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2010년 ‘아이폰4’를 출시하면서 해상도를 높인 LCD에 '레티나 디스플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디스플레이 때문에 아이폰은 화면 크기는 이전과 같고 픽셀의 개수는 기존보다 4배 더 또렷해진 화면을 갖게 됐다. 이 화면은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분명 이전과 똑같은 것을 보여주는데 훨씬 선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까이 들여다봐도 어지간해서는 픽셀이 보이지 않는 이 화면을 애플은 레티나 디스플레이라고 불렀다.
이후 애플은 2012년 3월 3세대 아이패드를 내놓으며 아이패드에도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적용했다. 9.7인치, 1024x768 해상도를 내던 아이패드는 아이폰과 마찬가지로 4배 선명한 화면을 얻게 됐다. 곧이어 6월부터 맥북 프로에도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적용했다.
레티나는 ‘망막’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애초 이 화면을 꺼내놓은 이유는 눈, 그러니까 망막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픽셀 하나의 크기를 줄여 더 세밀한 화면을 표현하려는 데에 있다. 종이에 인쇄한 것처럼 깨끗이 보이려면 적어도 1인치 안에 300개를 찍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점들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는 그저 ‘같은 크기의 화면에 해상도가 늘어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정작 이 화면을 실제 만든 회사의 다른 제품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애플의 상표이긴 하지만 애플은 정작 디스플레이를 개발하거나 생산하지도 않는다. 그저 몇 곳의 제조사에서 디스플레이를 구입해서 쓸 뿐이다. 다른 제조사들도 레티나와 같거나 더 나은 디스플레이를 갖고 있다. 같은 이미지를 더 많은 픽셀로 표현하는 것마저도 애플이 처음 쓴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애플이 여기에 레티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제품을 흥행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유명한 디스플레이가 돼 버렸다. 마케팅 용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용어는 우리 입에 익숙해졌다. 컴퓨팅 장치들이 해상도를 어떻게 키우고 이를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을 업계에서 받아들인 셈이다.
15인치 레티나 맥북 프로는 40인치 이상의 풀HDTV보다도 더 많은 픽셀을 더 작은 화면에 집어넣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처음 도입한 아이폰4는 326ppi(pixel per inch)의 해상도를 제공한다. 326ppi란 1인치의 선을 긋는 데에 326개의 점을 찍는다는 의미다. 이전 디스플레이는 163ppi였다.
애플은 이 디스플레이를 더 선명하게 보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높은 해상도의 디스플레이를 활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더 넓은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같은 크기의 화면이라도 해상도가 높아지면 한 화면에 더 많은 창을 띄우거나 더 많은 정보를 보여줄 수 있다. 지금까지 PC의 디스플레이 해상도가 높아진 것은 이런 효과를 위해서였다. 그 대신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글자나 이미지의 크기는 작아진다. 개별 글자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쓰는 픽셀 개수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 대신 같은 크기 화면에 더 많은 정보가 들어올 수 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왼쪽)와 일반 디스플레이(오른쪽)가 보여주는 화면. 똑같은 아이콘과 글자에 더 많은 픽셀을 집어넣은 것이 눈에 띈다.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의 또 다른 활용은 같은 결과물을 만드는 데 더 많은 픽셀을 쓰는 것이다. 더 많은 픽셀로 그려내면 곡선이 울퉁불퉁해 보이는 계단 현상이 줄어들고 글자도 종이에 찍어낸 것처럼 세밀하게 보이는 효과가 난다.
전자와 후자를 같은 크기의 디스플레이와 4배 해상도의 디스플레이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전자는 글자 크기는 4분의 1로 줄어들고 4배 더 넓은 공간을 얻게 된다. 후자는 쓸 수 있는 공간은 같되 좀 더 선명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는 두 번째 효과를 노린 화면이다.
가로 · 세로 2배씩, 바뀐 해상도 혼란은 없어
해상도를 바꿨지만 이용자나 시장의 혼란은 없었다. 대부분의 기존 앱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작동했기 때문이다. 운영체제나 앱 모두 화면 구성을 그대로 두고 표현하는 화소만 늘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딱 2배씩으로 늘리니 개발자들도 기존 앱을 확대하는 데 무리가 없다. 20%, 50%씩 해상도를 늘리는 것에 비해 딱 4배씩 늘어난 화면의 효과였다. 레티나 디스플레이용 앱을 빨리 만들 수 있으면 서둘러 내면 됐고 그렇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애플의 레티나 디스플레이의 기본 원칙은 이전 디스플레이보다 4배, 그러니까 가로 · 세로로 각각 2배씩 더 많은 픽셀을 이용한다는 데 있다. 픽셀 250개로 만들던 아이콘을 4배 늘려 1천개로 만들면 얼마나 선명하게 보일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아이폰3GS와 아이폰4의 화면을 떠올리면 된다.
현재 애플은 스마트폰, 태블릿, PC에 5가지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가진 제품을 내놓고 있다. 그 종류는 아래 표와 같다.
애플의 레티나 디스플레이
아이폰은 163ppi에서 326ppi로, 아이패드는 132ppi에서 264ppi로, 맥은 227ppi로 올렸다. 아이폰을 제외하고는 초기 레티나의 기준으로 잡았던 300ppi를 넘기진 못했지만 화질은 확실히 좋아졌다. 그리고 모두 이전 세대 디스플레이보다 정확히 4배 많은 픽셀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레티나 디스플레이도 완벽한 것만은 아니다. 글자는 모두 선명해지고 전용 앱들은 또렷이 나오지만 이미지는 가로 · 세로 2배씩 확대하다 보니 깨져 보일 수 있다 특히 웹서핑을 할 때 레티나에 맞추지 않은 웹페이지의 그림들은 뭉개져 보이는 경우도 있다. 애플의 레티나 뿐 아니라 최근 비슷한 방식으로 화면을 확대해서 구성하는 장치들이 늘어나다 보니 일부 웹사이트들이 이에 맞추기 시작했지만 대중화 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는 애플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방식의 디스플레이를 적용하고 있다. 윈도우8은 모니터 크기와 해상도에 맞춰 어디서든 비슷한 화면을 구성하도록 했다. 13인치 1366x768 해상도를 기준으로, 이보다 기기의 해상도가 높으면 더 또렷하게 낮으면 약간은 부옇게 보일 수 있지만, 보여지는 결과물의 정보량은 같도록 확대하거나 축소한다. ‘스케일링’(scaling)이라고 부른다.
삼성과 구글이 함께 만든 넥서스10 태블릿은 10인치 디스플레이에 2560x1600으로 300ppi 화면을 채용했다. 이 10인치 화면 안에는 기존에 1280x800으로 보여주었던 화면을 그대로 담아 아이콘, 글자 등이 선명하게 표현된다. 2013년 주류를 이룰 풀HD 스마트폰들도 5~6인치 화면에 1920x1080 픽셀로 해상도가 크게 늘어나는 만큼 글자를 더 작아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같은 정보를 더 많은 픽셀로 보여주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4배 해상도는 아니어도 레티나와 비슷한 방식들이다.
넥서스10은 10인치 디스플레이에 2560x1600개 픽셀을 집어넣고 1280x800 해상도의 태블릿과 같은 크기의 화면을 보여준다. 그만큼 더 또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