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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오전 3시40분 여의도 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아오시던 시인은 향년 85세를 일기로 이승과의 인연의 끈을 놓으셨다. 시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소설가인 딸 자명씨(47)와 사위 김의규 성공회대 교수(47) 그리고 손녀 김향나씨가 지켰으리라. 필자는 지난 2002년 10월 4일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5-84번지 구상 시인의 본적지에 세워진 구상문학관 개관식에 관여했던 사람으로 선생님의 영면소식을 듣고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문학관 일을 무사히 마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필자로서는 선생님을 꼭 뵙고 힘든 병마 속에서도 개관 준비가 제대로 될 수 있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마음씀에 대해 인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일 저일 핑계로 가지 못했던 필자는 결국 오늘 시인께서 영원히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먼 하늘이 속울음을 우는지 먹구름이 짠하다. 필자는 다시 뵙지 못한 곳으로 떠나신 시인에게 늦은 인사를 하는 심정으로 문학관 개관 당시 시인께서 하셨던 말씀과 시인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내용을 더듬어 본다. 세계 200대 문인 시인 구상 구상 시인은 문화적인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 뽑은 세계 200대 문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셨던 분이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시집 <응향> 필화사건에 휘말려 월남한 후 10여 편이 넘는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 등을 펴냈으며 마지막 시집으로 <인류의 맹점(盲點)> 을 발표해 정갈한 노 시인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시인의 작품은 일찍부터 불어와 영어, 독어,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우리 문학과 시인의 시를 감동적으로 각국 사람들에게 전했다. 구상 시인의 발자취 구상 시인은 함경남도 원산 태생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은 서울 태생이다.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으며 4살 되던 해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구종진씨)를 따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예의 반골기질을 드러냈고 문학이라는 그릇에 자신의 시대적 반항심을 담아내며 유랑의 생활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다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해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각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며 후에 자신의 정신적 근원을 다져주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구상 시인은 당시 문예창작과와 종교과 중 어떤 과를 선택할 것인가 고민했다고 하는데 결국 종교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그의 시에 나타난 초월적 종교관의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해 본다. 1941년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구상 시인은 잠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하다 1946년 "응향" 필화사건(발표한 시가 반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에 연루돼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월남한 구상은 연합신문사에서 일했으며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만들어 당시의 전시상황을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 후 영남일보사 주필 겸 편집국장, 매일신문 상임고문을 거쳐 경향신문사 등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효성여대를 필두로 서울대, 서강대 그리고 하와이대 등 교육계에서도 그의 지성을 풀어놓았다. 구상 선생과 왜관 그리고 그의 아내 현재 구상문학관이 있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은 구상시인의 본적지이다. 1953년 베네딕도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내려왔으며 1974년까지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했다. 시인이 왜관에 본적지를 둔 이유는 혹여 북에 있던 가족이 내려오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집을 팔지 않은 것은 그 가족들에게 재산으로 남겨주기 위한 때문이었다고 이유를 설명하셨다. 전쟁의 아픔을 시인도 겪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해준 대목이었다. 구상 시인에게 왜관은 자신을 풀어내는 시다. 시제로 많이 사용했던 낙동강이 흐르는 곳. 그래서 퍼내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구상 시의 원천. 병색이 짙었던 선생의 청년기를 구세주처럼 받아내 왜관의 관수재에 시인의 삶을 온전하게 안착시켰던 아내와의 사랑, 자식들과 애살스런 정을 나누던 곳. 그래서 구상 시인에게 왜관은 곧 아내다. 평생을 의사로서 자신의 생명줄을 끈질기게 이어준 아내 서영옥 여사다(1994년 타계). 그 구도자적 시의 원천이기도 한 아내는 줄곧 폐병에 지쳐 지내던 시인을 구원해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상 선생의 형인 구대준 신부가 주임 신부로 있었던 흥남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대건 의원 의사로 근무했던 서영옥 여사. 그녀는 그곳에서 구상 시인과 연을 맺었다. 그 후 고약하고 제멋대로인(시인은 아내에게 있어서 자신을 그렇게 말했다) 환자 구상을 위해 아내는 전국 곳곳의 병원을 전전하며 헌신적인 간병에 나섰다. 그러다 구상 시인이 시작업에 몰입하고 요양도 할 수 있도록 왜관에 구상 시인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줬다(시인은 그 공간을 정양소라고 표현했다). 관수재(觀水齋)라고 이름을 지은 구상 시인의 거처는 한 눈에 보이는 푸른 풍경들이 시인의 가슴에서 시를 우려내기에 지극히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구상 시인은 이곳에서 많은 문우들, 특히 화가 이중섭과 교분을 쌓으며 유명한 "강" 연작시를 탄생시켰다. 그 중 한 작품을 잠시 감상해보자 강(江)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석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먹는 짐승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구상 구상 시인의 인맥은 상당히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단이나 예술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계에서부터 과거 승리일보에서의 활약상이 인연이 된 군 인사들과도 두터운 교분을 맺었다. 그 중 화가 이중섭과의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왜관의 관수재(觀水齋)에서 함께 기거했던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단란한 구상 시인의 가족을 이따금씩 그렸다고 한다. 한번은 병색이 짙은 구상에게 천도 복숭아를 그린 그림을 주며 쾌유를 기원했다고 한다. 구상 시인은 그 "복숭아 그림" 덕 때문인지 지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회상하셨다. 구상의 문학세계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걸레처럼 더럽고 추레한 내 마음을 그 물에 헹구고 씻고 빨아보지만 절고 찌들은 때들은 빠지지 않는다. -98년 시집 <인류의 맹점>에 수록된 "근황" 중에서- 지극히 자기 고백적인 성찰의 시를 많이 썼던 구상 시인은 이렇게 평생을 기독교적 존재관으로 살며 그것을 투명한 시적 예지로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건국신화와 선불교적 명상, 노장사상까지 포용하는 사상적 기반을 바탕에 두고 시를 써왔다. 맑고 투명한, 거기에다 사상적 통합을 시로써 이루어낸 시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구상문학관 구상 시인은 아주 오래 전부터 관수재(觀水齋)를 예술가 정양소로 지을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은 지난 2002년 10월 4일 구상문학관이 건립됨으로 이루어졌지만 구상 시인은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문학관을 불편해 했다. 구상 시인이 문학관 개관식 때 띄운 초대의 글에서도 그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대목을 소개해 본다. 저의 진솔한 심회 오늘 저의 생애에서 가장 영예롭고 은혜스러운 자리에 제가 앞장서 참석하여 감사도 드리고 진심의 회포도 표명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온데 이렇듯 노병(老病)으로 상상만 떠올리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긴 하오나, 한편 돌이켜 생각하오면 그러한 생광(生光)을 누리려는 것이 도리어 과욕으로서, 오늘의 이 신령한 섭리가 저에게 가장 합당한 상태라고 여겨지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이제는 꽤 많은 고금의 문인들의 추모비나 기념관이 건립되고 있으나 그 모두가 사후에 이뤄지는 것이요 생존한 인사들의 문학비 등은 있어도 아직까지 문학관은 자력적인 것이 몇 개 있으나 이번 저의 문학관처럼 완전히 타력에 의해 건립되는 것은 문학사상 최초의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건립지 자체마저도 칠곡군이 시가로 사들였으며, 오늘날까지 그 건축 현장에 저는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는고 하니 제가 이 고장에 20년이나 거주하면서 연작시 <밭일기>, <그리스도 폴의 강>등 작품을 쓰기는 했지만 이 본적지가 된 향토에 공사간 추호도 기여·공헌한 바가 없고 또한 저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우리 문단을 비롯해 일반 독자들에게도 애독·애송된다기보다는 시쳇말로 "뭐 별로"요 오직 80여 평생을 쓴다는 그 하나로 소위 원로시인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실상입니다. 그래서 도야지 꼬리만한 그 허명(虛名) 자체가 이 문학관 건립의 연유가 되고 있다 하겠는데, 제가 이러한 사실을 최초부터 인지하고 파악하고 있으며, 사양하기도 하고 주저하기도 하고 내심으로는 문학관 명에서 "구상"을 제거하고 "칠곡"이라고 제시하고 싶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위선적 허세가 될까봐 자제하고 있었던 바입니다. 그런지라 이 자리에서의 저의 공언을 받아들이시어 가령 제가 살아서나 죽어서나 수용해 주시기 바라오며 또한 군민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실제적으로 그렇듯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이런 자리에 이렇듯 자기 술회만을 하여 무례가 될지 모르오나 저의 진솔한 심회이오니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 보잘것없는 내 이름을 건 문학관인데…내가 가야하는데… 내가 몸이 아파서 못 가…그래서 이렇게 내 마음을 밝히는 글을 썼어…날 위해 축하한다고 서울에서도 많이 가는 모양이야…허허 그런데 내가 못가네…." 이 글을 보내셨다고 전화를 통해 더듬 더듬 숨찬 목소리로 심경을 꼭 전해달라고 말씀하셨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이제 시인의 자리를 대신할 구상문학관 이제 구상 시인은 즐겨입던 흰 모시적삼처럼 깨끗하고 흰 발자국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를 느끼려면 이제 왜관에 있는 구상문학관에 가야 한다. 어쩌면 구상문학관은 구상 시인의 빈자리를 대신할 공간이 될 것이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그 지역의 특색을 잘 살리고 지역민들의 문화적인 기반을 갖춰 가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문화기반사업으로 지목되었고 실현되었던 구상문학관. 한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는 취지와는 다른 의미로 세워졌지만 이제 생의 마감으로 인해 진실된 본분을 다할 때가 된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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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1 오후 3:12 | ||||||||||||||||||||||||
ⓒ 2004 OhmyNews |
[삶과 추억] 별세한 구상 시인 new | 2004.5.11 (화) 18:51 추천:0 조회:129 | |||
http://blog.joins.com/jsh96/2312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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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身手)야 토종(土種)으론 멀쩡하다. 이목구비가 비교적 정돈되고 키도 알맞게 큰
편이어서, 소시적엔 에헴! 미동(美童).미남(美男)이란 소리도 더러 들었다."(자전적 산문 "예술가의 삶" 중에서)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말년에는 짤막한 턱수염을 트레이드 마크처럼 길렀던 고(故) 구상 시인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와 특유의 친화력으로 문단 안팎에 드리운 영향력이 컸던 품 넓은 시인이었다. 5.16 직전에 쿠데타 모의가 발각돼 쫓기는 신세가 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한달여 숨겨준 게 계기가 돼 그와 친해진 사연은 유명하다. 고인은 주변에 朴전대통령을 거론할 때면 항상 "박첨지"라 불렀다. 자전 연작시인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에는 쿠데타 성공 사흘 후 朴전 대통령이 그를 국제호텔로 불러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 주셔야지!"라고 청하자 고인이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 두세요!"라고 고사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고인은 그런저런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이중섭 미술상과 공초(오상순)문학상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인은 6.25 전쟁 등 역사적 격동기에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해 목소리를 높였다. 59년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민권수호 국민총연맹의 문화부장직을 맡았다가 옥고를 치른 게 대표적이다.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교육사업 위촉을 받아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네살 때 원산 인근 덕원으로 옮겨가 그 곳에서 자랐다. 열다섯살에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했고, 이후 공사판 인부, 야학당 선생 등을 전전하다 일본으로 밀항, 니혼(日本)대 종교과에 입학했다. 해방 후 원산으로 돌아 온 고인이 46년 월남한 것은 시집 "응향"에 발표한 "여명도""밤""길" 등의 시가 퇴폐적.환상적 요소를 담고 있고 북한 당국에게 반동적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그런 이력은 고인의 문학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고인의 문학세계는 "현란한 수식을 피하는 직접적인 시어로 역사적 현실과 종교적 구도의 경지를 추구한 것"으로 요약된다. 고은 시인은 "고인의 시는 시적 기교보다는 표현의 직언성, 종교철학적인 주제가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고인의 개인사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젊어서 폐결핵을 앓았던 고인은 60년대 중반 폐수술을 받아 한쪽 폐가 없이 살았다. 87년과 97년에는 두 아들을 차례로 잃는 슬픔을 당했다. 고인은 지난해 7월 월간 "문학사상"에 발표한 "저승의 문턱에서"라는 시에서 개인적인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나이도 80세 중반이나 되었고/젊어서 폐수술을 두번이나 하여/호흡기능의 퇴화로 문밖엘 못 나가고/ … //하지만 이제 막상 저승의 문턱에서/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외면은 멀쩡하고 번듯까지 하지만…" 고인은 노환으로 투병 중이던 지난해 10월 장애인 문학잡지인 계간 "솟대문학"에 2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INFORM@JOONGANG.CO.KR> |
프랑스의 드골은 앙드레 말로를 만났을 때 “마침내 인간을 만났다”고 말했다고 한다. 구상 시인이야말로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풍미한 ‘인간’이었다. 80평생을 자신의 시 ‘모과 옹두리’처럼 울퉁불퉁한 인생굽이를 거쳐 왔지만 주위 사람 사랑하며 사람냄새 나게 살고 간 분이라는 뜻이다. 화가 이중섭, 문인 오상순 등 기인(奇人)들과의 일화도 유명하지만, 혁명가 박정희와도 친구처럼 지낼 만큼 교유폭이 컸다.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박정희 대통령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이 같은 진혼시를 쓰며 망자의 안식을 빌었다. 박 대통령과의 교분을 못마땅해했던 주위에서 조시(吊詩)까지 쓴 것을 따져 묻자 “친구니까” 했다는 답변에서 그의 면면을 느낄 수 있다.
잔정이 많다 보니 오해도 받았을 만하다. 구상 시인은 생전의 이중섭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요절 후에도 그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애썼다. 그 덕에 이중섭은 스타가 되었지만 일부에선 지나치게 신화를 만들어 냈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화가 친구들을 모아 이중섭 미술상을 만들고, 제주도에 이중섭거리까지 조성한 그의 우정 어린 집념은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와병 중에도 이중섭상 시상식에 나와 “듕섭이는…” 하며 새로운 기억들을 들려주던 그도 이제 중섭의 곁으로 가고 말았다.
구상 시인은 직함이 많았다. 그러나 거의가 명예직일 뿐 평생 이렇다 할 감투 하나 쓰지 않았다. 박 대통령 시절에 여러차례 정계입문 제의를 받았으나 피신까지 하면서 ‘문학의 길’만을 걸었다. 그 결과 생전에 문학관이 설립되는 복도 받았다. 관수세심(觀水洗心)―’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 자세로 살았던 노시인은 결코 그냥 가지 않고 ‘오늘’이란 화두를 남겼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정중헌 논설위원 jhchung@chosun.com">jhchung@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