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월간 산에서

[조대행]

名士에게 듣는 山이야기] "45년간 도 닦는 기분으로 산에 다녔습니다"

‘고산의학전문’ 비뇨기과 전문의 조대행씨

국내에 고소의학을 전공한 의학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사로서 고산등반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실제 고산등반에 참가한 의사는 몇 명 있다. 조대행씨(趙大行·60·성빈센트병원 비뇨기과)는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가톨릭의대에서 비뇨기과 전문의 자격을 따낸 뒤 군복무중인 1977년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에 팀닥터이자 대원으로 참가했고, 수원의 성빈센트병원에 근무 중이던 1988년에도 역시 대산련 에베레스트-로체 원정에 팀닥터로 참가했다. 그 뒤 16년이 지난 지난해 11월 에베레스트 가까이 위치한 아마다블람(6,856m)을 등반했다. 모교인 용산고 창립 50주년 기념 등반대였다.

“77년에는 3년 선배인 장문삼 형과 함께 원정에 나섰고, 88년에는 9년 후배인 정호진(넬슨스포츠코리아 대표)과 함께 에베레스트-로체 원정을 했습니다. 대산련 에베레스트 원정 때마다 용악회 멤버가 두 명씩 낀 셈이죠.”

5월14일 오전 8시50분, 도선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약속한 용산고 산악부 OB 모임인 용악회(龍岳會) 회원들은 모두 나와 있었다. 조대행씨는 만나자마자 용악회 자랑을 늘어놓은 다음 15회 동기인 전용규 회장을 비롯해 회원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조대행씨는 “오늘은 가볍게 하자”고 후배들에게 말한 뒤 도선사계곡을 거슬러 올라 고갯마루 용암문을 빠져나간 다음 노적봉 기슭으로 다가갔다. 능선길을 벗어나 노적봉 측면으로 내려서자 잔뜩 찌푸린 하늘이 벗겨졌다. 휴일이면 등반객들로 북적이는 인수봉과 달리 노적봉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고2 때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서 있는 가운데 시커먼 사람들이 교단에 올라서더니 일장연설을 하더군요.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해서였죠. 처음 보는 이상한 등산장비를 늘어놓곤 전시회도 했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 한 분이 조대행 선배님였답니다.”

용악회 막내인 원종민씨(코오롱등산학교 교무)가 고교 15년 선배인 조대행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25년 전. 77년 에베레스트 원정을 마친 뒤 모교를 방문, 후배들에게 에베레스트 등반을 얘기해주는 자리에서였다. 그 후배와 20여 년이 지난 뒤 ‘산악회’라는 테두리로 묶이고, 지난해에는 아마다블람도 함께 등반했다.

▲ 도 닦는 기분으로 등반한다는 조대행씨.

“의사가 아닌 대원으로 참가하고 싶은 마음에 힘든 훈련도 똑같이 해냈습니다. 아무튼 제2캠프에서 20여 일 지내는 사이 멀쩡하니까 김영도 대장님이 제3캠프까지 올라가라 하시더군요. 그래도 괜찮으니까, 더 올라가 보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옐로밴드를 넘어 7,900m까지 올라가니까 그만 내려오라 하시더군요. 더 이상 올랐다간 사우스콜 캠프에 올려놓은 몇 통 안 되는 산소통을 써야 할 판이니, 걱정되셨던 거죠.”

77년 에베레스트 원정은 당시 대장이자 국회의원이었던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장이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군에 허가를 받아내 참가할 수 있었다. 88년 에베레스트-로체 원정은 당시 병원장이 얘기를 듣자마자 “환자는 언제 보려고 산에 갈 생각만 하느냐”며 반대했다. 그래서 아예 병원을 그만두고 개업할 생각으로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결국 병원장은 고집불통의 조대행씨를 막지 못했다. 그러나 경비가 모자라는 바람에 큰 돈을 내야하는 등반허가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그로 인해 두어 달 동안 베이스캠프에서 지내야 했다. 그런데도 좋기만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 45년 산친구 전용규 용악회 회장과 함께.

지난해 아마다블람 등반을 제2캠프에서 끝낸 것은 두 차례의 원정을 통해 고소증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대행씨는 “뇌부종보다 폐수종이 더욱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뇌부종은 머리라도 지끈지끈하다 위험 상황이 이르지만, 폐수종은 가슴이 조금 답답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파래지면서 곧 숨이 넘어간다고 설명한다.

“2차 공격대원들과 함께 제2캠프에 올라섰는데 머리가 띵해지는 게 이상했습니다. 그러던 터에 정상에서 내려서던 1차 공격대원들이 컨디션이 나빠 제2캠프에서 머물게 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2~3인용 텐트 2동으로는 편히 지낼 수 없는 형편이었죠. 그래서 눈 딱 감고 다음에 또 오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내려섰던 겁니다. 아무튼 평균연령 50대 중반의 선후배 8명 중 4명이 올랐고, 모두들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조대행씨는 후덕하고 정 많은 산악인으로 정평 나 있다. 2개조의 선등자들이 앞서 나가고 자일을 풀어주거나 안전벨트를 차면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후배들은 이구동성으로 “형이 아마다블람 등반을 포기한 이유는 등정을 앞둔 후배들이 좁은 텐트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컨디션을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고 속얘기를 전해주었다.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부친 조병학씨는 한국산악회 초대 이사를 역임했고, 6·25때 세상을 떠난 형 선행씨는 광복 직전 울릉도 촛대바위를 초등했을 만큼 한국 산악계에 선각자들이었다. 사촌형인 조경행씨 또한 양정고 산악반장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이런 분위기의 가족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65년 가톨릭의대에 입학하자마자 자연스레 산악부를 찾았다.

“산악반에 가입해놓곤 참석하지 않자 선배들이 교실로 찾아오더군요. 험상궂은 표정을 짓더니 냅다 윽박지르더군요. 겁에 질려 산행에 참가했죠. 61년 6월5, 6일 야영산행으로 기억됩니다. 당연히 억지로 끌려간 건데 인수봉 후면을 오르면서 푹 빠지고 말았답니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고 깨달은 거죠.”

▲ 노적봉으로 접어드는 사이 눈에 띈 쓰레기를 줍는 조대행씨(왼쪽)와 전용규씨(가운데).

그해 여름 설악산행에 참가했다. 설악동에서 마등령을 넘고, 골짜기를 이러저리 휘젓고 다니다 대청을 오르는 코스였다. 아직 근육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고교 1학년이 그렇게 길고 힘든 산행을 했으니 고생스러울 수밖에. 그렇지만 집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행이 곧 추억으로 바뀌면서 산에 더욱 빠져들었다.

원종민씨가 첫 피치를 끝내자 후배가 오르고, 조대행씨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중간지점에서 자기확보를 해놓곤 동기인 전용규 회장에게 올라오라 소리쳤다. 밑에서 보이지 않는 선등자 위치에서 확보를 보면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해 등반자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두번째 피치. 이번에는 라스트를 맡았다. 모두들 안전하게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 다음 등반할 참이다. 조대행씨는 짬을 내기 어려운 종합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등산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달에 두 번은 꼭 등반을 한다. 봄 여름 가을에는 바위를 오르고, 겨울에는 빙폭을 찾는다. 의대생일 때도 그랬고, 전문의를 따고 대위 소령으로 군복무 중일 때도 한결 같았다. 미국 연수중인 91, 92년에는 요세미티와 조수아트리에서 난도 높은 루트들을 맛보기도 했다.

“강원도 현리 내린천변에서 근무했습니다. 남들은 외박이나 휴가 때면 고향에 갔지만, 저는 설악산 골짜기를 파고들었습니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인지라 한동안 귀신이 나올까 무섭더군요. 그러다 큰 짐승이 두려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겁나더군요. 산적으로 돌변할까 싶어서였죠.”

부대 뒤편에 제법 근사한 바위가 있었다. 조씨는 누구도 손대지 않은 바위에 길도 2개 냈다. 어느 날은 바위가 하고 싶어 혼자 부대 뒷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곤 오버행 크랙에 하켄을 박고 줄사다리를 건 다음 딛고 올라섰는데, 어느 순간 바닥으로 내다꽂았다.

▲ 노적봉을 오르던 중 한 자리에 모여 파이팅을 외치는 용악회 회원들.

“뒤통수를 찧은 뒤 정신 못 차리고 드러누워 있는데, 부대에서 기다리다 궁금해 올라온 후배 장교가 그 모습을 낮잠 자는 것으로 착각했지 뭐예요. 헬멧을 썼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뇌진탕으로 저 세상에 가 있을 겁니다.”

두번째 피치를 끝낸 다음에는 큰 위험이 없는 페이스 구간. 조대행씨는 자일을 깔고 카라비너를 통과시킨 다음 오르라고 권했다. 그가 이렇게 안전에 신경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학시절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다 크게 추락하고, 인수봉 대슬랩에서 이끼를 밟으며 추락하는 등 지금도 손과 팔목에 흉터가 남아 있을 만큼 큰 사고를 당해 안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욱이 그는 산에서 후배 7명을 잃었다. 68년 가을 12선녀탕 사고였다.

“10월24일입니다. 당시 80년만의 폭우라고 말했을 정도로 폭우가 퍼부었습니다. 2년 후배들이었죠. 그 한 해 전 골짜기 중단부의 복숭아탕까지는 저와 함께 오른 적이 있지만, 그 위로는 경험자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 잠잘 것 있으니 안전한 곳에서 대피해 있던지 적어도 위로 올라갔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밑으로 내려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다 결국 한 명 한 명 죽어간 거죠. 저도 가기로 했다가 갑자기 집안 일이 생겨 참가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에 앞서 66년 2월 초 설악산 봉정암에서 동행한 대학생이 목숨을 잃는 사고를 겪었다. 그 일행들은 12선녀탕~백담사~가야동~봉정암 산행을 마친 뒤 소청을 넘어 희운각에서 가야동으로 내려서려다 너무 눈이 많이 내리자 방향을 틀어 다시 봉정암으로 향했다. 대피소가 전혀 없던 당시 가장 가까운 대피처가 봉정암이었다. 그런데 소청을 넘어 폭설에 갇혀 3일간 비박하고 봉정암으로 내려서던 중 동행한 모 대학생이 동사하고 말았다.

▲ 조대행씨는 올해 환갑을 맞지만, 아직도 이팔청춘과 같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회원들은 정상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밥을 비롯한 도시락을 펼쳤다. 이미 점심 때를 넘긴 시각이었다. 상석에 자리 잡은 전용규 회장은 배낭에 넣어두었던 200cc 소주 한 병을 꺼내고, 후배 한 명은 막걸리 한 통을 꺼냈다. 12명이 나눠 마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입술을 살짝 살짝 적시면서 선후배 정을 나누었다.

“고교시절 대행이 하고 바위 탈 때는 거의 다 독학이었답니다. 곁눈질, 눈동냥한 다음 내가 앞장서고 저 친구는 라스트를 섰지요. 정말 둘 다 숫하게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함께 산에 다닌 게 45년이나 됐네요.”

전용규 회장은 만능스포츠맨. 윈드서핑, 스킨스쿠버, 스키, 스노보드 등 안 해본 스포츠가 없을 정도라고 조대행씨는 귀띔한다. 특히 산악자전거에 관해서는 내로라하는 마니아다. 그 덕에 조대행씨도 간혹 MTB를 타고 산길을 달리기도 한다. 그래도 가장 가슴에 와닿는 스포츠는 역시 등산이다. 그것도 전문등반이다.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겁니다. 짜릿함도 있지만,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는 스포츠는 등반이 유일할 테니까요. 스트레스를 풀고, 새로운 활력소를 찾을 수 있다는 면에서도 좋은 스포츠고요. 정말 도 닦는 기분으로 산을 다닌답니다. 그러다 보면 깊은 경지에 이를지 또 압니까?”

조대행씨는 “비록 저 자신은 이제 너무 위험한 것은 피하고 있지만, 그래도 산꾼이라면 당연히 험난한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며, “이제 취재 그만하고 산 아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편안하게 山 얘기나 나누자”고 했다.

글 한필석 기자
사진 정정현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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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정]

2005년도 월간 산지에서 대행형님을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사진속 형님의 환한 웃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