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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年 성경적 신앙 뿌리를 깊이 내리는 해(前)
† 구약예언 ☆ (대선지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1서4:11)
사57:1-21절) 우상 숭배의 罪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집의 형제들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주 우애(友愛)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제들의 우애(友愛)가 금이 갔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남긴 유산(遺産)을 누가 더 많이 가지느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약1:15절)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두 번째 이유는 부모님의 *제사 문제'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부모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해 제사를 드리자'는 주장과 어떤 형제는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살아 있는 우리들끼리 더 잘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이런 생각의 차이로 형제들의 마음이 갈라지면서 나중에는 원수(怨讐)로 변(變)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이 세상에 분쟁(紛爭)이 생기는 과정은 이 가정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모습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더 가지려고 욕심(慾心)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들이 서로 다투고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들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서로가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고, 많든, 적든, 만족하면서 살면 될 텐데, 자기의 처지만 돌아보고, 불만을 가지니까 분쟁(分爭)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상숭배(偶像崇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보물(寶物)을 찾는 것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면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자신의 존귀함과 가치價値)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이 삶의 정도(正道)입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정도 (正道)에서 벗어나 딴 길로 새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지 않아도 상관없고, 인생의 의미를 몰라도 좋으니까 그냥 먹고 마시면서 이 세상을 즐겁게 살겠다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때의 일로 짐작됩니다. 므낫세 왕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에 회개(悔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가 멸망(滅亡)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 공헌(供獻)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외국에 갔다가 이방(異邦) 제단(祭壇)의 모형(模型)을 그려 와서 성전(聖殿)에 이방 제단을 만들고 유다 백성들로 이방신(異邦神)을 숭배(崇拜)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나 역대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므낫세는 성전(聖殿)안에 우상(偶像)을 숭배(崇拜)하는 제단(祭壇)을 만들고, 심지어 어린아이를 죽여서 제사를 드리는 인신(人神) 제사(祭祀)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다 죽였는데, 그 피가 예루살렘 이쪽 가에서 저쪽 가까지 가득하였더라고 성경(聖經)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다 백성들이 므낫세의 말을 거부하지 않고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므낫세는 왜 아버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宗敎改革)을 모두 다 뒤엎고, 유다를 우상숭배(偶像崇拜)의 나라로 만들었을까? 바로 욕심(慾心)때문이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크고 더 영향력 있는 유다를 세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가 보기에는 여호와 신앙(信仰)이 너무나 고립적(孤立的)이고, 융통성(融通性)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는 유다가 더 크고 강한 나라가 되어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견주기 위해서 여호와 종교(宗敎)를 깨어버린 것입니다.
Ⅰ.의인들의 죽음(상)
므낫세 왕은 유다의 많은 의(義)로운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왕이 예루살렘에 우상(偶像)을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57:1-2절)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여기서“의인(義人)”은 예루살렘에서 므낫세의 우상숭배(偶像崇拜)정책(政策)에 반대(反對)한 사람들인데, 아마도 그들 중 대부분이 제사장(祭司長)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제사장(祭司長)들이 이방(異邦) 제단(祭壇)을 성전(聖殿)안에 세우는 것을 찬성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우상(偶像)을 끌어들인 것은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다가 이렇게 작고 힘이 없는 이유는 정치적(政治的)으로 너무나 고립(孤立)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나라들과 문물(文物)교류(交流)를 활발하게 하고 정치적(政治的)으로 동맹관계를 맺으면, 훨씬 더 부강(富强)할 수 있는데,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므낫세는 유다가 정치적(政治的)으로나, 문화적(文化的)으로 고립(孤立)된 것이 신앙(信仰)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즉 유다의 신앙(信仰)자체가 너무나 폐쇄적(閉鎖的)이니까 다른 나라와 문화적(文化的)으로 교류(交流)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므낫세는 유다의 왕이 되면서 신앙(信仰)의 벽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이방(異邦) 신상(神像)에 절하고, 급기야는 예루살렘 성전(聖殿)안에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므낫세의 세계화(世界化) 정책(政策)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화(世界化) 정책(政策)의 핵심에는 욕심(慾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너무 적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고,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中心)으로 되어 있는 모든 질서(秩序)를 자기중심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끌어들이고, 우상숭배(偶像崇拜)를 반대하는 자들을 왕의 명령을 어기는 반역 세력으로 몰아서 대거 살육(殺戮)을 자행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므낫세 때 거의 죽은 것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의(義)로운 자들이 죽는 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므낫세가 하는 일을 옳다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너무 하나님께 종교적(宗敎的)으로 속박(束縛)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 답답한 고리를 벗어 던지고, 세계 속에서 훨훨 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외국에서 유학(留學)을 하고 왔든지, 아니면 외국 공주(公主)의 아들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므낫세로부터 죽음을 당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잘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재앙(災殃)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은 편안하게 누워 쉬지만, 예루살렘을 우상으로 더럽힌 자들은 더 큰 재앙(災殃)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가 망할 때까지 그 재난(災難)은 계속될 것입니다. 즉 끊임없이 기근(飢饉)과 질병(疾病)과 전쟁(戰爭)으로 시달리다가 예루살렘의 멸망(滅亡)과 함께 모든 것이 비참(悲慘)하게 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다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신앙(信仰) 뿌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지키는 한에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우상(偶像)을 따라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우상(偶像)을 섬기면, 이스라엘은 살 수가 없고, 저주(咀呪)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고립(孤立)되고, 가난하고, 어려워도 우상(偶像)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면, 망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어디입니까?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잘 살려고 여호와의 종교(宗敎)를 버린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대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잘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마음에는 진정한 평안이 없었고, 완전히 멸망(滅亡)하는 그 순간까지 재앙(災殃)의 연속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하나님 생명의 말씀을 대적하였다가 열 가지 재앙(災殃)을 다 당한 후에 망했던 것처럼 유다도 재앙(災殃)이라는 재앙(災殃)은 모두 다 당하고, 결국은 비참(悲慘)하게 망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처지거나, 늦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닙니다. 또 고립(孤立)되고 융통성 (融通性)이 없어 보이는 것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끝까지 하나님 한 분만 붙들면 살 수 있고, 부흥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므낫세처럼 지도자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거역할 때,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므낫세는 자기를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반역자(叛逆者) 라는 죄명(罪名)으로 죽였을 것입니다. 과연 지도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충성(忠誠)하는 것일까?, 아니면 거역(拒逆)하는 것이 충성(忠誠)하는 것일까?
결론을 말하면, 잘못된 명령(命令)은 거역(拒逆)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忠誠)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도자가 그릇된 명령(命令)을 내리는 것 자체가 의(義)로운 자들에게 큰 고난 (苦難)이 됩니다. 이 고난(苦難)은 당해야지,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므낫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왕을 따른다고, 신앙(信仰)을 버리고, 우상(偶像)에게 절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앙(信仰)의 *정도(正道)를 걷다가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사느냐 죽느냐’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信仰)을 지키다가 죽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편안히 쉬고 있지만, 신앙(信仰)을 배신 (背信)한 자들은 므낫세처럼 온갖 재앙(災殃)을 다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나 직장 상관이 잘못된 명령(命令)을 내릴 때는 불순종(不順從)하는 것이 순종(順從)입니다.
오늘날 정치인(政治人)들이 표심(票心)을 얻기 위해 불교(佛敎)를 방문하여 우상(偶像)에게 큰 절하는 것은 *종교(宗敎)의 자유(自由)*에서 어쩔 수 없지만, ☞ 甲辰年 성경적 신앙 뿌리를 깊이 내리는 해(前) ☜ 교갱원 성도들은 제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偶像)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誡命)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하나님의 엄중(嚴重)하신 계명(誡命)을 하나님과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역(拒逆)했다면. 철저하게 무릎을 끓고 회개(悔改)해야 명품(名品) 가문(家門)과 국익(國益)에 유익(有益)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우상(偶像)에게 절하자고 할 때는 절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順從)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결국 부모님에게도 유익(有益)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말을 잘 듣는 것이 이럴 때는 결코 좋지 않습니다. 아-멘
찬송가 503장 *세상 모두 사랑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