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손한 예감
최 병 창
네발로
땅을 딛고 살아가는 짐승들은
마음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네
오직 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기회가 있을
뿐이네
땅을 보거나 하늘을 보거나 세 치 혀는 거기서 거기인데 혀가 길다고
다리가 길어지는 건 아니고 걷거나 뛴다고 하여 자리바꿈이 달라지는
건 없다네
그렇다면 과연 이 땅 위엔 네발 달린 짐승이 많을까
두발 달린 짐승이 많을까
동서고금을 통하여 걷는다는 것은 그리 소란을 떨지 않아도 괜찮다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으니 깊은
웅덩이는 그냥 보아 넘길 일이 아니네
물이 흐르는 일이나 땅 위를 걷는 일이나 크게 한 발짝 내밀어봐도
그늘 밑은 시원하지 않았으니 남은 것은 넘어지거나 자빠지는 것뿐이었네
살아오면서 넘어지거나 자빠진 것이 어디 한 두 번뿐이었겠나
반올림하거나 사사오입하면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인데 지나고 보니 쉬운
것도 어려웠고 어려운 것도 때로는 쉬웠다네
옛 그림자는 옛날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흔적은 희미하게 남는 것이라네
떠오르는 해나 지는 해가 밤이 되면 언제 길을 따라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황당한 예감처럼.
< 2017. 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