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쯤
지금은 울 아들의 고모가 된
혜영이 언니네 집에서
이 음악을 50번두 더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난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열심히 교습 중이었고
광고대행사에 다니면서
무지 군기잡혀(시셋말로,,,빡쎄게,,,,,뜨아~)
일하던 시절이었다.
문득
해질 무렵 퇴근 길
길을 지나다가
거리의 레코드 가게에서 흐르는
이 음악을 듣고
바로 들어가서
"아저씨,,이거 주세요.."했다.
그리고 이 맘 때 한창인
후리지아 몇 단을 사 들고
남편이 출장 중이라 혼자 며칠 지내고 있는
혜영이 언니네 집으로 간 것이다.
그 때
나를 반기며 혜영이 언니가 해 준 말
"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으쓱 + 머쓱)...."
그 날 밤
우리는 둘 다
아무 말 없이
이 음악을 무지 계속 들었다.
아마 누가 옆에 있었다면
둘 다
정상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그 음악 지겹지도 않냐구,,,,하면서
문득
이 음악을 들으니,,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나의 혜영이 언니가 생각난다.
이젠 우린<시누올케>이지만
한때 우린<좋은선후배>였다.
음악은 가끔 내겐
추억재생 기능의 매직이다.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그 세월의 확실한 증거
내 아이가 일곱살이다.
내 아이가 일곱 살이 되는 동안
나는 얼만큼 자랐을까?
편안한
주일 저녁
되시길,,
모두들,,,,
부디 PEACE~
<영화 MISSION에 대한 부연>
1750년,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남미 오지에 있는
그들의 영토 경계 문제로 합의를 보았으나
유럽 한구석의 탁자 위에서 그은 선이 얼마나 끔찍한 사태를
불러 일으킬 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제수이트 신부들은
과라니족을 감화시켜 근대적인 마을로 발전시키고
교회를 세우는데 성공한다.
신부들 중에 악랄한 노예상이었던 멘도자는
가브리엘 신부의 권유로 신부가 되어
헌신적으로 개화에 힘쓰고 있었다.
새로운 영토 분계선에 따라 과라니족의 마을은
무신론의 포루투갈 식민지로 편입되고,
불응하는 관라니족과 일부 신부들을 설득하려는
추기경이 파견되지만 결과는 포루투갈 군대와 맞서 싸운
과라니족의 전멸로 끝난다.
인간성 회복이란 주제로 일관해 온
<킬링 필드>의 롤랑 조페 감독의 작품으로
1986년 칸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다.
사랑 때문에 동생을 죽인 노예 로버트 드 니로와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평화주의자 신부 제레미 아이언스의
상반된 모습이 이질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두 배우가 연기 대결을 벌일 만도 하지만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에 치중하기 보다는
남미의 처녀림과 장대한 이구아수 폭포의 장관에
오히려 치중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
종교적 숭고함에는 절로 숙연해 지지만
역시나 백인우월주의의 색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또한 원시적인 것은 선이고 문명적인 것은 악이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분위기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두 신부의 폭력에 대처하는 방법을 보면
마치 흑인 인권 운동가 였던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보는 듯하다.
영화의 결말이 폭력에 맞대응하는 편이나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편 모두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폭력과 탄압은 근원적으로 큰 과오임을 나타내는 듯하다.
종교적 이유에서든, 지식의 이름을 등에 업고서든 말이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한 이 영화 음악은
마치 자연의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처럼 굉장히 아름답다.
남미 원주민들의 토속음악과 접목시킨 시도과
오보에의 청량한 음색은 영화의 공간적 배경과 완전히 일치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학살로 부터 살아남은 원주민 소녀가
칼과 바이올린중 바이올린을 선택해서 손에 쥐는 모습은
대단한 여운을 남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