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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예수님의 마음
누가복음 9:51-6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무덥다. 이 무더위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설교를 하신다면, 아마 넥타이를 풀고, 가운도 벗지 않으셨을까?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처럼 하지 못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마음을 스스로 판단하는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런 마음을 기억하고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철저한 기준으로 삼았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나 행동이 아니면 제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이 가는 곳만큼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춘다’는 기준을 정하였다.
그렇지만 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고 묻는 일은 참 중요하다. 색동교회 첫 번째 비전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일이다. 얼마나 귀한가?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 기도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있으니 얼마나 큰 보물인가. 내가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 가운데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할 ‘일용할 기도’를 5가지를 제안한 바 있다. 날마다 기도해야할 내용은 거창하지 않다.
‘내 믿음, 가정, 건강, 생업,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
어쩌면 너무 내 울타리 안에만 관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들을 수 있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하시지 않았던가? ‘나 자신’을 위해 먼저 제대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남을 위해서도 기도가 나온다.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내 믿음’이다. 믿음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관계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관계가 나쁘면 얼마나 불편하고, 불행한가? 누구에게나 처음 믿음은 씨앗과 같다. 이걸 자꾸 키우고, 성장시켜야 한다. 믿음이 커야 여유가 생기고, 두려움이 없고, 남을 사랑하는 넓은 마음이 된다. 그런데 어떤 분은 믿음을 김치냉장고에 고스란히 보관해 둔다.
인생을 살면서 종종 어려움이 닥친다. 누구나 예외가 없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실망을 하고, 잠시 좌절도 하지만 다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한다. 그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희한한 도우심을 체험한다.
사람이 제 능력으로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어찌 하루라도 온전할까? 그래서 늘 감사를 입에 달고 산다. 신앙생활은 일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는 삶이다. 믿음은 오늘을 살면서 영원을 사는 일이다. 믿음은 내 안에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일이다.
1)
예수님의 마음을 찾아 길을 떠나보자. 본문인 누가복음은 ‘길의 복음’이란 별명이 붙어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9:51-19:27) 모두 10장 분량의 내용이 길을 가는 도상(途上)에서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요단 길 또는 해안 길도 있지만, 가장 빨리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방법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로 가는 길로 방향을 잡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앞서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들이 길을 가로 막았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53).
그들이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가시기 때문이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적대적 관계였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우물가에서 자기에게 물을 달라는 유대인 예수님을 향해 의뭉스럽게 대꾸한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그 이유를 덧붙이길, 이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사마리아 주민들의 적대 반응에 더 크게 적대적으로 응수한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우쭐하여 엉뚱한 제안을 한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엘리야 시대(왕하 1:10-12)에 일어난 초자연적인 기적을 마치 자기들도 행할 수 있는 양 교만한 태도였다.
그 둘은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우레의 아들’(막 3:17)이란 별명을 붙여 주셨을까?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을 보라. 예수님은 갈등과 대결을 애써 피하셨다.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55-56).
여기 ‘꾸짖으시고’에 1)이란 숫자가 붙어있다. 다음을 참고하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고대의 사본에 이런 내용도 있다는 것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55).
예수님의 참 마음을 대변하려고 한 필사자의 첨가로 여겨진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생명의 구원이었다. 그러기 위해 ‘대결의 길’이 아니라 ‘평화의 길’을 선택하셨다. 그 원칙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샬롬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
<평화의 얼굴>이란 책을 쓴 법학자 김두식 교수는 이런 말을 하였다. “평화 이야기는 더 추상적이고 고상할수록 더 안전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실천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입니다”. 공감이 간다.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물으면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이 지키려고 하신 원칙을 보라.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무서울 정도로 치열하고, 완벽한 헌신을 요구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작정할 때 주님은 이렇게 되물으신다. 너 정말 가능하겠니? 잘 따져보고, 진중하게 생각해봐라.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집이 있는데, 나는 잠잘 때에 머리 둘 곳조차 마땅치 않은 사람이다. 이런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너 그런 작은 불편함부터 낮아짐과 자기 비움과 섬김과 같은 큰 불편함을 감수하고, 실천할 수 있겠니?’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정말 어려운 법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의 문제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에 예수님은 가정 문제에 대해 냉정해 보인다. 주님은 나로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도록 허락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지극히 원칙적이다. 인간적인 도리도 다해야겠지만, 하나님 나라가 우선이라고 하신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어쩌면 저리 인정이 없으실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주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먼저 가족과 작별하게 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무참하다. 세상에 미련을 두어 하나님의 일을 망칠까 경계하신 말씀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62).
문제는 우선순위다.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자신의 과거에 매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 안 된다고 원칙을 단단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흔히 남들과 대화할 때 ‘하나님’을 자주 말하거나,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거나, ‘복음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실천하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
제이콥스는 미국 뉴욕에 있는 ‘에스콰이어’라는 남성 패션 잡지의 편집자이다. 그는 성경 말씀 그대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딱 1년 동안 실천한다. 그 경험담을 기록한 책이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다. 사실 ‘미친 척’ 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그는 먼저 성경과 역사자료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원칙을 정하였다. 성경 구절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평소 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다는 미국의 그리스도인 태반이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 구절만 지키고 있다고 불신하였다.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목자들의 복장을 하고, 샌들을 신고, 양 한 마리를 이끌고 맨해튼 일대를 돌아다녔다. 무려 일 년 간 그랬다. 성경의 역사가 길다보니 별의별 풍속과 문화가 다 나온다. 그걸 글자 그대로 지키면서 살려니까 온갖 우스꽝스러운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 가정 안에서부터 꼬였다. 정결법에 따라 아내는 한 달에 한 번씩 불결한 여자가 되었다. 아들과도 갈등이 생겼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는 말씀대로 했기 때문이다.
시트콤 수준의 이런 장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제이콥스는 따뜻함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훨씬 강한 40대의 전형적인 뉴요커다. 그런데 1년간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다음에 사람이 달라졌다.
하늘을 보니 우주가 더 이상 무의미한 물리학적 입자들로만 보이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때로 이 세상에는 신성한 빛이 가득 드리워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작은 일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일상생활에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행동에서도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차도를 건널 때 꿋꿋이 신호등을 지킨다. 거짓말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수입의 십일조를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가장 큰 변화는 ‘감사’다. 전에는 특별한 일에만 감사했는데, 지금은 모든 일상에 감사한다. 세상의 소소한 모든 기쁨, 모든 음식,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 물을 마시는 모든 시간,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모든 기적과 같은 사실에 대해 감사드린다. 개인주의로 찌들었던 자신의 삶이 공동체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성경대로 살기위해 ‘미친 척’ 했기에 가능한 변화였다.
3)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여기에서 ‘나는 화평을 원한다’의 히브리어는 ‘아니 샬롬’ 곧 ‘나는 평화이다’라는 말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동격으로 먼저 자신이 평화여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유대교 랍비들은 오죽하면 “샬롬은 하나님의 이름이다”라고 말했을까?
지난 화요일은 우리나라 가장 큰 비극인 6.25 발발 63주년이었다. 내가 출생하기 겨우 11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전후세대인 나는 그 전쟁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 정치적, 문화적인 충격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아마 지금 젊은 세대는 임진왜란이나, 동학혁명이나, 6.25나 다 비슷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났지만 우리 모두는 여전히 그 파장과 영향권에 산다. 요즘 날마다 뉴스에서 보지 않는가? 후유증이 남아있다. 내가 의왕시 평화통일자문위원으로 추천되어, 오는 수요일에 의왕시청에서 위원회 상견례를 한다고 연락이 왔다. 솔직히 말하면 불편하다. 별별 사람들과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마주할까 달갑지 않다. 우리는 원치 않으면서 이념의 문제로 자주 얼굴을 붉힌다. 부모 자녀 간에도 입장이 갈린다. 뻔한 거짓말도 우긴다.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과 욕설이 많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여, 이념 시 하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실천하다가 욕을 먹으면 하늘의 상이라도 받는다. 사실은 욕하던 사람들에게 존경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성경에서 하라는 걸 안 해서 생기는 문제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화해와 평화의 실천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매 순간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하면 손해 보는 일이 많아질 것이다.
찰스 쉘던의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소설은 그런 고민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해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책이다.
예수님은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때에 다만 장벽을 허물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어떻게 포용할까에 관심을 가지셨다.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 됨을 회복하는 일에, 다시 말하면 사랑의 마음으로 구원에 집중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다. 새로운 차원의 삶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평화는 선택적인 문제가 아니다.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아니 샬롬’, 곧 ‘내가 평화’여야 한다. 평화와 나를 동격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 교회 슬로건은 ‘젊고 따듯하며 평화로운 교회’이다. 나는 이 슬로건이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 닮았다고 믿는다.
‘젊은’은 나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젊은 사고’는 주류의 생각과 다르다. 늘 소수의 견해 취급을 받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엉뚱하지만 신선하고 창의적이다. ‘미친 척’하고 교회를 바꾸어 나가려는 것이다.
‘따듯하며’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다. 색동교회는 무지개다. 누구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결코 소외 시키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사람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긴다.
‘평화로운’은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마음이다. ‘샬롬 샬롬’은 내 안의 평안이요, 내 밖의 평화이다. 평화의 길은 예수님의 길이다.
이 슬로건이 우리교회 7가지 비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목회방향이고, 여러분과 마음을 모은 공통의 생각이다.
늘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시길 바란다. 그런 내 안의 평화, 우리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