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우정 도쿄특파원
"비빈바?" 비빔밥을 뜻하는 듯한데, 'ㅂ'이 사라졌다. 일본 표기법이라면 '바푸(부)'라고 해야 하는데 이조차 생략했다. "국파?" 국밥이 틀림없는데 이번엔 '바'를 '파'로 바꿨다. "네기문추?" 네기는 우리말로 파. 그럼 '문추'는? 주문해보니 우리 파무침이다. 깍두기는 '가쿠테키'란다. '찬자'란 메뉴도 있다. '창난젓' 발음이 어렵다고 재료(명태 창자)의 우리 말을 갖다 붙인 것이다.
한국에선 '스시'를 '초밥'이라고 한다. 일본도 비빔밥을 '마제고항(混ぜご飯)'처럼 일본말로 바꾸면 쉬울 텐데 굳이 제멋대로 부른다. 다른 언어에 대한 모욕 아닌가. 때론 부아가 치민다.
일본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랬을까. 친분이 있는 재일동포 언론인 김향청('쿠리에 자폰' 편집자)씨에게 물었다. 뜻밖의 설명이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야키니쿠(고기구이)집을 했어요. 우린 비빔밥이라고 말했지만, 메뉴엔 일본어로 '비빈바'라고 썼지요. 일본 손님이 '밥' 발음에 서툴렀으니까요. 배려였다고 생각합니다. '국파', '기무치'도 마찬가지지요." '문추'에 대한 설명은 이랬다. "어머니는 무침을 '문치'라고 했어요. 경상도 사투리인 듯해요. 이게 변한 듯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가쿠테키'도 이남 사투리(깍대기)에서 나온 듯했다.
옛날 야키니쿠집은 대부분 동포가 운영했다. 따라서 '비빈바' '국파'란 말은 동포가 생업을 위해 확산시켰다고 짐작할 수 있다. "복잡해도 제대로 표기해야지!" 식당이 어학당이 아닌 이상 이렇게 몰아치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재일동포가 옳았다. 식당이 동포 3·4세로 넘어가고 한식 주도권이 일본 자본으로 이동하면서, 일본 내 한식의 맛이 다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로 달달해지지만 '비빈바'는 원형을 유지하는 편이다. '국파'는 우리 중국집 계란탕 맛이고, 한국 냉면에서 나온 '모리오카 레이멘(盛岡冷麵)'은 분식집 쫄면에 물 탄 듯하다. 속을 풀려고 주문했다가 야릇한 단맛에 숟가락을 놓는 순간, 일본 '육케장'은 '육개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어떤 음식도 '김치'와 '기무치'만큼 차이가 본질적은 아니다. 냄새를 없애려는 일본인의 집착 탓에 기무치는 겉절이 음식이 된 지 오래다. 발효식품인 김치와 달리, 기무치에선 유산균이 사라졌다. 김치의 맛이 시큼한 유산균의 청량감이라면, 기무치의 맛은 입에 척 들러붙는 조미료의 감칠맛이다.
당연히 '김치찌개'와 '기무치치게(チゲ)'도 다른 음식이다. 기무치는 발효가 안 되고 그냥 썩기 때문에 국물이 안 생긴다. 그래서 '기무치 맛' 가공수프를 사용한다. 싱싱한 김치국물을 한 냄비 사용하는 김치찌개와 맛도, 차원도 다르다. '기무치치게'를 '김치찌개'라고 하면, 심하게 표현해 '밀키스'를 '요구르트'라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배우 정우성씨가 일본 TV에서 'kimuchichige'라고 쓴 글을 보였다가 한국에서 반성문까지 쓴 모양이다. "왜 '김치'를 '기무치'라고 썼느냐"는 비판이다. 하지만 상대 일본 여배우가 말한 것은 일본이 가공한 '기무치치게'였다. '김치찌개'가 아니다. 시시콜콜 따지려면 차라리 정씨가 '기무치' 따위를 시종 '김치'라고 말한 것을 탓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우스운 오락프로였다.
그날 방송을 본 시청자로서 전체적인 감상을 말하면, '한국 싸나이' 정우성은 정말 멋졌다. 배우는 그걸로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