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체로 사고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물론 제 주관적인 판단하에서요.
사실 학창시절 공부는 열심히 안했지만
국문학도로서 소설의 정의만 생각해도
세상의 모든 일에 열린 사고를 해야하니까요.
소설의 정의는 바로 "개연성 있는 허구"죠.
개연성이란 있을 수 있는 일이란 뜻입니다.
사실 인간 세상에 일어날 법한 일들을 꾸며서 쓴 글인데
가상의 것조차 수용하는 소설을 읽고 수긍하면서
실제 일어나는 인간사 일에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며 침 튀기는 일이 마땅치 않거든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능한 일이었던 겁니다.
워낙 다양한 군상의 집합이 인간사니까요.
그래서 처음 신자가 되었을 때 난감했습니다.
그저 교회의 가르침대로 절 재단해야 하나보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가진 편견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성스러워야 한다는 강박증같은 거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저를 옭죄는 것 같았지요.
교회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우선 원리가 성서에 있는데도
그저 지켜야할 것들을 강조하다보니
그만 자유보다는 의무와 책임만 강조를 하고 만 겁니다.
사실 자유는 제멋대로의 방종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개념이고
교도권 안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톨릭 정신에 합당한데
그만 되는 것과 안되는 것에 얽매어 늘 자신을 판단하고
늘 죄의식에 시달려 사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는 저 자유롭냐구요?
저도 똑 같습니다.
제 자신의 부족함에만 눈을 고정시켜
자주 감사기도를 잊어 버립니다.
서론이 길었지요?
전 얼마전 유행하는 반신욕 때문에 욕조에 앉아 책을 봅니다.
습기로 책이 물에 눅눅해지는 관계로
신문을 가져다 보는 일이 다반사인데
어느 날 문득 손에 잡힌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는
저의 어린 시절 생각을 나게 했지요.
노틀담의 종지기 콰지모도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많은 조건의 육체적 장애를 가진 인간입니다.
학문적이고 도덕적 윤리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세상 이치를 잘 알고 있을
성당 부주교의 집시여자에 대한 비틀린 사랑이 콰지모도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대비되며
한 거룩한 사제가 육체적 욕구로 인해
어떻게 파멸되어 가는가가 주요 줄거리이며
그것은 교회의 후미진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았지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부조화는 이 소설의 가장 심한 역설입니다.
클로드 부주교의 욕정과 콰지모도의 순애가 다소 과장이 되었다해도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건 사실입니다.
어쨋든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간단한 교훈부터
중세의 마녀사냥 그리고 노틀담의 고색창연한 성당 분위기
그 안에서 교회의 위선과 불의에 대한 따끔한 질책
그리고 프란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나 소외계층의 봉기같은
시대적 배경이 짙게 깔려 있는
이 책은 희랍인 조르바나 푸코의 진자에서 만나는
인간적 위선이 예외없이 폭로됩니다.
학문을 좋아하고 반듯한 성품의 클로드 부주교가
16세의 집시 여자에 한 눈에 반해
감추인 자신의 욕정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파멸에 이르게 되는 전 과정을 읽으며
전 인간에겐 이성보다 감정이
더 우선하는 게 아닌가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난감한 건 교회의 암울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속한 교회의 아픔을 어쩔 수 없이 만나게 되는데
전 비로소 열린 마음이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누구나 저럴 수 있다는 생각이요.
왜냐하면 저 대학 때 우리 남편 만나던 때
시골의 유교적인 배경하에서 연애결혼?
그건 자살골입니다.
그런데 저 그렇게 결혼했습니다.
그 사람 만나서 좋은 감정 생기기전엔
남자를 만나면 아주 버린 애들인 줄 알았었는데
막상 어울리고 보니 즐겁기만 하드만....
절대 남자와 얼굴도 안보는 참한 색시란 말 들었어야하는데
전 연애결혼 해서 아주 동네에서 찍힐 줄 알았는데
시집 잘 갔다하니 참 헷갈리는 때였습니다.
처녀적 제가 사랑에 빠졌다는 게 저 자신도 용서가 잘 안돼
그만 세상의 부조리한 사랑에 대해
열린 사고로 이해할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속하지 않은 많은 경우의 사회적 지탄도
그 안에 들어가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거든요.
내 자로 누군가를 재단하는 건
어쩌면 좁은 경험이나 편협에서 나오는 독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 하셨는지도 모르죠.
당시의 율법이 금하는 많은 일들에 열린 사고로 창녀를 용서하고
세리를 받아들이시는건 아닌지...
어쨋든 노틀담의 꼽추가 우리 교회의 가상적 병폐의 고발이어서
한편 제 자신을 꼬집히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인간 사랑은 언제나 승리임이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첫댓글 "노틀담의 꼽추"는 저와 울 아이들도 좋아하는 책이에요...님의 시각으로 보는 이야기 기대됩니다...행복한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