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명이, 그 말(글번 309)이 떨어지자마자 크게 깨닫고, 다시 묻기를 “위의 가장 중요한 말 외에 중요한 뜻이 또 있습니까.”
혜능이 말하기를 “與汝說者(여오설자)는 卽非密也(즉비밀야)니→그대와 더불어 얘기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汝若返照하면→그대가 만약 돌이켜서 너 자신의 내면을 살펴 보
여약반조 면→밖으로 내닫는 우리의 관심을 안으로 돌이켜서 내 자신을 비추어 보는 “반조” 라고 합니다.
密在汝邊이니라."→중요함 이라고 하는 것,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밀재여변 그대에게 있다.→육조 스님이 아무리 큰 법문을 했다한들 그것은 말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 살아있는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에 있는 것이다.
내면에 있는 그것을 살펴볼 줄 아는 그 이상의 중요한 것은 없다는 얘기지요.→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에게 있다.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혜명이 말하기를,
“제가 비록 황매에 있었으나 실로 자신의 참 모습은 살피지 못했으나, 지금 스님의 지시를 입게 되니,
如人이 飮水에 冷暖을 自知로소이다.→어떤 사람이, 마신 물이
여인 음수 냉난 자지 찬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마신물이 찬지 더운지 마신 사람만 아는 거예요. 떠준 사람도 몰라요. 먹어봐야 알지, 네입 하고 내입 하고 같으냐 이거죠.
이제 행자(혜능) 께서는 저의 스승입니다.” *자기는 4품 장군이었고(대원성→다른 책에선 先祖가 장군이었다는데 여기선 본인이 장군 이었다네요.) 스님생활도 오래한 입장이지만, 행자면 어떻고 누구면 어때요?
스승 제자 사이에는 그런 옛적인 형식에는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행자 아니라 청소하는 사람, 어린아이라 해도, 깨닫게 해준 사람이면 그 사람이 스승이지요.
혜능이 말하기를, “汝若如是(여약여시)인덴→그대가 그렇게 생각 한다면 吾與汝(오여로)로 同師黃梅(동사황매)니 →그대와 내가 황매의 오조스님을 같이 스승으로 하자→같이 오조스님을 모시는 사형사제 하자 이 말이죠. 자기는 행자로서, 그래 너는 내 제자야 한다는 건 그렇잖아요? 善自護持(선자호지)하라→오조스님을 잘 지켜드려라.”
혜명이 돌아와서 쫓아오는 대중들에게 저 앞으로 가 보니까 아주 산이 높고 종적이 없더라. 다른 길로 찾아보자. 쫓아오던 대중이 모두 그렇게 여겼다.
혜명은 후에 道明(도명)으로 바꾸었다.→ 스승의 이름자를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요즘 이름 짓는데, 손자 이름에 할아버지 이름자도 들어가 있고, 심지어는 아버지 이름자도 들어가 있어요.
최소한 친족으로 6촌정도 까지는 살펴봐야 됩니다.
첫댓글 如人이 飮水에 冷暖을 自知로소이다... 마신물이 찬지 더운지는 마신 사람만이 안다....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汝若返照 密在汝邊....대원성님...오늘도 감사드립니다. _()()()_
如若返照 密在如邊....감사합니다._()()()_
返照..._()()()_
네입하고 내입하고 같으냐. _()_
返照...._()()()_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밖으로 내딛는 우리의 관심을 안으로 돌이켜서 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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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