일 등 곳곳에서 적게는 몇마리에서 십수만 마리까지 도살됐다. 광우병 공포는 식생활에만 직접 영항을 미친 것이 아니다. 소뼈, 부산물을 사용하는 화장품도 위험물 목록에 올랐고 의약품 캡슐도 유통이 전면 금지됐다.
1998년 권영해 전 안기부장 검찰조사 중 자살기도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특조실에 도착한 시각은 1998년3월20일 오후 3시45분. 검찰은 곧바로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한 뒤 남부지청 신상규 부장검사가 도착할 때까지 30여분간 휴식을 취하게 했다.
1차 조사 이어 검찰은 권씨를 상대로 재미교포 윤홍준씨 기자회견 사건과 관련된 혐의내용을 추궁했다.
검찰은 이때 권씨가 강력 반발했다는 보도와는 달리, 혐의내용을 순순히 자백했다고 밝혔다.
밤 9시쯤 권씨는 수사팀에 “예배를 봐야겠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달라”고 요구했고, 수사팀은 직원 한 명만 남겨놓고 방을 나갔다. 권씨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성경책을 꺼내 한 곳을 읽은 뒤 주기도문을 외웠다. 검찰은 약 10분간의 예배시간에 가방속 성경책 갈피에서 문구용 칼을 꺼내 몸 속에 숨겨두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검찰은 윤홍준씨 사건 이외의 북풍공작 의혹들과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문건의 작성 및 유출 경위 등을 추궁했으나, 권씨는 “국가 기밀사항이므로 대답하지 않겠다”고 진술을 거부했다. 검찰은 하는 수 없이 1차 조사 내용을 근거로 다시 세세한 부분까지 권씨를 추궁했고, 새벽 4시쯤엔 조서가 거의 완성됐다. 조서를 꼼꼼히 훑어본 권씨는 몇 군데 자구수정을 요구했고, 수사팀은 12층 검사실에서 수정된 조서를 출력하기 위해 방에는 직원 한 명만 남겨둔 채 철수했다.
새벽 4시40분. 방안에 수사관 한 명만 남자 권씨는 “용변이 급하다”면서 특별조사실 안의 화장실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권씨는 곧바로 품속에서 칼을 꺼내 배꼽 윗부분을 30cm 가량 그었으나 상처가 깊지 않자 다시 배꼽 아랫부분을 두 차례 힘주어 그었다. 길이 25cm, 20cm 가량, 깊이 4∼5cm 가량의 큰 상처가 나면서 고통이 엄습했다. 5분쯤 지났을까. 통증으로 흥분된 권씨는 변기 위의 도자기로 된 물통 뚜껑을 옆 세면대에 내리친 뒤, 다시 깨진 조각으로 배와 머리 등을 그었다.
변기 물통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직원이 화장실로 뛰어들었을 때, 권씨는 머리와 복부에 선혈이 낭자했고, 화장실 바닥은 흥건한 피와 깨진 변기 조각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이 상황은 즉시 수사팀에 전달됐고, 수사팀은 완강히 저항하는 권씨를 끌어낸 뒤, 현장을 보존하도록 지시하고 5시5분쯤 강남성모병원에 앰뷸런스를 불렀다. 이어 수사팀은 의료진과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응급조치를 취하면서 권씨를 청사 뒤편으로 데려갔다가 5시20분쯤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1995년 아버지를 살해한 현직교수 김성복 구속
금용학원 김형진 이사장(72) 살해사건의 범인인 아들 김성복씨가 1995년 3월 20일 존속살해혐의로 구속됐다. 범인이 현직 대학교수인 큰아들 김성복으로 밝혀지자, 교수, 전문가, 일반시민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더욱이 친아버지를 철저한 사전계획 아래 살해했다는 점에서 사회전체에 던져주는 충격과 파장이 컸다.
김은 유산을 받아 빚을 갚으려고 범행을 결심하고, 범행 직전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한 뒤 자신의 방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베란다 쪽으로 난 창문을 통해 안방 화장실로 들어가 아버지가 잠든 것을 확인한 후 3월 14일 11시22분쯤 미리 준비한 길이 25㎝의 과도로 목을 찔러 살해한 것으로 경찰 조사 밝혀졌다.
경찰은 장남 김성복이 운영해 온 H농수산이 부도위기에 몰리자 2주 후로 다가온 김 이사장의 새 유언장 작성을 앞두고 유산상속을 위해 저지른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었다. 그는 가족들의 선처 호소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5년 일본 지하철 독가스 테러 발생
1995년 3월 20일 오전 8시쯤 동경 지하철 내에서 신경가스의 일종인 사린(Sarin)이라는 독가스가 살포돼 11명이 사망하고 3천5백여명이 중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독가스는 일본 관청가를 지나는 히비야선과 마루노우치선,지요다선 등 3개 노선을 달리던 지하철 객차와 가스미가세키역,가미야초역 등 18개 역 구내에 거의 동시 살포됐다.
사건이 발생하자 독가스로 인해 쓰러진 사람들을 후송하려는 앰뷸런스와 경찰 차량 등이 일시에 출동하면서 출근길 동경시내가 극심한 체증 속에서 큰 혼란상태에 빠졌으며, 시민들은 독가스를 마신 사람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여기저기 쓰러져 나뒹구는 모습에 경악했다. 사린은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화학물질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개발했다. 유기인제를 응용한 무색무취의 독가스로 사상 최강의 독가스로 불린다. 비교적 제조가 쉬워 ‘빈국(貧國)의 핵무기’로도 불리고 있다.
경찰은 옴진리교를 범인으로 지목, 200여명의 신도를 체포했으며 주동자로 한 종교시설에 숨어있던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5월에 체포했다. 옴진리교는 1984년에 발족된 ‘옴신선모임’이 1987년 ‘옴진리교’로 개칭된 사교집단으로 사건 발생 당시 신자 수가 약 1만명에 달했다.
1992년 일본 가네마루 신자민당 부총재 권총 피습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중간평가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
1982년 체육부 발족 초대장관 노태우 임명
1978년 제26차 남북적십자 실무회담, 북측 불참으로 유회
1976년 볼쇼이극장 창립 200주년
1973년 국무회의, 정부 각부처에 대변인제 설치 의결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육사졸업식에서 북한에 4대군사노선 포기 등 5개 평화원칙 제시
1970년 독립운동가 이규갑 사망
1969년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결혼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둘의 첫 만남은 1966년 11월 9일 오노 요코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런던의 ‘갤러리 인디카’에서 이뤄졌다.
개막 오프닝 1시간 전에 갤러리를 찾은 존 레논이 오노 요코의 작품 ‘못을 박기 위한 페인팅’에 참여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돋보기를 이용해서 천장에 쓰인 ‘YES’라는 단어를 확인하는 작품 등을 감상한 것이 이날 만남의 전부였지만 훗날 레논은 그 순간을 “눈길이 서로에게 멈추었는데 그 뒤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술회했다.
둘의 첫 만남 이후 레논은 7살 연상의 오노를 어머니 같은 존재로 여겼고, 오노는 레논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했다. 본격적으로 연인이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집과 작업실, 스튜디오를 드나들며 교감을 나누고 사랑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각각 배우자와 자식을 뒤로한 채 1969년 3월 20일 지브롤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73년 레논의 연애행각으로 잠시 결별기간에 있었으나 1975년 재결합했다. 그리고 1980년 12월 8일 밤 10시 50분, 오노와 함께 뉴욕 맨해튼 자택으로 들어가다가 정신병자 마크 채프먼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1968년 포항 종합 제철 주식회사 창립
1966년 우간다에 강진
1964년 북한-중국 국경조약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발효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을 정하는 국경조약인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 양국이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1964년 3월 20일 발효됐다. 이 조약은 북한 김일성과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가 1962년 10월 12일 서명했다. 총 5조로 짜인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
조약문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鞍部-안장처럼 들어간 부분)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對岸)의 산마루인 262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남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이 경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한다. 2008년 발표된 연구논문에 따르면, 백두산 일대에 있는 28개의 국경비 좌표를 실측해 지도에 표시한 결과, 1962년 이전의 국경선은 지금보다 더 남쪽에 있었다. 때문에 조약으로 정해진 백두산의 국경선은 북한측에 유리하게 그어진 것으로, '북한이 국경조약 당시 6·25 참전의 대가로 중국에 백두산을 떼어 주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조약은 이밖에 백두산, 압록강-두만간의 섬과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이 조약의정서에는 압록강-두만강의 총451개 섬과 사주가운데 북한이 2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혀있다. 북한 소유 압록강 섬은 127개(74.24㎢) 중국 소유 압록강 섬은 78개(4.06㎢) 북한 소유 두만강 섬은 137개(13.49㎢) 중국 소유 두만강 섬은 109개(10.87㎢)로, 면적으로 볼 때 압록강 섬의 94.8%, 두만강 섬의 55.4%가 북한 땅이었으며, 전체 섬의 85.5%에 달하는 87.73㎢가 북한 땅, 14.5%에 달하는 14.93㎢가 중국 땅이다.
또한 조약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을 분명하게 구분였다. 당시 새로 설정된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의 북한·중국 국경을 설명하며 제9호와 10호 국경비를 연결하는 국경선 사이로 흑석구(黑石溝)가 지나가고 그 위치는 9호비 동쪽 1229m 지점이며 ‘흑석구’는 곧 ‘토문강’이라 명시하고 있다.
1964년 북한, 어선 두척과 선원 26명 납북
1963년 중국-미국 정상회담, 쿠바제재 공동선언
1963년 윤보선-허정 산책데모
1963년 감사원 출범
1958년 서울-제주간 여객기 취항
1957년 김창룡 사건 관련 강문봉 중장에 사형 구형
1956년 튀니지,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6년 시인 박인환 사망
박인환은 ‘명동의 백작(伯爵)’으로 불릴 만큼 당대의 멋쟁이였다. 훤칠한 키, 수려한 외모 게다가 한껏 멋을 부려 명동을 찾을 때면 명동은 언제나 그를 반겼다. 박인환은 다방 ‘동방싸롱’ 혹은 유명무명의 술집에서 술과 낭만 그리고 문우(文友)들과 어울리며 현실의 고통을 시와 술로 삭였다.
책과의 인연도 남달랐다. 책을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서가였고, 해방 후에는 2년간 파고다공원 근처에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당시 마리서사는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본거지로 박인환은 이곳에서 문인들과 교류하며 1946년에는 ‘거리’라는 작품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이곳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그가 숨진 곳도 지금의 교보문고 후문쯤에 있었으니 죽어서까지 책과의 인연을 이어간 셈이다.
박인환이 “답답해, 생명수(약)를 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심장마비로 요절한 것은 1956년 3월 20일, 30세 때였다. 이상(李箱)을 기린다며 사흘간 쉬지않고 술을 마신 것이 죽음으로 몰고간 것이다. 지인들은 그가 평소 좋아했던 조니워커 술과 카멜 담배를 시신과 함께 망우리에 묻었다.
1952년 미 상원, 對日평화조약 비준안 승인
2차대전이 끝났어도 동아시아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한국에서까지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점령지 일본을 반공거점으로 삼아 소련ㆍ중국에 대항할 반공벨트 구축에 나선 미국은 일본을 하루속히 전범국의 족쇄에서 풀어주고 국교를 회복하려했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1951년 9월8일 미국의 주도로 48개 연합국과 일본이 조인한 대일(對日)평화조약(일명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각국의 의회 승인을 거쳐야 했지만 이는 형식일 뿐 미 의회 승인 만이 실질적인 효력이 있었다.
1952년 3월20일 미 상원이 찬성 66표 대 반대 10표로 조약 비준안을 승인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은 승전국ㆍ패전국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전환된다. 4월28일 조약이 정식으로 발효돼 일본은 6년 8개월 만에 연합국의 군사점령에서 벗어났지만 쿠릴열도, 남사할린 등을 그들의 영토에서 제외시켜야 했고, 오키나와를 미국의 군사점령지로 계속 남겨야했다. 조약이 발효되는 순간(일본시간 오후 10시 30분), 일본 전역에 사이렌이 울렸고 사원에서는 타종소리가 울려퍼졌다
1947년 미국-필리핀 군사기지 협정 조인
19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덕수궁서 개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됐다. 미국측은 아놀드 소장이, 소련측은 스티코프 중장이 대표를 맡았다.
미소공동위는 제2차 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즉 한반도에 대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의 실시와 더불어 한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하여 장차의 독립에 대비케 한다는 내용에 따라 설치됐다.
미소공동위는 4월 17일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한국내 협의대상자가 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이 유명한 `코뮤니케 제5호`이다.
그러나 이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여부를 놓고 미소간에 논란이 벌어져 끝을 맺지 못하자 난항 끝에 결국 5월 6일 무기휴회를 선언했다.
1946년 조선신문협회 발족
1946년 한국독립당 개편, 위원장에 김구, 부위원장에 조소앙
1935년 페르시아 국호를 이란으로개칭
1923년 방정환, 월간잡지 `어린이` 창간
1923년 3월 20일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들을 위한 월간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신조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으며 이 문구는 매호마다 독자의 사진과 함께 실렸다.
'어린이'는 그가 처음 만들어 알린 용어로 늙은이, 젊은이 등과 대등한 존재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전까지는 동몽, 아동, 소년, 아이들로 불렸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차례씩 발행됐으나 한 달에 한번씩 발행하는 월간으로 바뀌었고, 개벽사가 발행을 맡았다.
창간호는 안데르센의 동화인 `성냥팔이 소녀`를 번역하여 게재했고, 12페이지로 구성됐다. 월간으로 바뀌면서는 1세대 아동문학가들인 고한승, 마해송, 정인섭, 이원수 등의 동화와 윤극영의 동요극 등이 선보였고, 1930년대부터는 이광수, 주요한, 주요섭, 이태준, 정지용 등도 참여하게 됐다.
이후 '어린이'는 아동문학의 요람으로 자리잡으면서 아동문학이라는 근대적 문학장르도 태동시켰다.
이정호, 신영철 등이 방정환을 이어 12년동안 잡지를 계속 맡았으나 1934년 7월에 123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광복 이후 1948년 5월 고한승이 `어린이` 잡지를 속간했지만 1년 반 만인 1949년 12월 통권 제137호로 폐간됨으로써 사라졌다.
방정환은 32세로 요절할 때까지 어린이를 위해 삶 전체를 바친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어른 세계의 주변에만 머물렀던 어린이를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끌어올렸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희와의 결혼도 그의 어린이운동에 도움이 됐다. 장인의 뒷받침으로 5월 1일에는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제정한 것이다.
이날 서울 거리에는 어린이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골목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라는 전단 수만 장이 뿌려졌다.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던 방정환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어린이들을 걱정했다고 한다.
1915년 민적법 개정
1904년 일본 제1군 진남포에 상륙
1902년 민간 최초로 한성~인천간 전화 가설
1890년 이탈리아 가수 질리 출생
1852년 해리어트 스토우의 반노예주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출간
1835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 출생
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1727년 만유인력 발견한 영국 물리학자 뉴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