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과목은 경쟁이 치열해 힘들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과목을 진로에 맞춰 공부할 수 있어 좋다. 연합형 교육과정으로 <문예창작입문> 수업을 듣고 있다. 기존의 국어 수업은 모의고사나 내신을 위해 공부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수업은 시험을 위한 수업이 아니라 내 진로나 나만의 생각을 온전히 담아 협동적으로 수업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서울 불암고 2학년 학생들이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연구한 보고서 중 한 대목이다. 서울의 교육특구 한복판에 위치한 공립고교인 불암고는 학생들이 느끼는 이런 갈증을 담아내기 위해 과감하게 전면 개방형 교육과정을 선택했다. 교육과정 담당 한은경 교사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 학생들의 선택 폭을 최대한 열어줄 수 있는 개방형으로 편성하자는 데 자연스럽게 학교 구성원들의 뜻이 모아졌다”며 “대입에 대한 관심이 높은 교육특구 안에서도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학생들의 과목 이수 이력과 교과 영역을 정성 평가하는 학생부 종합 전형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취재 정애선 기자 asjung@naeil.com 사진 전호성
전면 개방형으로 설계하니 선택 과목 경우의 수도 다양
불암고는 2009 개정 교육과정 당시에도 사회와 과학 교과 안에서 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열어뒀다. 2015 개정 교육과정 도입을 준비하며 개방형에 초점을 맞추는 데 크게 이견이 없었던 것은 이런 풍토가 이미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8학년 입학생 기준 불암고의 교육과정은 2학년 때 5개 선택 과목을, 3학년 때 9개 선택 과목을 전면 개방형으로 편성했다. 보통 고교들이 사회와 과학 교과 일반선택이나 진로선택 과목을 묶어 ‘택 3’ 정도로 편성하는 데 비해 선택의 폭을 더 넓힌 것이다. 교사들은 수업과 평가 부담이 다소 늘더라도 물리 담당이라면 <생활과 과학> <물리Ⅰ> <물리Ⅱ> 세 과목을 맡을 수 있다는 마음의 준비도 이미 되어 있다고 했다. 이 같은 교육과정에 학생들도 예상보다 잘 적응하는 모습이었다. 한은경 교사의 얘기다.
“학생들이 입시 유불리 때문에 선택을 주저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신의 관심 분야나 희망 진로에 따라 진지하게 선택하더군요. 전면 개방형으로 편성하긴 했지만, 필수 이수 단위 기준이 있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는 계열 구분에 따라 유형화되더라고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럼에도 2학년 280여 명 학생들의 선택 과목 경우의 수가 208가지나 나왔다는 거예요. 2학년 선택 과목 5개가 모두 똑같은 학생이 6명을 넘지 않았어요.”
학생들의 선택 결과 반영해 보완해간 교육과정 첫해 교육과정
편성 경험을 살려 현재 1학년 학생들의 교육과정을 설계할 때는 좀 더 개선해나갔다. 특히 과학의 경우 Ⅰ과목을 먼저 배우고, Ⅱ과목을 이수해야 하는 위계 규정 때문에 2학년 때 과학 과목을 여러 개 선택해야 3학년 과정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5개 과목을 선택지로 제공했음에도 이공 계열로 진학할 학생들이 수학과 과학 과목을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게 여의치 않았다. 첫 설계부터 교육과정 편성을 맡아 온 김태완 교사의 설명이다.
“첫해와 다음해 교육과정을 편성하면서 여러 번 수정을 거쳤어요. 첫해 3학년 과정으로 편성한 <심화수학Ⅰ>을 다음해에는 빼고, 수능 선택 과목인 <언어와 매체>는 2학년에서 3학년 과정으로 올렸죠. <언어와 매체>를 2학년 때 선택하면, 수학이나 과학 과목을 적게 선택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이공 계열로 갈 학생들의 과목 선택 폭을 넓히는 쪽으로 조정하면서 진로선택 과목인 <공학일반>도 새로 가져왔어요. 생활·교양 교과에서 선택할 만한 과목이 없다 보니 일부 과목으로 선택이 몰리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인데, 아직 완벽한 교육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의 선택 결과를 보면서 계속 보완해가는 중입니다.”
대입 뒷받침되면 공립 일반고도 충분히 가능
공립고교는 교사들의 주기적인 이동이 불가피하기에 교사 수급 문제 때문에 선택형 교육과정 운영이 사립고교에 비해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 게 사실이다. 실제 불암고 역시 아직은 동일한 과목을 서로 다른 학기에 이수할 수 있는 학기별 편성까지는 가지 못하고, 학년별 편성을 기준으로 설계한 상태다.
다만 운영해보니 학년별 편성에도 나름의 장점은 있었다. 이수 단위를 6단위로 넉넉히 편성할 수 있어 수업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앞으로 학기별 편성 쪽으로 진전시키는 방안을 고민할 계획이지만, 공립고교도 선택형 교육과정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것은 큰 소득이었다.
학생들의 선택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지 않고, 거의 100% 수용해줬지만 우려할 만한 교원 수급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고. 시간표 편성은 물론 고사 운영에서도 노하우가 생겨 하루에 보는 지필평가 과목 수가 학생마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상황까지 올 수 있었다.
한 교사는 관건은 결국 대입 제도가 선택형 교육과정을 얼마나 뒷받침해주느냐에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는 학생들이 선택 과목을 다양하게 이수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등급에 대한 고민이 뒤따를 수밖에 없어요. 일부에서 14명 정도가 최종 선택했다면, 등급이 산출되지 않는 13명 이하 소인수 과목으로 유도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상대평가에 따른 등급 문제 때문이거든요. 불암고는 원칙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입시 때문에 인위적으로 조정하게 되면 학생들의 신뢰에도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학생들이 성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소신 있게 소수 과목을 선택했다면 대학에서 이를 충분히 인정해줘야 하는데, 현재는 학생부 종합 전형이 유일하죠. 고교 교육과정에서 석차등급제를 빨리 덜어내고, 대입 제도가 이를 뒷받침해준다면 선택형 교육과정 운영을 망설이는 학교들도 충분히 동기부여가 될 거예요.”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연구한 불암고 학생들은 보고서에 이런 기대를 담았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학생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택 과목’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다. 하지만 아직은 학교별로 교육 여건이 달라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이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교실 공간을 학생 참여 수업에 적합하게 바꾸고, 학생이 학습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평가 방식과 내용 역시 변화하길 소망한다.”
대입 제도를 놓고 다시 재연된 혼란 속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학생들의 목소리다.
전문가의 눈으로 본 불암고
수능 부담 속에서도 학생 선택 존중한 도전 _한국진로진학정보원 진동섭 이사
사진 왼쪽부터 진동섭 이사, 김태완·한은경 교사.
불암고는 학생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주면 학교 교육과정 운영이 안 되고, 시험 운영이 어려울 뿐 아니라 교사 시간표도 엉망이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한방에 날린 학교다.
학교는 수능 공부에 치중해야 할 여건에 놓여 있음에도 많은 과목을 선택하도록 해 학생이 원하는 과목을 학습하게 한다. 학생에게 선택을 맡긴 결과는 크게 문제될 것 없다는 결론이다. 행정 학급 수보다 추가 분반을 해야 할 필요도 생기지 않고, 특별한 유형의 선택을 보이는 학생도 많지 않아 희망을 수용할 만하면서도 똑같이 선택한 학생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 학교 한은경 교사는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한 번 해보면 된다고 말한다. 다양한 선택이라는 ‘무질서’를 넘어 학생을 존중하는 가운데 질서가 있는 모습이다. 학생 선택이 유형화되지 않게 지도해야 하는 점, 학기 이수를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 등 극복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첫발을 내딛는 학교에는 큰 용기를 주는 학교다.
학생들이 말하는 불암고 우리들의 다양한 진로 존중해주는 학교에 자부심 ‘뿜뿜’
Q 학생 입장에서 본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배울 과목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에 대해 학생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서영 불암고에는 인근 학교와 연합형 선택 교육과정으로 <문예창작입문> 수업이 개설돼 있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 시와 소설, 매체 자료 등을 읽고 토론하며 글을 쓰는 이 수업을 골랐는데, 학생 참여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이 수업을 경험하고 나니 선택형 교육과정이 좀 더 실질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보완점을 찾고 싶어 연구하게 됐다.
이채연 이전에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토론하며 협력해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 수업은 대부분 토론 중심으로 진행된다. 선생님이 교실이 아니라 학교 안에 있는 ‘꿈담 카페’에서 수업을 진행하셨는데, 이곳은 찬반 토론을 할 수 있는 대형 책상, 모둠 활동이나 협동 학습을 하기에 좋은 모둠 대형의 책상, 학생들이 서로 설명해주거나 아이디어를 고민할 때 쓸 수 있는 칠판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처럼 학습자 중심 교육이 더 잘 실현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 연구해봤다.
김시후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많이 부여한 우리 학교와 다른 학교를 비교해봤다. 각 학교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설문 조사도 진행했다. 우리와 달리 새 교육과정이 도입됐어도 여전히 기존의 문·이과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학교에서 지정한 과목을 듣는 곳도 있더라. 우리는 학교에서 정해주는 과목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선택해 다양한 조합을 만들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학생들의 진로 다양성을 존중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Q 자신의 관심 분야나 희망 진로와 연결해 특별히 선택한 과목이 있다면?
이지연 1학년 때부터 국어 교사를 꿈꿨다. 국어 과목에 대한 애착이 커서 2~3학년에 걸쳐 <문학> <독서> <언어와 매체> <심화국어> <고전읽기> <현대문학감상> 등의 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선택했다. <고전읽기> 같은 경우는 28명으로 소수가 듣기 때문에 등급에 대한 부담은 있지만, 국어 교과 안에서 세밀하게 더 깊이 배울 수 있는 과목들을 중심에 두고 골랐다. <교육학> 수업도 선택했는데, 도서관에 과목별 교과서를 모두 비치해주셔서 선생님과 같이 보면서 선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런 부분이 과목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많이 줬다.
이태경 국어 교사가 꿈이어서 <문학과 매체> 수업을 골랐다. 수행평가 100%로 교과서가 없는 대신 영상이나 글로 된 매체를 보고 감상문을 쓰거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본 뒤 소설 매체와 영상 매체의 차이를 분석해보기도 했다. 얼마 전엔 직접 5분짜리 단편영화도 만들어봤다. 대본부터 촬영, 편집, 상영까지 전 과정을 우리 스스로 했다.
이채연 초등학교 교사를 꿈꾸고 있어서 예술 과목들이 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미술, 음악 관련 세부 과목들이 많아져서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미술창작> 과목을 선택했다. <문학과 매체>와 <미술창작>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미술창작>을 선택하는 대신 연합형 교육과정에 개설된 비슷한 내용의 <문예창작입문>을 선택했다.
김한수 <생활과 윤리> 수업이 무척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주신 제시문에 대해 친구들과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심리학은 보통 인문 계열 전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 심리에 대해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보니 생명과학에 대한 배경지식도 중요하더라. <생활과 과학>보다는 <생명과학Ⅰ>을 선택한 이유다. 자연 계열로 진학하려는 친구들과 성적이 함께 산출되다 보니 바라는 만큼 나오진 않지만, 잘 모르던 분야를 배우는 과정에서 성장하는게 느껴져서 선택에 후회는 없다.
Q 불암고에서 현재 2학년 학생들은 5개 선택 과목이 전면 개방형으로 편성돼 있다. 혹 더 배우고 싶은 과목이 있었는데, ‘택 5’라는 기준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과목이 있었는지, 이수자 수에 따른 성적 부담은 없는지 궁금하다.
김시후 어학 전공을 생각하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해 <평면조형> 과목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과목 수에 제한이 있다 보니 좀 더 필요한 과목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더라. 3학년 때는 <한국지리> <사회·문화> <여행지리> <사회문제탐구>까지 배우고 싶은 사회 과목들을 대부분 선택할 수 있었다. 다만 <중국어Ⅰ>에 이어 <중국어Ⅱ>까지 배우고 싶었는데, 선택자가 4명밖에 안 돼 결국 폐강이 된 점은 좀 아쉽다.
김서영 교대에 진학하고 싶어 특정 과목에 치우치기보다 <세계사> <생명과학Ⅰ> <평면조형> 등 다양한 과목을 선택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평면조형>은 선택한 인원이 적기도 한 데다 입시 미술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주로 선택하다 보니 상대평가로 성적이 산출된다는 점이 좀 어렵긴 하다.
Q 학생들이 직접 선택형 교육과정에 대해 연구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학교에서 내실 있게 운영되려면 어떤 점이 보완되어야 할까?
이태경 시후 얘기처럼 <중국어Ⅱ>는 선택자 수가 적어 폐강될 수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는 선택 과목 대부분이 상대평가를 적용받기 때문에 <고전읽기>처럼 인원이 적은 과목은 등급 부담 때문에 선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교 연합형 교육과정은 학교에 이미 개설된 과목은 열 수 없다고 들었다. 이렇게 선택자 수가 적어 폐강되는 과목이나 성적 부담이 큰 과목은 연합형 교육과정을 잘 활용할 수 있게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이채연 학생들마다 배우는 과목이 달라지니 아무래도 같은 반 친구들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관계 형성에 좀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반면 연합형 교육과정 수업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지만 토론할 기회도 많고, 꿈담 카페에서 자유롭게 수업이 진행되다 보니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배우는 공간이 달라지면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생기더라. 2015 개정 교육과정을 연구하면서 실제로 교실 공간을 학습자 중심으로 바꾸려는 연구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과목 수업에서도 토론 활동이 좀 더 늘고, 1인 책상 중심의 교실 구조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김시후 교육과정을 연구하면서 친구들과 얘기해보니 2학년 때 듣고 싶었지만 선택 과목 수 제한에 밀려 못 들은 과목을 3학년 때 다시 선택할 수 없는 게 아쉽다는 의견이 있었다. 우리 학교는 지금도 학생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많이 열어줬지만, 이 폭이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김한수 진로가 중간에 바뀌어서 과목 선택을 변경하고 싶은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바로 교체하기는 어렵더라도 이런 학생들을 위해 1학기 때 선택한 과목을 2학기 때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이지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떠오르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획일화된 공교육을 탈피하고 시대 변화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과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교가 ’고교학점제 연구학교’로서 공교육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노력에 앞장서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다만 학생들이 성적 부담을 덜고 소신 있게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상대평가를 보완하는 정책이 하루 빨리 도입됐으면 좋겠다.
사진 왼쪽부터 불암고 이태경·김서영·이채연·이지연·김시후·김한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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