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가 이데올로기의 대담한 충돌 속에 신파 멜러를 삽입한 [쉬리]에 이어, 다시 남북 코드를 형제간의 갈등이라는 정서적 방법으로 변용한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고, 강우석 역시 남북 이데올로기의 외곽에서 빚어진 폭력의 문제를 [공공의 적]의 폭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훨씬 더 큰 사이즈로 [실미도]를 만들고 있을 무렵, 박찬욱은 저자거리의 화려한 시선을 모으는 블록버스터가 아닌, 징그럽게 인간 본성을 파고드는 아픈 영화를 완성했다. 그것이 [올드보이]다.
미안하다. 박찬욱의 새 영화를 이야기할 때 적어도 홍상수나 이창동이나 김기덕과 비교해야 했을텐데, 왜 나는 양강씨, 강제규나 강우석을 언급했을까. 거듭 박찬욱에게 사죄한다. 아마도 [공동경비구역JSA]의 너무나 큰 성공 때문에 그를 블록버스터용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그랬던 것 같다.
거칠게 분류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스타일리스트 박찬욱이나 김기덕은 해체주의자인 홍상수나 허진호의 반대쪽에 위치해 있다. 홍상수가 자꾸 풀어 헤치려고 노력하는 만큼 박찬욱은 자꾸 단단하게 외투의 깃을 여민다. 세계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박찬욱은 비이성적 상황이나 인물을 그 속에 던져 놓는다. 세계를 신화적으로, 감성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홍상수는 이성적(그렇게 보이는!) 세계를 해체함으로써 세계의 본질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허진호는 홍상수처럼 풀어 헤치고 싶지만, 너무 자의식이 강해서 아직은 스스로를 껍질로 싸고 있으며, 김기덕의 세계관은 박찬욱보다 훨씬 단순하다.
박찬욱이 만든 가장 좋은 영화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텍스트는,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탄력성 있게 움직이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화면은 힘 있게 감독의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인물들은 그 속에서, 처음부터 그곳이 제 자리인 것처럼 죽치고 눌러 앉아서 호흡하고 지껄이며 살아간다.
그러나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어디로 나가냐 하면, 내러티브를 훨씬 더 확장시키며, 감각의 응축이 아니라 폭발의 점화 스위치를 누른다. [복수는 나의 것]이 지극히 절제되고 내적으로 응축되어 있다면, 즉 아코디언을 좁힐 때 소리가 난다면, [올드보이]는 감정의 극한 상태까지 외적으로 폭발시키며 아코디언을 화려하게 펼치듯 소리를 만들어낸다. 시를 쓰듯이, 풍금을 좁힐 때는 상상력의 여백이 풍요로운 공간을 확장시키지만, 소설을 쓰듯이, 풍금을 펼칠 때는 극적인 서사구조가 전개된다. 그렇다. [올드보이]는 빼어난 이야기 구조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물론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살아있는 인물들 때문이다. 그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연출력 때문이다.
오대수와 이우진의 목숨을 건 게임에 제 3자인 우리가 끼어들 공간은 없다. 비 오는 날 공중정화 부스 옆에 서 있다가, 우산을 들고 접근한 남자에 의해 15년동안 밀실에 감금당한 채 군만두를 먹으며 사육당한 오대수는, 자신을 가둔 남자의 정체도 궁금하지만 그것보다 더 알고 싶은 것은, 왜 자신이 이렇게 갇혀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이다.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보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자서전]을 기록하며 그 해답을 찾아 보는 그의 행위는, 데카르트적이다. 그러나 오대수의 회의는 이성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능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박찬욱적이다. [공동경비구역JSA]의 비극이, 판문점 초소 안에서의 본능적 행동에서 발생한 것을 생각해 보라. [복수는 나의 것]의 비극이, 아이의 유괴가 아니라 미치광이의 본능적 돌팔매에 의한 아이의 익사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오대수는, [쇼생크 탈출]의 엔디처럼 사설감옥 안에서 젓가락으로 벽을 파서 한 달 정도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때, 다시 처음 납치당했던 곳으로 풀려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한 탈출이 아니라 타인의 의지에 의한 석방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향후 전개되는 오대수의 삶도 누군가에게 철저히 조종 당할 것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술 마시고 파출소에 끌려가서 경찰들을 향해 팔뚝으로 엿을 먹이기는 하지만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그는, 15년후인 지금 봉두난발의 핏발 선 범죄자로 변해 있다. 오대수가 사설 감옥 안에서 한 것은 TV보기, 벽에 자신을 가둔 자의 모형을 그려 놓고 권투 연습으로 체력 단력하기 등이었다. 그는 TV를 통해 자신의 아내가 살해당했고 그 범인으로 자신이 지목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극심한 저주를 품고 그는, 자신을 가둔 자를 찾아야 한다.
오대수를 가둔 남자 이우진은, 줄다리기의 한쪽 끝을 일부러 놓아버린다. 그리고 곧 새로운 줄을 손에 바꿔진다. 오대수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탈출하기 일보 직전, 그를 풀어주고 그리고 군만두의 맛과 청룡이라는 중국집 전표를 근거로 자신을 추적하는 오대수 앞에, 내가 너를 가둔 사람이라고 일부러 등장한다. 그리고 왜 가두었는지 5일 안에 알아내면 스스로 죽겠다고 게임을 제안한다.
[올드보이]는 게임이다. 게임이 끝나면 영화도 끝난다. 그러나 사실 눈 덮인 설원에서의 라스트씬은 이우진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올드보이]의 라스트씬은 앞으로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오대수에게 행복한 삶일 것인가?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오대수가 될 수는 없지만, 만약 당신이 오대수라면, 그렇게 15년 세월을 이유도 모르고 갇혀 있었다면, 그리고 그 후에 그가 겪은 악몽이 실제 일이라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자신이 없다. [올드보이]의 라스트씬은 차가운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소름이 돋는 영화를 나는 결코 본 적이 없다.
박찬욱 감독은, 왜 나는 이렇게 갇혀 살아야 하는가라고 오대수가 캄캄한 감옥 속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듯이, 오대수와 심리적 동일화 과정을 겪도록 장치된 극적 구조에 의해 관객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만든다. 세 치 혀를 조심하라. 얼핏 그의 전언은 이것인 것처럼 보인다. 들린다. 그러나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그 뒤에서 발생한다. 거기까지가 트릭이다. 진짜 승부는 그 다음부터다. [올드보이]의 완성도는 특히 충격적인 라스트씬으로, 결말이 애매하게 끝난 츠치야 가롱과 미네기시 노부야키의 원작만화를 훨씬 뛰어넘는다.
박찬욱은 삼각형의 극적 구조를 좋아한다. 얼핏 그의 영화 속에는 두 개의 강렬한 대립적 축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삼각형의 트라이앵글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영화 제목이 [삼인조]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공동경비구역JSA]에서도 남과 북의 대립되는 두 축에 사건을 조사하는 중립국 감시단이 끼어들면서 삼각형 구도를 갖추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도 외형적으로는 유괴당한 아버지와 아이를 유괴한 남녀의 대립이라는 두 축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아이의 아버지/청각장애인/무정부주의자의 세 축으로 되어 있다. [올드보이]도 마찬가지다. 가둔 자/갇힌 자의 이원적 대립 같지만, 사실은 가둔 자/갇힌 자/갇힌 자의 여자의 삼각형 구도로 되어 있다. 여기서 히든 카드가, 갇힌 자의 여자이다.
[올드보이]의 가장 큰 아우라는 갇힌 자와 가둔 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갇힌 자와, 그의 여자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길고, 오랜,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