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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음력 9월)
다른이름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말광대, 말놀음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 마상재(馬上才)는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기마술에서 비롯한 마상재는 중국의 전한 때(.C. 74~.C. 49) 환관(桓寬)이 편찬한 『염철론(鹽鐵論)』에 ‘마희(馬戱)’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당서(唐書)』의 「예악지(禮樂志)」와 『석호업중기(石虎鄴中記)』에도 마상재와 관련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마상재와 관련한 기록이 확인된다. 즉 고구려인이 말 타기에 능하고, 백제의 풍속에 “기사(騎射)를 중히 여긴다.”(『후주서(後周書)』)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열전(列傳)」4 이사부(異斯夫)에는 “신라의 거도가 마희(馬戱)에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이 마숙(馬叔)이라 불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의종 때에는 “왕이 부벽루에 나아가 신기군의 농마희(弄馬戱)를 관람하고 백금 2근을 내려주었다.”라는 기록처럼 유희를 겸한 군사 훈련의 하나로 성행하였다. 당시 송나라의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 인마(引馬), 개도기(開道旗), 입마(立馬), 구마(驅馬), 도마(跳馬), 헌안(獻鞍), 도립(倒立), 타마(扡馬), 비선(飛仙), 박마(膊馬), 등리장신(鐙裏藏身), 간마(趕馬) 등 마기(馬伎)가 소개되는 것으로 볼 때, 마상재가 고려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크게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 이어 조선에 들어와서도 농마희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다만 유교사회였던 조선왕조는 마상재를 무예보다는 놀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마상재 대신에 격구(擊毬), 기사(騎射), 기창(騎槍), 사모구(射毛毬) 등 실전용 기마무예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마상재가 독자적인 무예로 발전하기보다는 기마술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중종 때 기마술을 권장하기 위해 마상재를 시험 보이자는 움직임이 잠시 있었으나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중 마상재가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하나의 무예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조웅은 더욱 용감한 사람이다. 특히 말 위에 서서 달리기를 잘하여 적을 많이 죽였다.”라고 한 것이 그 한 사례이다. 그리하여 선조 28년(1595)에는 아동들에게 마상재를 가르치고 시험 보아 뽑힌 자에게 상을 주었으며 그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중국의 마상재가 조선군에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마상재는 종래 유희(遊戱)를 겸한 군사 훈련의 수단에서 독자적인 무예로 발돋움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 11년(1619)부터는 마상재를 관무재의 시취과목으로 채택하였다. 그 후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때까지 마상재는 관무재를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는 물론이고 습진(習陣), 열무(閱武), 강무(講武) 등 기마술의 하나로 시행되었다. 마상재가 기병술을 전제로 행하는 기예인 만큼 기병들의 무예훈련에 기초가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마상재가 실전에 대비한 무예로서 가치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더구나 총포의 위력이 갈수록 커지면서 마상재의 군사적 기능은 점차 약해져갔다. 그러자 숙종 때에는 마상재가 유희 내지 희극(戱劇)과 같으니 시행하지 말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8세기 말에는 무사들이 마상재를 유희와 같다 하여 기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자 정조는 마상재를 다시 강조하는 한편 이를 기피하는 군사들을 처벌하는 것 같은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와 함께 정조 14년(1790)에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면서 마상재를 24반 무예 가운데 하나로 정비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장기로 일본에 알려지던 마상재는 그 체계적인 보급과 함께 계승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었다.
당시 『무예도보통지』의 완성으로 특히 마상재 부분은 장용영을 비롯한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군사들의 군사교련서로 위치를 굳혀나갔다. 하지만 이후 마상재는 군사 무예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거의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마상재는 군사 훈련이 아닌 민간 유희의 형태로 곡마단에서 그 유제가 남게 되었다.
한편 마상재는 달리는 말 위에서 총포를 쏘는가 하면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며 재주를 부림에 따라 일찍부터 관람용 유희로 발달해 왔다. 특히 임진왜란 중 조선의 마상재가 우수하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면서 마상재의 유희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일본과의 교류가 재개되자, 조선의 마상재가 일본에 의해 요청되었다. 마상재는 인조 12년(1634)에 제4차 통신사를 파견할 때, 일본 관백의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어 호응을 얻었다. 그 뒤로 마상재는 조선통신사의 일행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일본 문헌인 『학산록(學山錄)』에는 “조선에는 말놀음 마희(馬戱) 일기(一技)가 있으니 빙사(聘使)가 동도(東都)에 올 적마다 반드시 그 기예를 어람(御覽)에 제공했는데, 그 재주가 가장 절묘하고 기이한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군사 가운데는 마상재에 능한 인물들이 많이 양성되었다. 18세기 일본에 사신으로 간 박경행(朴敬行)이 “전쟁터에서 총, 칼, 창이 들어오고 깃발이 휘날리며 북소리가 요란할 때 말에 몸을 숨긴 채 적진에 돌입하여 적의 깃발을 빼앗거나 적군의 목을 베어올 수 있는 날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우리나라에 4~5백 명이나 된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당시 마상재에 뛰어난 인물로 인조 때에는 인문조, 이세번, 김정, 장효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명성을 날렸으며 영조 때에 지기택, 이두홍이 유명하였다. 마상재는 순조 10년(1810)에 통신사를 보내는 항목 가운데 빠짐으로써 공식적인 사행에서 제외되었다. 이로써 인조 대 이후 순조 대까지 약 200여 년 간 지속되어오던 마상재가 더 이상 일본에서 공연하는 일은 없었다. 통신사 수행에서 마상재와 관련한 기록으로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비롯하여 『통문관지(通文館志)』, 『학산록』, 『동사일기(東槎日記)』, 『태년연표(泰年年表)』, 『해행총재(海行摠載)』가 있다.
마상재는 조선의 기마술을 대표하는 무예이자 유희의 하나이다. 특히 마상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마상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명서적(假名書籍) 『광문고(廣文庫)』에는 “조선군에는 마희(馬戱)의 일기(一技)가 있다. 초빙한 사신이 동쪽으로 건너와서 매번 반드시 그 기술을 선보여 국왕이 관람하였다. 세속에서 곡마(曲馬)라고 칭하는데, 그 기예가 매우 절묘하고 기이하다.”라고 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의 마상재를 하늘이 내려준 기예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화한무가명수(和漢武家名數)』에 보면, “동경의 승마술은 조선법을 시조로 하여 정순친왕이 비로소 말에 올랐다.”라고 적혀 있다. 그로부터 육손왕(六孫王), 경기(經基), 다전만중(多田滿仲) 등 제가(諸家)가 나옴으로써 소립원식(小笠源式), 대평식(大坪式), 팔견식(八見式) 등 일본의 승마술 유파가 발생하였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무예도보통지』에 의하면, 마상재의 기예는 말을 기준으로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말 한 마리로 재주를 부리는 단마식과 두 마리로 재주를 부리는 쌍마식이 있다. 단마식과 쌍마식의 기예는 각각 여섯 가지로 구성된다.
제1자세는 입마(立馬)로서 말 위에 선 채로 달리는 동작이다. 달리는 말 위에 서거나 혹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손에 삼혈총을 높이 들어 공중을 향해 쏜다. 또 기수는 고삐를 약간 늦추고 몸을 공중으로 솟구쳐 체중을 조금 덜어주면서 말이 내닫는 속도를 빠르게 하다가 다시 고삐를 약간 당기고 체중을 더하면서 말의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이렇게 말의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간다.
제2자세는 초마(超馬)로서 말의 등 넘나들기이다. 안장 앞쪽 언저리를 두 손으로 짚고 몸을 뒤로 쫙 펴서 말 등에 엎드리는 자세를 취한다. 배가 말 등이나 안장에 닿지 않게 하면서 몸을 말의 왼쪽으로 넘긴다. 이때 발은 땅에 닿을 듯 말 듯한 정도로 내려오며, 다시 몸을 들어 말 등을 닿지 않은 채 오른편으로 넘어간다. 오른편에서도 발이 땅에 닿을 듯하다가 다시 왼편으로 넘어가며 이러한 동작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이러한 동작을 좌우칠보(左右七步)라고도 한다.
제3자세는 도립(倒立)으로 말 위에서 거꾸로 서는 재주이다. 안장의 앞부분을 두 손으로 잡고 상반신을 말 왼쪽으로 떨어뜨린 채 하반신을 공중으로 쫙 편다. 이때 기수의 오른편 어깨는 말의 왼쪽 앞죽지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내려오며 공중에 뻗친 다리가 휘청거리는 순간에 몸을 빠르게 돌려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간다.
제4자세는 횡와(橫臥)로서 말 위에 가로눕는 동작이다. 말을 가로타고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며 두 손으로 안장의 앞뒤 쪽을 잡고 눕는데, 반듯하게 눕기도 하고 엎드려 눕기도 한다. 이것은 적탄에 맞아 죽은 것처럼 하여 상대를 속이기 위한 방법이다.
제5자세는 장신(藏身)으로 몸 숨기기이다. 오른편 오금을 안장에 걸치고 오른손으로 안장 뒤쪽을 잡고 몸을 말의 왼쪽으로 떨어뜨린다. 기수의 등이 말의 왼쪽 옆구리에 달라붙고, 왼다리는 말의 머리 쪽으로 뻗치므로 사람이 말의 옆구리에 달려서 거꾸로 끌려가는 자세가 된다. 이때에는 왼손으로 땅의 모래를 쥐어서 흩뿌리며 적진으로 들어간다. 몸을 말의 오른쪽으로 옮겨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러한 동작을 등리장신 또는 마협장신이라고 하는데, 모두 말 옆구리에 몸을 숨긴다는 뜻이다.
제6자세는 종와(縱臥)로서 뒤로 눕는 동작이다. 보통 때 말 타는 자세를 취하고 두 발을 등자에 건 채로 뒤로 누워 기수의 머리를 말의 엉덩이 쪽으로 가져간다. 이때 한 손으로는 말꼬리를 잡기도 한다. 앞의 여섯 동작 중에서 두 번째 동작인 말의 등 넘나들기와 다섯째 동작인 몸 숨기기를 좌우 각각 헤아려서 모두 여덟 동작으로 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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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廣文庫, 唐書, 東京夢華錄, 東槎日記, 萬機要覽, 武藝圖譜通志, 三國史記, 三國志, 梁書, 鹽鐵論, 魏書, 懲毖錄, 泰年年表, 通文館志, 學山錄, 海行摠載, 和漢武家名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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