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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장, 시 읽어 주는 남자 2010 가을호 정진명 시집을 1천권 가량 읽은 적이 있습니다. 5백 권을 넘어서면서부터 새로운 시를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시의 발상과 전개 수법이 모두 똑같아서 시를 섞어놓으면 누구의 시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특징 없는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강하게 고개를 쳐든 의문이, 과연 시다운 시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는 문학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다른 갈래와는 구별되는 시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식도 주제도 아주 단순명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각종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들을 보면 수필을 짧게 줄인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철학자의 넋두리인지 구별하기 힘든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순명쾌라는 시 본래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것들을 골라 보았습니다. 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시들입니다.
득음 차주일
일평생 바람을 꼬아 다다른 허공에 대꽃 하나 묶는다 대꽃과 뿌리 사이 바람의 현 팽팽하다 달빛이 알몸으로 내려와 바람소리를 걸쳐 입고 날아간다. 비천이 도움닫기한 자리에 돋은 죽순 아무 소리 없다 -시집, 냄새의 소유권(천년의시작)에서
#감상: 소리는 청각 심상인데, 그것을 시각 심상으로 만들어서 공감각의 효과를 냈다. 허공에서 비천의 모습을 추상해내는 시인의 안목이 놀랍다. 상상이 사물을 만나 빚어내는 이 손길이 시이리라.
연잎 이종수
연밭에 소나기 소 혓바닥 널름거리듯 어머니 손부채마냥 이불 솥청마냥 저물녘 장독뚜껑 덮듯이 불다가 헛간에 불 내고 친구 집에 숨었을 때 벌컥 문이 열리고 다짜고짜 날아왔던 솥뚜껑 같은 아버지 손
-엽서시, 54호(2010)
#감상 : 시는 말이 없다. 말이 없으면서 가슴 속에 수많은 말들의 파동을 일으킨다. 연잎에서 소나기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상상이나, 아버지의 손바닥은 시인만의 체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러나 시인만의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시의 매력이다.
하늘님을 엿보다
이태관
가득한 논물 위로 오롯이 내려앉은 하늘
밟고 선 지구의 혈마다 온종일 푸른 침 꽂는 농부의 손길
사람이 하늘이라는 말씀 5월이 되니 알겠네
-시집, 사이에서 서성이다(문학의 전당)
#감상: 짧지만 가장 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시라는 갈래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내용은 성서나 불경 전체의 분량과 맞먹는다. 그러나 길이는 불과 일곱 줄이다.
여기서부터는 홍윤숙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동행할 수 없다 보던 책 덮어놓고 안경도 전화도 신용카드도 종이 한 장 들고 갈 수 없는 수십 억 광년의 멀고먼 여정 무거운 몸으로는 갈 수 없어 마음 하나 가볍게 몸은 두고 떠나야 한다 천체의 별, 별 중의 가장 작은 별을 향해 나르며 돌아보며 아득히 두고 온 옛집의 감나무 가지 끝에 무시로 맴도는 바람이 되고 눈마다 움트는 이른 봄 새순이 되어 그리운 것들의 가슴 적시고 그 창에 비치는 별이 되기를
-시집 <쓸쓸함을 위하여>(문학동네)에서
#감상: 시인들의 직관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삶이 낮이라면 죽음은 밤이다. 밤하늘에 뜬 별은 삶과 죽음을 있는 고리 쯤 되리라. 영혼이 하늘로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별이 될 것이다.
하모니카 서정춘
타향살이 몇 해던가 따위
철없이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다
서울에서 죽은 시인의 고향으로
길게 울고 가는 텅빈 객차 한 칸
-시집, 물방울은 즐겁다(천년의시작, 2010)
#감상: 텅 빈 객차가 주는 묘한 쓸쓸함을, 홀로 밤 기차 여행을 해본 사람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거기에 객지에서 죽은 시인의 영혼이 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당연한 그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 시인의 눈이이라.
옷에 대하여 - 자화상을 보며
-김종해
아침에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 해 지기 전까지 입고 있었는데 으스름 저녁에 돌아와 일생의 옷을 벗으매, 내 안에 마지막 남은 것이 비로소 보인다 구름 한 벌, 바람 한 벌, 하느님 말씀 한 벌!
-시집, <봄꿈을 꾸며>(문학세계사)에서
#감상: 짧지만 강하다. 이것이 시이다. 삶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가 아니고는 안 된다. 선사들이 시라는 양식으로 깨달음을 노래한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백담사 위선환
거기에, 돌로 눌러둔 사람이 있어서 가는 길이 멀다
골짝은 오래 되었고
맑다, 냇바닥에 잠든 어미 메기의 큰 입 안에는 새끼 메기들이 잠들어있다
그만, 물을 밟는다 고작 발뒤꿈치가 젖는 깊이인데
온몸이 잠긴다
길 끝에는 한 평 되는 마당이 있어서 또 쓸었고 들여다보는 것이니
자잘한 애기 햇살들은 땅바닥을 기며 곰실거리는지
새삼스럽다 두어 걸음 내어딛고 닿아서 돌을 일으켜 세우면, 돌은
자라서 아미가 높으므로
눈 크게 뜨고 고개 젖혀야 쳐다보이는지
돌 밑에 뉘어둔 사람은 이미 허물어져서 흩어졌고
빈 구덩이에 고인 어둠에는
깜박이는 별빛 한 줌 혹은 불티 두어 점 남은 것인지
-계간 유심, 2010년 7/8호
#묘사와 상징이 어울린 시이다. 좀 길지만, 그리기의 수법으로 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대상으로 파고들어가는 인식의 능력을 잘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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