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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수송 함대를 이용한 적 본거지 또는 요새 공략전>>>
대개의 전투는 보통 드넓은 평원이나 혹은 험준한 산기슭, 또는 계곡 등에서 벌어지기 쉽다.
그러나 종종 물을 등지고 버티고 있는 적의 강력한 방위 요새나 본거지를 공략하는 데에는
평소 방식대로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지난 번에 소개한 티레 성 공방전이나
은하영웅전설의 회랑 요새 이제르론 공략, 그리고 매의단 최대 난관이였던 돌도레이 요새
공방전 등등은 모두 하나같이 강력한 주둔 병력을 갖추고 있었고 천연의 지형을 방패로
삼았으며 요새의 강한 방위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런 경우는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공략할 수가 없다. 이럴 경우 지난 번에도 말했듯이 적의 요새와
요새를 지키는 주둔 병력을 떼어놓고 별동대로 하여금 허술해진 요새를 친다든지
티레 성처럼 적의 강력한 해군 함대를 항구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발을 묶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던지 등의 방법 말고는 달리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소개할 두 개의
요새.... 고대 인도의 사나운 부족 중에 하나였던 마리 족의 본거지 점령 작전과 미 남북 전쟁
중 최대의 수상전이라 일컬어지는 미시시피 유역 제압전에서 등장하는 두 요새 공방전은
특유의 천연 지형을 방패로 삼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번의 두 요새
공략은 기존의 요새 공략법과는 사뭇 공략 방식이 사뭇 다르다. 이번의 경우는 어지간히
해도 좀처럼 적의 요새 주둔군을 요새에서 떼어놓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경우의 대표적인
케이스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 그렇다면 지난 날의 세 개의 요새 공략전(티레 성,
이제르론 회랑 요새, 돌도레이)등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략했었는데 이를 지휘한 명장들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미 남북 전쟁 당시 북부군 총사령관 그렌트 장군은 과연
각각 어떤 방식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시켰던 것인지 지켜보자.
[[마리 족 본거지 공략전]]
마리족 본거지 공략전 참가 병력.
시기: 기원전 326년 여름(특히 7월~8월로 추정)
1. 마케도니아 군 진영
지휘관: 알렉산드로스 대왕
병력: 약 7만 5천(그 중 왕의 직속군은 1만 5천으로 추정)
2. 마리 족 본거지 방위 진영
지휘관: 불명
병력: 약 5만
{{전투 직전의 상황}}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에 압승한 알렉산드로스는 카스피해 남안에서 동방
각국으로 침공하고, 나아가 동방을 향해 더욱 진군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인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더스 강 동부의 패자였던 호루스 왕과 희대의 접전을 펼치게
되는 데 이것은 추후에 다음 분석 시간때 알려주도록 하겠다. 그 후 각지에 할거하는 부족
국가들을 공략하게 되는 데 히다스페스 강변(지도에서 잘려진 다스베스는 사실 이 강입니다.
포토샵 과정의 실수로 이렇게 되었어요 ㅜㅜ;;)에 도달했다. 이 지역을 지배하는 사나운
마리족과 격돌하게 되는 데 마리족은 아케시네스 강, 히드라오테스 강의 두 줄기 대하로
방비된 견고한 요새에 본거지를 두고 있어서 알렉산드로스의 대규모 원정군에게 있어서
기동력이 크게 제약을 받게 된다. 그 자리에서 발이 묶인다면 필시 그 때까지 종속시킨
부족들의 이반도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이로써 결국 희대의 천재 패왕은 전군을 분산시켜
대규모 분진 합격(分進合擊)을 실시하게 된다.
**가우가멜라 전투** B.C.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제가 격돌한 최후의 결전. 전차를 주력으로 하는 다리우스 군 백만 대군을 기병과 중보병을 주력으로 한 알렉산드로스군이 대파했다.
즉, 노 30개의 선박 80척으로 아케시네스 강을 내려가게 하되, 강 양안에 육로로 행군하는
부대를 편성하여 아케시네스, 히드라오테스 양 대하가 만나는 지점으로 급진시킨다. 대왕
자신은 정예를 끌고 동쪽으로 향해 히드라오테스 강을 건넌 다음 본성을 공격한다. 요새 함락
후에는 마리군 잔존부대가 있을 경우 합류 지점으로 몰아넣어 전군으로 포위 섬멸시킨다는
것이다.(이 방법과 매우 흡사한 방식을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양웬리를 상대로 분진 합격 전법을 걸었으나 실패한 바가 있다.) 많은
지성(支城)에 분산된 마리족 병사들을 각개 격파하는 전법은 능률적이지 못하고 시간도
걸린다. 그래서 병력을 둘로 나누어 지성간의 연락을 끊고 공격을 거듭해 성에서 적을
몰아낸다. 패주하는 마리군을 양군 공동으로 한 지점으로 몰아넣고 전군을 동시에
섬멸시킬 수 있다는 전략이다. 초기 전투에서는 왕 자신이 직접 이끄는 소규모 병력으로
교전하게 되므로 위험도가 높다. 만약 적에게 유능한 지휘관이 있다면 총사령관의 직솔
부대를 수색해서 그를 집중 타겟으로 노리는 한편 별도의 병력을 통해 적을 험준한 강
유역으로 유인한다든지 등등 오히려 마리족측에서 각개격파했었을 수도 있는 그런 리스크의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동력을 살리기 위해 이 위험한 전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시시피 유역 제압전]] ~빅스버그 요새의 공방~
미시시피 유역 제압전, 빅스버그 요새의 공방 참가 병력
시기: 1863년. 4월 ~ 7월 4일
1. 북부연합군
지휘관: 그랜트 장군
병력: 4만 1천
2. 남부연맹군
지휘관: 존스턴
병력: 4만 4천
{{전투 직전의 상황}}
미국이 건국된 이래 최초의 내전인 남북 전쟁은 개전 3년을 맞이했다. 북부 연합군의
우세로 기울이고 있었다. 애초부터 공업력과 경제력이 월등한 북부를 상대로 남부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북군이 승리한 경우 자연스레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
주산업이라 막대한 노예라는 무임금의 노동력이 빼앗길 테고 그렇게 되면 남부는 경제적으로
치명타를 입게된다. 이러한 이해타산이 숨어 있어 남부측에선 더더욱 이 전쟁에서 패해선
안되었으며 이러한 처지에서 남부는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제(귀족의 의무)'라는
가치관이 있었다. 고귀하게 선택받아 태어난 그들로선(그들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생각했다.
일종의 선민의식과 비슷하다.) 싸움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관(당연할 것이다.
패배하면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이 송두리째 날아가게 생겼는데 호락호락 자신들이 누려온
온갖 특혜와 타산을 쉽사리 북부에 내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_-)에 따라 전력의 열세를
나름대로 충실히 만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적 자원에 의지한 전쟁은 오래 지속하지 못하여,
남부 연맹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의 오른팔이였던 '철벽(Stonewall)' 잭슨이 전사한 후
남부군의 전력이 크게 쇠약해지게 된다. 잭슨은 공격과 방어 양면에서 우수한 재능을 발휘한
장군으로 특히 노련한 방어번 때문에 스톤 월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총사령관의
작전을 완벽히 읽어내고 적확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잭슨을 잃은 것은 남군에겐 심각한
치명타였다. 이에 반해 북부 연합군은 동부 전선에서 리 장군의 직할군과 자웅을 겨뤄 리
장군의 본대의 시선을 끄는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북부 연합군의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의
파견 부대가 전장을 횡단하고 남부 연맹군을 분단하여 단숨에 결판을 짓겠다는 웅대한
작전을 세웠다. 남부 연맹은 미미시피 강을 통해 물자를 운반하여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북군의 그랜트는 교통로인 미시시피 유역을 제압함으로써 분단 작전을 성공시키고자 하였다.
교두보로써 미시시피 동부의 잭슨 시를 제압하려 하는 그랜트 앞에는 미시시피 최대 요새
도시 빅스버그가 버티고 있었다.
[[마리족 본거지 공략전]]
{{전투 경과}}
마리 족 군대는 주변에 여러 지성을 두고 적이 침공할 때 마다 상호 연락을 통해 적을
분단하고 각개 격파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공략하려면 서로 연락을 취할 여유를
주지 않아야한다. 그렇게 판단한 알렉산드로스는 밤해 고속 강행군을 전개하여 하룻밤에
78Km를 진격했다. 그는 신속한 야간 강행군을 함으로써 마리 족의 감시를 재빨리 피했고
다음날 새벽에 마리군의 전위 요새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시각에는 마리군은
마케도니아군을 치러 성 밖에 정렬하던 참이었다. 필시 기존대로 각 여러 지성의 통신
네트워크망을 통해 적을 분단, 각개 격파하려던 의도였던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마리 족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온 알렉산드로스의 본대에 비해 완벽히 대열을 갖추지는 못한
상태였던 지라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 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그러한 마리족 기지
주둔군에 대한 전광석화같은 기습은 절묘하게 성공했다. 나아가 왕은 전투 중에 적
마리군의 원군에 대처하기 위해 별동대를 파견해 놓은 상태였다. 그의 오랜 전우이자 중신인
베르디카스 장군이 지휘하는 정예 부대로 이 별동대는 또 하나의 지성에서 출진 태세
준비에 들어가 있었던 마리군을 눈깜짝할 사이에 포착해 기습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 와중에
베르디카스는 부하에게 명해 알렉산드로스 군이 성 하나를 함락시킨 사실을 큰 소리로 알려
적에게 심리적 동요를 안겨주었다. 당연히 이에 베르디카스 별동대에 의해 기습당한 지성의
병사들은 크게 당황해 성을 버리고 본성을 향해 후퇴했다. 만약 이 부대에서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다면 필시 적장이 알린 함락 소식이 진위 여부가 어떻든 간에 아군의 동요를 부추기 위한
잔꾀라고 판단해 베르디카스 장군의 부대를 상대로 더욱 견고한 방어전을 펼칠 준비를
갖추고 전혀 동요없이 오히려 베르디카스 부대의 발목을 묶고 다른 지성의 부대와 신속히
연락하여 그 부대들과 함께 일제히 베르디카스 부대를 포위 섬멸전을 전개했을 수도 있었다.
서둘러서 다른 부대들과 함께 적 별동대를 공격하는 동시 베르카디스 군대를 직접 맞이했던
지성의 주둔 병력은 아군 지원 병력 중 일부를 빼내어 적 패왕과 맞서게 된 전위 요새를
구원하러 달려갔어야 했다. 물론 정면으로 알렉산드로스의 본대와 교전하는 것은 피하고
지성의 그 별동대는 그 요새를 지키는 방위군과 연락을 서둘러 취해 야습을 걸어 본거지
주둔군과 함께 알렉산드로스의 본대를 협공하는 것도 가능했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요새를 공략 중이던 적 본대를 격퇴하는 것이 임무지 전멸이나 치명타를
입히는 게 아니다. 적에게 오히려 역으로 혼란을 일으켜 물러나게 해서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럴 경우에는 지성의 별동대와 전위 요새 주둔군의 연계 협공 플레이로
적 본대를 밀어낸 다음 베르디카스 장군의 별동대를 격퇴 또는 격파시켰을 다른 지성의 연합
부대를 신속히 전위 요새 주둔군과 합류해야 한다. 물론 본거지에도 연락을 취해
본거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출격시켜야 한다. 그리고 서둘러서 본대를 추격해 치명타를
안기거나 또 운이 좋으면 적 총사령관인 알렉산드로스 왕을 생포 또는 전사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다른 지성들의 방위는 일부러 허술하게 만들어야 한다. 일부러 허술한 것인양
행세함으로써 적이 함정임을 깨닫게 해서 다른 지성들을 각각 함락시켜 나가려는 행위를
지연시키고 베르디카스의 별동대들 완벽히 발목을 묶은 상태에서 다른 지성의 주둔군들로
하여금 함꼐 협공으로 적 별동대를 격파했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마리
지휘관들 가운데 마리족의 알렉산드로스라곤 어느 부대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마리족의
총지휘자는 불패의 패왕이 아니였다. 그리하여 베르카디스의 별동대를 직접 맞이했었던
지성의 수비군은 멍청하게도 공황 상태에 빠져 성을 버리고 본성을 향해 후퇴했다. 그
소식을 접한 젊은 불패의 패왕은 다시 군을 정비한 후 패주하는 적병을 추격하며 히드라테스
강으로 진격했다. 마케도니아군이 도착했을 때 베르디카스 부대에 패한 마리군은 여전히
강을 건너는 와중이었다. 패왕은 재빨리 전위를 보내어 도하 중인 마리군을 공격하는
동시에 도하를 기다리던 마리군 후위와 몸소 격돌했다.
[[미시시피 유역 제압전]]
{{전투 경과}}
~ 장갑 함대의 맹위 -))) 수상권을 제압하다. ~
한편 1863년에 전개된 남북 전쟁 사상 최대의 수상전인 미시시피 유역 제압전에서는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가 직접 출격해 유역을 장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장군의 임무는
미시시피 강을 지키는 강력한 요새 네트워크를 분쇄하여 수상 교통을 차단해 남부 연맹군을
사실상 동서로 분단시키는 것이었다. 북부의 수상 교통권은 북부연합군이 장악한
상태였는 데 특히 미시시피 원류 근처는 북군이 점령한 상태였지만 중류지역에서 하류까지는
남부 연맹의 세력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렌트가 볼 때 중류의 핵심은 요새 도시
빅스버그였다. 빅스버그 역시 지난 번에 소개했었던 요새들인 티레 성 요새와 돌도레이 요새,
그리고 이제르론처럼 견고한 방어 설비와 소택지 등등으로 보호됨으로써 충분한 방어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미시시피 강을 통해 수상 보급을(티레 성은 지중해
항로를 통해 수상 보급이 가능했다. 돌도레이는 후방이 험준한 절벽이라 후방에서의 보급은
수월하지는 않은 편이지만 필시 다른 루트를 통해 보급을 충분히 받았을 테고 자체적으로
넉넉한 보급 물자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르론의 경우는 늘상 특유의 회랑
지형을 갖추고 있어 언제나 적의 침공 루트인 요새의 정면의 정반대쪽 자국의 직선 항로를
통해 보급 물자를 꾸준히 받아왔을 것이다.) 받으므로 장기전에도 능히 견딜 수 있는
곳이었다. 이에 그랜트 장군은 해군의 협력을 받아낸 상태였다. 하류에는 남부연맹의
함대가 주둔 중인 그랜드 걸프가 있는 데 장군은 그곳을 쳐 남부연맹의 수상전력을
괴멸시키고 펨버턴의 배후를 뒤흔들어놓기로 생각했다.
<<<북군의 장갑 증기선>>
우수한 화력과 장갑을 자랑한다.
빅스버그가 건재하는 한 남군은 그랜드 걸프와 서로 연계해 강고한 전투력을 발휘할 터였다.
그리고 빅스버그의 배후는 남군의 함정군이 지키고 있다. 그랜트의 전략을 성사시키려면
필사적으로 빅스버그의 방위망을 돌파해야만 한다. 이의 돌파는무저건 점령을 뜻하는 게
아니라 교묘히 통과하는 게 목적이다. 남부 함대는 그랜드 걸프를 본거지로 삼는다. 그러한
그랜드 걸프를 칠 수 있다면 빅스버그는 중요 보급 기지를 잃게 되므로 자연히 붕괴될 수
밖에 없다. 이번 공략 작전에 투입되는 북군 해군 함대의 지휘관은 데이비드 포터 제독으로
기함 벤튼 호 이하 6척의 장갑 증기선 포함 6척을 거느리고 북군 총사령관의 지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북군과 남군의 각각의 진로>>
보이지 않는 말머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북군의 측면 공격에 실패한 펨버턴은 빅스버그로 후퇴.
포터 제독의 호위 아래 육군은 몇 족의 수송선에 분승하고 하류까지 급진했다가 상륙한
또다시 북상하여 펨버턴의 배후를 친다는 그랜트의 전력은 우선 빅스버그를 지탱하는 수상
교통로의 제압이라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4월 중순, 하류 정박지에 모습을 드러낸 포터
제독의 함대는 빅스버그를 지키는 수송 선단을 공격하였다. 선단을 호위하는 무장함을
침몰시킨 제독은 가차없이 적 수송선을 격멸시킨다. 그러자 장군은 그 여세를 몰아 단숨에
그랜드 걸프를 급습하게 하였다. 제독이 지휘하는 포함은 모두 장갑을 갖춘 증기
동력선이었다. 현 쪽에 둘러친 장갑은 남군이 맹렬히 쏘아대는 포탄을 남김없이 튕겨냈다.
벤튼 호는 47발을 맞았지만 단 한 발도 관통하지 못했고 역으로 장갑이 덜 된 남군 함대는
이동하는 수상 요새와 다를 게 없는 북의 장갑 함대에 의해 잇달아 격침되었다. 이로써 수상
전력을 잃은 남부연맹은 미시시피 강을 이용한 물자 운반이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랜트의 의도대로 수상 기동전이 구체성을 띠며 본격적으로 작전이 개시되었다.
[[마리 본성의 함락!! 마케도니아군, 마리족 본성 총공격!!]]
히드라오테스 강변 전투에서 도하하던 적 부대와 도하를 기다리던 마리군 후위를 모두
격파한 마케도니아군은 여세를 몰아 도하를 강행하고 그대로 마리군 본성 공격에 나섰다.
그 도중에 지성 가운데 하나를 포위하고 맹공격을 가해 거의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원정
도중인지라 티레 성 공략에 사용한 대규모 공성 병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원정에서
사용한 병기는 공성용 신축식 망루였다. 나아가 티레에서는 활용할 기회가 없었던 갱도
굴삭 요원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성벽 지하에 갱도를 파고들어 갱도 버팀목을 불태워 성벽을
무너뜨리는 공성법이 병용된다.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전개되는 공격에 견고한 본성 성벽도
어쩔 수 없이 파괴되어 간다. 방위의 근간이었던 성간 연락망에 의한 포위망은
마테도니아군의 분 진 합격 전법으로 통신 시스템이 차단되어 후방 협공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본군은 마케도니아 군의 빠른 진격에 출격보다 방어를 선택하고 본성에서
농성하였다. 마리군이 믿고 있던 성간 연락망이 거의 기능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다음날
알렉산드로스는 직속군이 마리 본성에 다다랐다. 무엇보다도 기동력을 중시하는
알렉산드로는 당일 직접 말을 타고 나아가 선두에서 친위대 기병을 지휘했다. 그 결과 보병은
후방에 처지고 기병만 앞장서는 형태가 되었다. 잇달아 지성이 함락되고 본성을 향해 후퇴를
거듭하던 마리군은 마케도니아의 전열을 보고는 반전하여 공세로 돌아섰다. 방어에 취약한
기병만 데리고 앞장선 패왕을 공격해 일거에 열세를 뒤집으려 했던 것이다. 복수심에 불타
흙먼지를 올리며 밀려오는 마리군을 본 패왕은 재빨리 전군에 총 진격을 정지시켰다. 동시에
스스로 진중을 달려 교전을 일시 중단케 했다. 전군은 왕의 지령을 따랐고 그들은 마리군
보병대의 공격을 피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신속히 기동력을 살려 후퇴했다. 전의에 불타는
마리군은 초조함과 피로를 맛볼 즈음 마케도니아군의 후방에서 금속성 광채가 빛을 발했다.
기병으로만 출격한 대왕을 필사적으로 좇아온 마케도니아 보병대가 간신히 도착한 것이다.
만약 적의 왕이 기병으로만 몰려왔을 때 마리족에게 원거리 공격 시스템으로 응전하며
버텼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군보다 적은 기병만으로 올 경우에는
산병(궁수 부대)으로 하여금 적 기병을 향해 집중적으로 쐈다면 천하의 젊은 패왕
알렉산드로스도 최소한 치명상을 면치못했었을 것이다. 기병의 장점은 움직이는 고속 기동형
탱크같은 존재로써(스타 크래프트의 벌처와 비슷한 기능을 갖춘 것이 바로 기병이다.)
적에게 병력상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기병의 취약점은
바로 적이 원거리로만 상대할 때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빠르고
방어력까지 겸한 기병이라 해도 적이 산병을 중핵으로 삼아 대항한다면 기병은 이렇다할
공격도 못해보고 집중 사격에 의해 말에서 떨어지게 되어 전멸당하기 쉽다. 하지만 마리족은
충분한 산병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기병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였을 것이다. 기병에 대한 충분한 견제책은 추후의 강의 때 집중적으로 분석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적의 응원군이 찾아오자 마리족 지휘관은 동요하여 후퇴했다. 무적을
자랑하는 마케도니아군과의 본격적인 격돌을 피한 마리 대군은 조수가 밀려나듯 후퇴했다.
마리군은 마지막 요새로 삼은 본성에 틀어박히고 마케도니아군은 본성을 포위한 채 결전을
기다리며 밤을 세웠다.
다음날 공격이 전개되었다. 마케도니아는 병력을 양분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몸소 일군을
지휘하며 성문 공격에 집중했다. 대왕의 직속 부대는 티레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방패병들이였다. 그들은 왕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가 방패를 나란히 세워 화살을 막으며
성내 적병을 안쪽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서둘러 성문을 열어젖혔다. 마리군은 이에 맞서
성벽 위에서 방패를 앞세우고 부하를 독려하는 적의 왕에게 화살과 투창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가릴 것도 없는 성벽 위에서 고립된 젊은 왕은 다소 무모한 행동을 한다. 고함을
지르며 몇 안되는 측근들을 데리고 성벽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내 마리 병사들이 왕에게
몰려든다. 친위대는 서둘러 방진을 짜고 주군을 지키며 아군이 성문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마리군의 매서운 응전으로 친위 방패병들은 잇달아 픽픽 쓰러진다. 왕 자신도
흉갑을 관통당해 방패를 피로 물들이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 마케도니아의 본군은 성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그리고 서둘러 성 밖의 알렉산드로스 직속 부대도 가까스로 새로운 운제를
조립해 올리고 증원군을 성벽 위로 올려보냈다. 그들은 왕의 주위에 방패를 세우고 방어에
애쓰는 한편 주군을 성 밖으로 들어냈다. 경애하는 왕의 부상을 입자 마케도니아 장병은
분노하며 미친 듯이 악귀로 돌변, 마리군 병사 뿐만 아니라 비전투원이나 노약자들까지
학살하기 시작한다. 다른 때라면 일방적인 학살을 용인할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지만
그는 중상을 입고 천막에 누운 상태인데다 통제를 잃은 군대는 어느 시대, 어느 군대이든
상관없이 무자비한 대량 학살 집단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 마리군은 본성을 탈출할
틈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이 승리에는 마케도니아군의 상식을 뛰어넘는 급진격이 크게
공헌하였다. 큰 강을 이용한 마케도니아군의 대량 수송 전술에 허를 찔린 마리군은 성간
네트워크를 활용하지 못하고 완패한 것이다. 요즘의 스타 크래프트로 치자면 테란의 드롭쉽,
프로토스의 셔틀, 저그의 오버로드 등을 통한 폭탄 드롭이 대성공한 케이스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성은 함락되었고 마리족의 생존자들은 모두 불패의 젊은 천재 패왕에게
항복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은 병력의 일부로 편입했다. 마리족의 항복을 알게된
각지의 족장들은 저항을 단념했고 모두 항복했다. 그들을 재조직한 알렉산드로스는 새로운
경제, 문화의 거점이 될 신도시를 건설하고 다시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한다. 하나의 전술적
승리보다 커다란 전략적 승리를 낳은 좋은 사례였던 것이다.
[[수륙 양면 작전]]
1863년 4월 20일. 북군의 수송 선단은 포터의 지휘하에 미시시피 유역 상류의 함대 정박지를
출항하였다. 배에는 북군 매클렐런 장군이 지휘하는 육군 제13사단이 승선하고 있었다. 이와
병행하여 맥퍼슨 장군의 제17사단을 육로로 진격시켜, 13사단과 상륙 지점에서 합류시키는
분진 합격 전법이었다. 이때 제17사단은 적 펨버턴이 병력을 배치한 동쪽 기슭이 아니라
무방비한 서부 기슭을 진격했다. 본래대로라면 펨버턴은 서안에도 서둘러 군을 전개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 수 있었겠지만 수상권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호위함의 엄호 아래 강 건너편을 지나가는 북부연합군의 모습을 남부연맹군은 이를 악물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강을 배로 내려간 제13사단과 육로로 강하한 제17사단은 대략 20
마일을 진격해 4월 29일에 하드 타임스에서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랜드 걸프 하류의
부루인스버그에서 공격에 나서서, 제대로 방비를 하지 못한 남부연맹군을 무찔렀다.
펨버턴은 패잔병을 모아 빅스버그로 후퇴해 방비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남부군이
후퇴한 사이 그랜트는 잭슨 시 제압에 착수했다. 잭슨 시를 지키는 남부 연맹의 존스턴
장군은 그랜트와 싸울 태세를 갖추는 한편 펨버턴에게 출격을 명했다. 그러나 펨버턴은
잭슨으로 가지 않고 북군을 측면에서 치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적장의 의도를 눈치챈
그랜트는 서둘러 2개 사단을 펨버턴 쪽으로 보내고 주력군을 이끌고 잭슨을 급습했다.
존스턴은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잭슨 시를 포기한 채 남쪽 남군 세력권까지 후퇴하였다.
한편 3천명 이상의 전사자를 남기고 후퇴한 펨버턴은 마지막 거점인 빅스버그에서
농성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랜트는 대세가 자신의 쪽으로 기울어진 사실을 확인했다. 잭슨을
확보하고 적 보급로를 차단한 북부연합은 포위망을 확실히 좁혀갔다. 5월 하순, 그랜트의
포위군은 빅스버그를 야포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었다. 그랜트는 참호를 파 빅스버그를 완전
봉쇄하고 갱도 전술로 방어군을 위협하며 철저한 포격을 지령했다. 잭슨을 기점으로 삼은
북군은 철도로 보급받은 풍부한 물자를 아낌없이 구사해 밤낮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이
전쟁에서는 조래에 없었던 폭렬 포탄이 사용되었다. 포위군의 포탄은 거리의 건물을
붕괴시키고 땅바닥을 후벼파며 폭발했다. 지하실로 파한 시민들은 한잠도 자지 못하고
오로지 벌벌 떨 따름이었다.
{{냉철한 포위전, 빅스버그 함락}}
매서운 완전한 포위 상태의 집중 포격이 진행되는 시내에서는 거의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방위용으로 설치한 요새포가 미약하나마 반격을 시도했다. 그 화포가 포위군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는 사이 그보다 몇 배나 많은 포격이 요원과 요새포를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방위군 병사나 시민이 방벽 위로 조금이라도 몸을 드러내면 수십 발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방벽 밑에는 병사나 시민이 방벽 위로 조금이라도 몸을 드러내면 수십 발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방벽 밑에는 벌집이 된 시체들이 높이 쌓여 그 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내
북쪽은 셔먼, 동쪽은 맥퍼슨, 그리고 남쪽은 매클랠런 장군 등 북군의 지상군단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빅스버그였다. 게다가 서쪽은 포터 제독의 함대가 지키고 있었다. 보급이
끊기고 시민을 패닉 상태로 몰고 간 맹포격에 노출된 빅스버그의 운명은 이제 명백했다.
그런 시민들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게된 펨버턴의 고뇌는 점차 깊어졌다. 그렇기에 그는 곧
존스턴에서 온 철수 명령도 거절하고 마침내 그랜트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7월 4일 빅스버그는 함락된 것이다.
<<두 전투의 의의>>
두 전투의 사례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물을 등지고 포진한 견고한 요새의 중요성(하천에
의거한 요새의 중요성, 즉 천연 지형을 기반으로 한 요새의 중요성을 말한다. 수차례 계속
언급했듯이 티레 성은 바다를, 돌도레이 요새는 험준한 절벽을, 이제르론은 회랑의 특성을
잘 살려 장기전을 펼쳐 침공군을 고전하게 만들어왔었는데 바로 지형을 잘 이용한 전술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새삼 강조하는 좋은 케이스라 하겠다.), 그리고 오히려 하천을
역이용함으로써 그 요새를 무너뜨려 적의 허를 찌르는 신속한 용병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두 전투는 무려 2천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만 알렉산드로스도 그랜트 장군도
지형의 중요성을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전술에 관한 한 병기의 차이는 비교적 승패에 그리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물론 병기의 차이 때문에 승패가 갈라지는 경우가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다. 원시적인 무기를 지닌 원시 부족과 고도로 뛰어난 무기를 앞세운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결과는 굳이 말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전술사에 있어서
병기의 성능 차이 등은 승리에 필요한 기본적인 상식들과 요인에 비하면 전술에 공헌하는
바가 아주 낮다는 뜻을 의미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모처럼 지닌 군대를 어떻게 신속히
그리고 집중하여 행동 개시, 적의 방비를 무력하게 할 것인가에 있다. 즉, 용병술의 초보적인
상식인 병력의 집중과 고속의 법칙은 여기에서도 또 한번 더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군과 남부 연맹군은 모두 하천을 생명선으로 삼는 한편 강고한 방위 시스템을
짜두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본성을 중심으로 하는 요새 방위 네트워크의 진수다. 소설
은하영웅전설에서 은하 제국군이 적군 자유행성 동맹군의 지장 양웬리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무려 6차례 양웬리 이전의 이제르론 요새 공략을 위해 파견되었던 동맹군 지휘관들을
격퇴했었던 것도, 베르세르크에서 돌도레이 요새를 통해 미들랜드 원정군을 번번히 돌도레이
공략을 실패하게 만든 것도, 나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티레 성을 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도 바로 지형을 절묘하게 잘 이용하고 요새의 우수한 주둔 병력과 요새
특유의 견고한 방위 시스템이 조화를 이룬 요래 방위 네트워크의 진가를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이 5개의 전투(티레 성, 마리족 본거지, 돌도레이, 빅스버그, 이제르론) 모두
그러한 본성 중심의 방위 네트워크를 통해 번번히 적을 굴복시키고 요새 주변에 적의 수많은
시체들로 가득 쌓아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공략법도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세 전투처럼 요새를 반쯤 포위하고 요새 주둔 병력이 밖으로
못나오게 봉쇄하여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거나 혹은 돌도레이나 이제르론처럼 적
요새 주둔군과 요새 사이를 떼어놓고 텅 빈 요새를 급습 점거함으로써 요새 주둔군과
정면으로 싸우고 있는 아군과 함께 적을 앞 뒤로 쳐 섬멸 또는 격퇴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전법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전법은 가능한 한 너무 남발하지 않는 것이 좋다.
똑같은 전법으로 요새를 계속 공략하려 한다면 어지간한 정보전을 펼친다든지 요새 방위군에
심리적인 동요를 안겨주기 위한 책모를 꾸미지 않고서는 절대로 적은 요새에서 뛰쳐나오지
않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불리해지는 것은 도리어 요새 공략 부대 쪽이 될 것이다.
물론 요새 쪽이 장기전에도 전혀 끄덕하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또 요새의 물자가 풍부할
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반대로 공략 부대가 보급 물자 등이 충분하고 요새 방위군 쪽에서
식량과 물자가 바닥이 나게 된다면 오히려 요새 공략은 용이해진다. 자고로 배고픈 군대는
절대로 싸울 수 없다. 지나치게 허기진 군대로 전혀 굶주리지 않고 활력이 넘친 군대를
상대로 이긴 사례는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고대의 많은 용병가들은 세 개의 전투
사례같이 요새 주둔군의 기능 마비 혹은 요새와의 연계 파괴를 틈타 탈취하는 전법을 쓸 만한
여유가 되지 않거나 또는 그만큼의 능력이 되지 않았을 경우 그게 아니면 적 요새 수비군
내부의 상황을 정확히 잘 알고 있고 그 대신에 휘하의 침공군이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知皮知己 白戰白勝)을 알고 있는 명장의 군대라면 흔히 일부러 장기전을 펼쳐
상대방을 전투 불능 상태로 몰아넣기 위해 포위한 상태를 유지해 스스로 적이 항복하게
하는 법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상당히 많은 물자 소모가 따르고 특히 원정군일 수록
적 수비 기지를 점령했다 해도 적지 않은 재정적, 물자적 압박을 피할 길이 없다. 따라서
효과적인 방법으로써는 신속한 양동 작전으로 요새를 탈취했던 그 세 개의 전투 방식이나
혹은 오히려 침공군 쪽이 적이 이용하는 지형의 어드밴티지를 역이용하는 방법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마리족 본거지도 빅스버그도 바로 그러한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지형을 오히려 우리가 역이용한다. 이것이 바로 불패의 젊은 천재 패왕
알렉산드로스와 남북 전쟁의 영웅 그랜트 장군이 생각해낸 명안이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도
전국 시대 뒤에 호조 씨나 모리(毛利)씨 처럼 (호조와 모리는 일본의 유명한 방위
전술가이다.) 요새 간 상호 연결을 방위 시스템의 요체로 삼았던 사례가 많다. 물론 우리 한국
역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가장 대표적인 예라면 역시 고구려 말기의 안시성 대전이라든지
고려 말기 대몽 항쟁때 강화도를 수비로 삼은 사례와 귀주에서 몽골을 혼란에 빠뜨려 밤에
서로 같은 편끼리 싸우게 만든 사례, 그리고 조선 시대 중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 대군을
상대로 남한 산성에서 저항했던 사례들도 모두(안시성은 효과적인 방위전이였으나 대몽
항쟁의 강화도나 병자호란의 남한산성은 실패한 사례다.) 그러한 요새 중심의 방위 네트워크
시스템을 활용한 것이다. 적군이 침공해오면 요새간 상호 지원으로 막고 병력 분산을 꾀해
시간을 벌인 뒤 그 틈을 타 방위군을 결성하는 전략이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와 그랜트
모두 신속한 기동전으로 방위 시스템을 무력화 했다. 3개의 전투 이 두 명장들의
전투는(3개 중 티레 성 공략도 알렉산드로스의 훌륭한 공략법이다.) 방법에 다소 차이점이
있었다. 3개의 전투는 주둔군 -요새 연계 기능 마비를 꾀했지만 마리족과 빅스버그의 경우는
그러한 것에 덧붙여 지형의 특색을 역이용한 것이다. 물론 3개의 전투들도 지형을 훌륭히
이용했기는 하다. 그러나 지형의 특색을 역이용하는 것은 이 두 전투 사례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5개의 전투들은 모두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집중과 고속의 법칙을 신랄하게
적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신속한 기동성을 앞세운 전술로써 가장 뛰어난 기동전의 사례 중에
하나로 남아 있다. 아무튼 요새 네트워크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고
병력 이동이 원활해야만 한다. 그런데 승리를 얻은 두 장군은 상대의 허를 찌를 만한 대단한
속도전을 펼쳐 우수한 기동성으로 진격해 적의 상호 지원을 차단케 한 것이다. 그리고 두
장군의 강의 특성을 역이용해 기동성을 살렸다면 강... 그러니까 지형이라는 것은 방어하는
입장에서 특히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을 전제로 한 전략 전술은 그 지배권의
확립이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삼국 시대 한강을 둘러싼 쟁패전은 바로
그 점 때문에 한강이라는 최고의 전략 전술의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한 패권 싸움이 삼국
시대의 말기까지 지속되었다는 점도 그러한 타산때문인 것이다. 한강을 확보한 국가는
이웃의 두 적국에게 패권을 빼앗길 때까지 삼국의 패자(覇者)로 군림할 수 있었다. 순수
군사적 차원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특혜까지 갖추었던 한강이였던 만큼 한강 쟁탈전은 곧
삼국의 패권자가 누가 되는 것인지 결정하는 사투였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것의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빼앗긴 존재의 결말은 비참할 따름이며 그랜트에게 미시시피 유역을
뺏긴 남부연맹과 알렉산드로스의 야전 부대에 겁을 먹고 스스로 강을 포기한 마리족은
요새에서 농성하는 소극적 자세를 취해 끝내 모두 각각의 적장에게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견고한 방비 태세도 그것을 유지하는 전제 조건이 완벽해야만 제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
거기다 두 승리는 지휘관의 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카리스마와 명성을
최대한 이용해 적을 위협했고 용장으로써의 면모와 지장으로써의 면모를 확실히 발휘했었다.
그렇기에 통렬한 분진 합격전법이라는 명안을 내놓은 지장으로써의 모습 말고도 적진에
스스로 직접 뛰어들어 병사들의 전의를 대폭 증가시킨 것 또한 효과적인 승인의 하나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그랜트는 새로운 타입의 전략가이다. 개인적인 무용과
거리가 먼 남자지만 승리를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한 냉혹한 지장이였던 것이다.
필요한 모든 요소를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구사하는 그랜트는 어쩌면 패도주의 정치 철학
사상에서 나타나는 패도주의적 용병술의 좋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극히
대조적인 두 사람이지만 승리를 얻기 위한 기본적인 자세는 동일했다. 그것은 충분한 병력의
집중과 또 유사시에 적재적소하고 용의주도하게 분산시키고 그 병력들을 신속히 이동시키기
위한 기동성을 잘 살렸다는 점이다. 물론 두 사람은 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숱한
전투에서의 소모전에 대한 대비책을 착실히 확보해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하천(지형)의
이용은 중요한 것이다. 수송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써 육상 교통로 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수상 교통로를 확보해 적으로부터 수상권을 빼앗은 전략안은 시대를 초월해 두루
통하는 명장다운 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강의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가운데 하나였던 좋은 사례입니다. 물론 동방
원정에서 가장 멋진 전투라면 단연 이수스 전투라 하겠지요. 그러나 페르시아는
가우가멜리아 전투에서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고 강적을 잃은 대왕은 특유의 호전성때문에
강대한 적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동방에 대한 신비주의에 심취한 나머지 인도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었죠. 그 때 인도 원정에서 가장 전쟁사상 훌륭한 전례로 남은 싸움이 바로 인도의
패왕 포루스를 상대로 했었던 히다스페스 강 전투입니다. 아마도 이 젊은이에게 있어서 생애
최대의 명전투를 사실상 마지막으로 남긴 처절한 전투로 기억되었을 테죠.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의 왕 포루스를 굴복시키고 마리족 본거지를 함락시켜 계속 진격을 거듭했지만 오랜
원정으로 지친 마케도니아 원정군의 향수병이 거세짐에 따라 왕은 결국 동방 원정을 단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바빌론에서 병사하게 되고 그의 거대한 야망과 그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가 이룬 헬레니즘 문화는
인류 사상 가장 위대한 동서 융합을 낳은 최대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알렉산드로스가 말기에 종종 광기를 보이며 개인적으로도 문제가 많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군사적 차원에서의 업적은 물론 그래도 그나마 헬레니즘이라는 위대한 문명을 건설한
공적은 그의 가장 유일하고 가장 위대한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조금 이야기가
빗나갔군요. 아무튼 그 천재가 영원히 불패로 남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제자인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과 달리 그를 답습한 용병가가 대왕의 생존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그래서
한니발은 말기에 그를 너무도 부러워 했었을 겁니다. 한니발은 2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를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갔지만 그를 답습한 수많은 용병가들, 특히 젊은 용병가 스키피오에게
자마 회전에서 참패했죠. 그런 의미에서 한니발은 적장 스키피오가 자신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는 누구냐는 질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당연히 최고의 장수는 천재의 젊은 패왕 알렉산드로스요. 그는 기병의
중요성을 너무도 효과적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는 더욱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경계를 훨씬
초월한 지방까지 넘어서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밖에 볼 수 없소. 그 다음으로
뛰어난 장군은 에파이로스의 피로스로 병법의 대가이자 숙영지 건설의 중요도를 최초로
깨우친 인물이오. 그리고 그 다음은 바로 나요. 만약 내가 스키피오 당신을 이겼다면 아마도
에파이로스는 말할 것도 없고 저 불패의 신화를 남기고 간 천재 알렉산드로스를
능가했었을 지도 모르오."
이 대사에서도 보면 희대의 명장 한니발이 얼마나 그를 부러워했는 지 짐작이 갈 만한
대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그 후 에파미논다스가 기병의 효율성을 선보인 이래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중핵으로 한 효과적인 전법은 그 한니발에게 계승되었고 한니발은
스승인 알렉산드로스의 용병술을 배워 뛰어난 보병과 기병을 활용한 유기적인 포위 섬멸전의
창시자가 되어 기병 전의 진수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아무튼 이번 두 전투는
아마 지금까지 소개되었던 전투들 가운데 이 마리족 본거지 공략과 빅스버그 공방처럼 가장
훌륭하게 전광석화같은 신속한 기동성과 이를 전제로 한 강습 상륙 작전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죠. 용병술은 참으로 무궁무진하지만 역시 집중과 고속의 법칙은 전략 전술에 있어 가장
위대하고 인류가 모두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절대 진리로 이어져 왔다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한 셈입니다.
첫댓글 어후~ 힘들어~~ ㅠ0ㅠ;; 며칠 걸려서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