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외 2편)
임혜신
그리고 이상한 가을이 찾아와
초소처럼 서 있던 생선가게에 불이 꺼지고
선착장을 날던 드론들도 사라져
만년 시계*인 양 긴 불면에 드는 모래둔덕
가문 좋은 금속들만 시간의 페달을 유유히 달리는
이상한 밤이 찾아와
철 늦은 소금장미 들창에 피어나고
러시아풍 선술집에서 젖은 럼향기 풍겨올 때
나, 베라를 생각하네
내다 팔지도 않을 호박을 심고
잡아먹지도 않을 닭들을 키우던 눈물 많던 베라
애인 잃은 친구를 찾아가 제 것인 양 3년을 울던 베라
더 이상 크리넥스 집어 주기 싫다며 너도 나도 등 돌렸던
아더스 버트란드 얀의 ‘휴먼’
페이지 178쯤에서 만날 것만 같은 흰 얼굴과 빨간 볼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간다던 밤을 생각하네
큰일이 났다고,
캄캄한 베링 해협같이 꿈틀대는 전화기 속에서
베라가 울지도 않던 밤을
* 텍사스 서부 산 속에 설치되고 있는 이 시계는 초침이 일 년에 한 번 째깍거리고, 분침은 백 년마다 움직이며 천 년에 한 번 뻐꾸기가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에어비앤비
한 달만 살기로 하고 온 바르셀로나에
10년째 살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가 좋아
이틀을 머물기로 한 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렀지
밤이면 창녀와 마약이 히비스커스 꽃처럼 피어나
선택과 선택을 섞어 선별을 지운다는 골목
작은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남자는
커피를 마시러 간간 베란다로 나올 뿐이고
술에 취해 들어온 일본 여자는
파란 스카프를 맨 채
수건으로 복도를 닦고 또 닦았었지,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연발하면서
당신도 낯선 도시에서 취해본 적이 있는지
장작을 지어 나르다 늙어버린 남자처럼
큰 발을 가진 어두운 복도에서
지나간 사연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
당신은 파란 스카프가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라고 말해줄 수 있는
아침을 기다렸을 뿐
어둠이 스미는 석벽을 따라
돌아오고 떠나가던 희미한 얼굴들 속에서
나는 이미 그리워하는 법을 잊었지만
차가운 트럭에 시동을 걸 때면
칼끝처럼 베이던 것이 그것이었을까
엘 라발 거리 모퉁이를 돌아서면
사라져 가듯 서 있는 잡념 하나
키스
—세상의 끝이 온대도 나는 두렵지 않네
그것은 수만 번째 끝, 누더기처럼 친근하다네
겨울비 내리는 노드스트롬 백화점 앞
볼이 푹 꺼진 중독자 옆에 앉아
조그만 여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네
흐릿한 저녁 한기를 두르고
속살마저 따스함을 잃은 돌 반석 위
바람에 미끄러지는 네온사인들
헐벗은 가로수 위로 전후의 우울 같은
흰 꽃이 지고, 또 지고
페루의 새가 후루룩 지평을 넘어
종이 위의 국경을 날아가듯
연기에 가려져 희미해지는 두 얼굴
거리를 떠돌던 무수한 갈망들
잿빛 물의 언어로 녹아내리고
마지막 겨울의 마지막 발음조차 멀어져 가는데
젖은 비니모자를 벗기며
구겨져 비를 피하는 남자의 입 속
한 모금 담배연기를 넣어주고 있네
⸺ 시집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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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신 / 1997년 미주 한국일보 등단. 충북대학교 국어과 졸업.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공대 졸업. 시집 『환각의 숲』(2001년). 『베라, 나는 아직도 울지 않네』 (2021년)
미국시 해설서 『임혜신이 읽어주는 오늘의 미국시』(2005년). 월간 《현대시》에 미국시 해설 연재, 《해외문학》 《미주 시인》 등 미주 문학지에 미국시 번역 해설. 미주 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칼럼에 Weekly, Contemporary 미국시 번역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