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아메리카 대륙 인근의 한 섬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41~1506)는 자신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이는 졸지에 수천 만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도인(Indian)”이라 불리게 된 터무니없는 착오였다. 당연하게도 인도에 있을 것이라 기대되던 값비싼 향신료와 금은보화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에 많은 돈을 투자했던 스페인 왕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사탕수수나 토바코와 같은 상품작품을 대규모로 경작하기 시작했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과 강제노역에 노출된 원주민들은 빠른 속도로 그 수가 줄어갔다. 결국 콜롬버스가 처음 도착했던 히스파니올라 섬(Island of Hispaniola)의 타이노 족은 스페인 사람이 도착한 지 고작 25년 만에 500만에 달하던 인구가 5만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대다수 유럽인이 원주민 착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당시, 일평생을 원주민 인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라스 카사스였다. 비록 그 역시 젊은 시절에는 수십 명의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던 사람이었으나, 마음을 고쳐먹은 이후에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원주민들을 해방하고자 노력했다. 당대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의 주장은 식민주의 반대하는 각종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훗날 남아메리카의 독립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는 그를 “아메리카의 선지자이자, 우리의 영웅”이라며 존경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볼리바르는 자신이 세운 독립국가의 수도를 “라스 카사스”라 부르자 제안할 정도였으니 그 영향력을 짐작할 만하다.
군종 사제로 전투에 참가해 원주민을 노예로 잡다
“만약 천국에 스페인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 가고싶지 않다” -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기 전 쿠바 인디언 추장 하타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15세기 중반, 스페인은 이슬람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장교가 무척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에 프랑스에서 뛰어난 검술로 유명했던 라스 카사스 가문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고자 스페인으로의 이주를 감행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스페인과 이슬람의 전쟁은 오래지 않아 스페인의 승리로 끝났고, 1484년에서야 태어난 바로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에게는 이렇다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그의 가문에게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대규모 영지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1502년 아직 소년이었던 라스 카사스는 아버지와 함께 콜롬버스가 도착했던 히스파니올라 섬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라스 카사스는 전투에 참가한 대가로 시바오(Cibao) 지역에 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수십 명의 노예를 거느린 노예주가 되었다. 그는 잠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성직자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된 이후에도 ‘군종 사제’로 전투에 참가하여 원주민들을 노예로 사로잡는데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당대 유럽의 정복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라스 카사스를 보고 몇몇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들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노동을 강요하는 당신은 고해성사를 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한 설교자는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자신들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과 파괴적 전쟁을 일삼는가? 당신은 그들에게 충분한 음식도 주지않고 과도한 노동으로 몰아세웠으며, 고통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편안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며 라스 카사스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에 짜증난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것이야말로 정복자의 당연한 권리이며, 열등한 원주민들을 개화하는 과정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심지어 라스 카사스는 도미니크 수도회가 자신의 권한을 침해한다며 왕에게 고발했고, 이에 수도사들은 본국으로 송환되기에 이르렀다.
유럽 정복자들의 원주민 학살
불의하게 얻은 것을 재물로 바치는 것은 부정한 일이므로, 악인들이 바치는 재물은 용납되지 않는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불경한 자들이 바치는 재물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재물을 많이 바친다고 해서 죄를 용서받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아 재물로 바치는 것은 남의 자식을 재물로 바치려고 그 아비 앞에서 죽이는 것과 같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빵 한 조각이 생명이며 그것을 빼앗는 것이 살인이다. 이웃의 살길을 막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일꾼에게서 품값을 빼앗는 것은 그의 피를 빨아 먹는 것이다. - 집회서 34장 18~22절
도미니크 수도회 수사들의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던 라스 카사스는 1513년 스페인의 쿠바 점령에도 동참했다. 이 전투에서 라스 카사스는 자신이 소유한 노예 숫자를 늘렸으며, 농장을 경영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로서 일말의 책임은 다해야 했던 라스 카사스는 설교를 준비하고자 집회서를 읽고 있었다. 그리고 집회서 34장을 읽어 내려가던 라스 카사스는 문득 자신이 소유한 모든 재산이 원주민의 것을 빼앗은 것이며, 그들의 노동력을 부정하게 착취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며칠 동안 자괴감으로 번민하다가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부정한 것이며, 끔찍한 것”이었음을 고백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모든 노예를 해방하고, 남은 평생을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작해야 작은 농장을 운영하던 ‘군종 사제’에 불과했던 라스 카사스가 아메리카 원주민 모두를 해방할 영향력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의 왕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1452~1516)를 알현하고, 노예제가 장기적으로 스페인 제국에 해롭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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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페르난도 2세를 만나는데 성공한 라스 카사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현 실태와 이들의 인구 급감에 따른 스페인 제국의 위기를 역설했다. 이에 왕은 라스 카사스의 의견에 공감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보고서로 작성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그 보고서를 받아볼 수 없었다. 이듬해 1월 25일,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보고서 작성에 열을 올리던 라스 카사스는 절망했고, 겨우 16살에 불과했던 새로운 왕 카를로스 1세(Carlos I, 1500~1558)는 신대륙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어렸다.
마음이 급했던 라스 카사스는 일단 “원주민의 처우를 위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육체적으로 훨씬 건강한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해방을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수천 만의 아프리카 흑인이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려가는데 아이디어와 정당성을 부여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라스 카사스가 자기 평생을 원주민 인권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욕 먹는 이유가 되었다.
어린 왕에게 기댈 수 없었던 라스 카사스는 일단 몇 명의 수사들과 함께 서인도제도로 향하여 원주민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자 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현지 정복자들이 라스 카사스 일행을 공격했으며, 그는 아무런 변화도 이루지 못한 채 스페인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라스 카사스는 이미 스페인 정복자들이 자리잡은 곳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이번에는 왕으로부터 자신의 영지를 받아 그곳에 원주민들을 모으고 스스로 방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카를로스 1세에게 ‘영지를 주신다면, 그곳 원주민들을 당신의 직속 신민으로 만들어 세금을 바치겠다’고 제안했고, 왕은 그의 그럴듯한 제안을 받아들여 베네수엘라 북쪽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이양했다. 라스 카사스는 이 지역에 스페인 농부들과 함께 들어가 10개의 성채를 만들고, 원주민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의 뜻에 동참한 스페인 농부들의 수가 너무 적었고, 라스 카사스를 미워하는 적들은 너무 많았다. 반대자들은 “라스 카사스는 왕에게 받은 영지에서 모은 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낼 것”이라며 모함하곤 했다.
라스 카사스는 ‘신대륙에서는 본인 소유의 토지를 가질 수 있다’며 간신히 설득한 몇 안 되는 농부들과 어렵게 길을 떠났다. 돈이 모자랐던 그는 여러 친척들에게 돈까지 빌려 여행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1521년 1월 아메리카에 도착한 라스 카사스는 담당지역 원주민들이 수도사들의 정착지를 공격하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라스 카사스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홀로 동분서주했고, 함께 왔던 농부들은 원주민들을 노략질하며 여기저기 흩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를 따르던 수사 4명 역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죽고 말았다. 이 때 라스 카사스도 함께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정복자들은 이 소문을 이용하여 ‘역시 원주민들은 무력으로 평정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수도사들을 공격하는 원주민
가는 곳마다 실패한 라스 카사스는 너무 지쳐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토 도밍고에 있는 도미니카 수도회로 들어가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1522년 다시 수사가 되어 처음부터 신학공부를 시작한 그는 약 10년 동안 조용히 신학 공부에 전념한다. 이후에도 남아메리카 곳곳을 떠돌며 선교 활동을 이어갔으나,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 정복자 모두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라스 카사스는 과거보다 소극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아메리카 이곳 저곳에서 선교활동을 이어가던 라스 카사스는 다시 한 번 왕을 만나 원주민 문제를 해결하고자 결심한다. 1542년 라스 카사스는 그 사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중년의 카를 5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노예제를 파괴해야만 스페인 제국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제도의 폐기를 통하여 원주민들을 황제의 직속 신민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와 달리 충분한 정치적 식견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카를 5세는 라스 카사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새로운 법령(New Laws)”을 선포했다. 이는 정복자들이 더 이상 노예를 늘릴 수 없으며, 주인이 죽었을 경우에는 모든 노예를 해방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만 이 법안은 기존 노예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장년에 접어든 카를 5세
새로운 법령 제정을 들은 뉴스페인의 총독은 새로운 법안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원주민들을 새롭게 노예로 삼지 않으면 더 이상 영지를 늘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스 카사스 역시 이러한 법령으로는 당장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는 원주민들을 해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1545년에 법안은 폐지되고 말았고, 아메리카에서는 라스 카사스에 대항하는 폭동까지 일어났다. 마주치는 정복자들마다 라스 카사스에게 총을 쏘았고, 그는 결국 아메리카를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아메리카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바야돌리드 논쟁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홀로 쓸쓸히 눈을 감다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적들은 “황제 역시 5명의 노예를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라스 카사스의 주장대로라면 황제도 죄인”이라며 그를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이에 화가 난 황제는 라스 카사스의 책을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공격에 대해 라스 카사스는 자신의 논지를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 역시 점차 격화되는 사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공식적인 논쟁을 준비했으니, 이것이 바로 1550~51년 바야돌리드에서 이뤄진 라스 카사스와 후안 지네드 드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ulveda, 1489~1573)의 논쟁이었다.
먼저 세풀베다는 “원주민들은 저급한 인류이며, 그들이 우리에게 정복당한 것은 인신 공양과 우상숭배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원주민은 선천적으로 미개하며, 이들에게는 오직 군사적 정복만이 효과적인 선교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라스 카사스는 “인신 공양과 우상 숭배는 아메리카 원주민만의 일이 아니며, 그리스․로마 뿐 아니라 고대 스페인에서도 우상 숭배가 있었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예술과 학습 능력은 오히려 유럽인보다 이성적이며, 이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선교방법은 가르침과 설득”이라고 반박했다. 당시 세풀베다의 주장은 정복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사실 성직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주장은 아니었다. 이에 논쟁에 참석한 대다수 성직자들은 라스 카사스의 입장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 논쟁을 주재한 도미니크 수도회가 노예제 폐지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은 분명한 우리의 형제이다. 따라서 더 이상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는 안 된다. 부족한 노동력은 동물에 가까운 아프리카 흑인으로 보충하면 된다”고 논쟁을 매듭지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때마침 페루 총독이 여차하면 카를 5세에 대항하여 독립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신대륙 전부를 잃을까 우려한 카를 5세는 정복자들의 만행을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원주민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죽어가는 원주민을 대신하여 좁은 배에 수백 명의 흑인을 실은 노예상선들이 대서양을 누비기 시작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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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장 많은 아프리카 흑인을 배에 싣는 방법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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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카사스의 고단한 삶도 결코 끝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도 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던 라스 카사스는 ‘이단’이라는 기소에 휘말려 오랫동안 심문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566년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라스 카사스의 활동은 분명 한계가 많았다. 그는 모든 문제를 카를 5세에게 기대어 해결하려고 했던 봉건적 인물이었으며, ‘원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자비로운 카를 5세의 통치를 선택하도록 권유’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더욱이 아프리카 흑인들이 대거 아메리카로 끌려가게 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등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사회의 일반적 경향을 감안했을 때 매우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인종주의를 극복함은 물론, 종교적 관용까지 논했다는 점에서 라스카사스는 식민주의가 갓 시작되었던 시점에서부터 이미 탈식민을 논했던 선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복자들이 식민지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다 인도주의적으로 바꾸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까닭에 라스 카사스는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보편 인권을 옹호한 최초의 유럽인이라 주목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