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통하는 한결같은 모습
석상의 모습과 크기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과 『국조상례보편』, 『춘관통고』와 같은 여러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9월 6일 기사에는 석상의 크기가 길이 11척, 너비 6척 3촌, 두께 1척 4촌이라고 나와 있으며, 영조 대 간행된 『국조상례보편』에는 길이 8척 5촌 6푼, 너비 5척 8촌, 두께 1척 6촌 7푼으로 나와 있다(1척은 영조척 기준으로 약 31cm).
그러나 태조 건원릉은 길이 3.3m, 너비 1.9m, 두께 0.5m이며, 태조 비 신덕황후 정릉(貞陵)은 길이 2m, 너비 1.3m, 두께 0.4m,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은 길이 2.7m, 너비 1.8m, 두께 0.5m 등 실제 왕릉 석상의 크기는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넓적한 대석(臺石) 위에 4~5개의 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네모난 석상을 올리는 외형은 똑같다. 특히 족석(足石)이라 부르는 받침돌은 북 모양이며 나어두(羅魚頭) 조각을 새겼다는 기록은 동일하다. 시대를 통틀어 한결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능・원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석상
석상은 보통 봉분마다 하나씩 놓여 있다. 봉분이 하나인 단릉에는 1개, 봉분이 둘인 쌍릉에는 2개가 놓여 있다. 그런데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릉(長陵)은 봉분이 하나인 합장릉이나 석상이 둘이다. 영릉의 경우 정확한 기준을 찾기 어려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장릉은 본래 쌍릉이었다가 영조 대 천릉하여 합장릉이 되면서 영릉의 모습을 따른 것이다.
화성의 융릉과 건릉, 동구릉의 수릉 등 이후 조성된 합장릉의 석상은 하나씩 놓여 있다. 받침돌은 보통 4개이나 태조의 건원릉,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인조 비 장렬왕후의 휘릉은 5개, 신덕황후의 정릉은 2개다. 정릉은 태종이 천장하며 규모가 축소되어 받침돌 수량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석상은 왕실 가족의 무덤인 원(園)에서도 볼 수 있는데, 받침돌이 2~4개이다. 원종의 친어머니인 인빈 김씨의 순강원은 받침돌이 2개이며, 순회세자와 공회빈의 순창원은 4개이다.
고석과 나어두
석상 아래 받침돌인 족석은 악기 북을 닮아 고석(鼓石)이라고도 한다. 둥글고 볼록한 몸통에 위아래로 가죽을 씌우고 못질한 것처럼 조각하고, 사면에는 고리를 입에 물고 있는 귀면(鬼面)을 새겼는데 영락없는 북의 모습이다. 귀면은 나어두(羅魚頭)라고 하는데, 물고기의 머리가 아니라 마치 용이나 해태와 같이 상상 속의 동물을 닮았다. 능마다 나어두의 모습은 차이가 있으나 불꽃 모양 눈썹에 뿔이 나고 들창코인 모습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모든 능의 고석에 나어두가 조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서오릉 창릉 예종릉의 고석에는 나어두 없이 북고리만 조각되어 있거나 추존한 덕종과 소혜왕후의 경릉 고석에는 나어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세간에는 ‘나어두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벽사의 상징이다’, ‘족석은 혼이 노니는 곳인 혼유석에 신명나게 북소리를 내기 위해 북의 모습일 것이다’, ‘나어두가 고리를 물고 있는 것이 문고리를 닮았으므로 석상은 능침 아래로 들어가는 문과 같은 것이다’라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모두 추정일 뿐이다. 고석과 나어두가 어떤 이유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제각기 다른 고석과 나어두의 모습은 석상을 관찰하는 재미를 부르고 개성있는 모습으로 왕릉을 지키고 있다.
글. 강정인(궁능유적본부 궁능서비스기획과 전시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