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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四國)는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규슈(九州) 등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다. 제주도의 10배에 해당하는 18,000㎢ 넓이의 섬이면서도 해안가를 벗어나면 동서로 뻗어 있는 시코쿠산맥을 비롯해 1,500m가 넘는 산이 무수히 솟구친 산악지형을 이루고 있다.
시코쿠 관광입현추진협의회(觀光立顯推進協議會) 초청으로 9월 초 답사한 쓰루기산( 山·1,995m)과 이시즈치산(岩鎚山·1,982m)은 시코쿠 2위와 1위 고봉으로, 상반되는 자연을 보여주었다. 도쿠시마(德島)현의 쓰루기산이 육산의 전형이라면 에히메(愛媛)현의 이시즈치산은 우리나라의 설악산을 보는 듯 기암괴봉이 정상부를 이루면서도 그밖의 산줄기는 역시 육산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복수를 꿈꾸며 검술을 익혔다는 쓰루기산 정상
북으로 세토내해(瀨戶內海)를 마주한 가가와(香川)현 다카마츠(高松) 공항에서 약 3시간 거리인 이야시노온천향(いやしの溫泉鄕)에 도착할 즈음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는 이튿날 새벽녘까지도 멈출 줄 모른다. 일본의 여름과 초가을은 태풍 때문에 맑은 날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도 산을 제대로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기왕 온 거 제대로 걷기라도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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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시즈치산 미센 정상에서 바라본 덴쿠다테. 취재팀이 오른 남동릉이 구름을 가르며 뻗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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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인 미노코시(見ノ越·1,400m)에 도착, 리프트 운행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한국등산중앙회 강영일 회장과 이성근씨(산이좋은사람들 회장)는 리프트에서 쓰루기산 정상을 왕복하는 코스보다 정상에서 약 15km 거리인 미우네(三嶺)까지 뽑아 오늘 출발한 온천장까지 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자 이 날 가이드를 맡은 이치오카 시데오(市岡日出夫)씨는 잠시 곤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쓰루기산 정상에서 마루이시산(丸石山·1,683.8m)까지 뽑은 다음 오쿠이야니주(奧祖谷二重) 넝쿨다리로 하산하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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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기산 산행은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것만으로도 이색적이다. 1인용 리프트는 발걸이가 없어 다리를 공중에 늘어뜨린 채 앉아 있어야한다. 그런데도 높이가 위압적이지 않아 불안하지도 않고, 단풍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부드러운 산릉을 따르는 사이 마치 한 마리 나비가 되어 산 위를 날아오르는 듯한 환상에 빠져 해발 1,750m 높이의 터미널에 도착한다.
“아니 350m나 올라왔잖아. 200m만 더 올라가면 오늘 산행 끝이네.”
입담 좋은 강영일 회장은 걷기도 전에 산행이 너무 싱겁겠다며 아쉬워하지만 김용균씨(엔타비 대표)와 이영섭씨(일본 여행 전문가)는 이구동성으로 “쉬엄쉬엄 걷는 게 건강에는 더 좋은 산행 아니겠느냐”며 즐거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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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노코시에서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일행. 가을철에는 단풍으로 화려한 풍광을 이루는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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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100명산 중 하나인 쓰루기산은 해발 2,000m에 육박하는 산답게 고산식물의 보고였다. 텐닌소(天人草)라 불리는 조릿대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고, 엉겅퀴, 금강초롱 비슷한 소바나, 투구꽃 모양의 시코쿠후로(四國風露) 등 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가을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 있다. 사슴이 내려와 뜯어먹는 것을 막기 위해 산길 양쪽으로 방록책(防鹿柵)을 설치할 만큼 희귀식물의 보고였다.
“개산일(開山日)인 5월1일까지도 정상 부근에는 눈이 많이 덮여 있습니다. 7, 8월에 오면 산릉이 야생화로 뒤덮여 있고요. 계절마다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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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년 7~8월이면 야생화가 천상화원을 이룬다는 쓰루기산 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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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오카씨의 설명을 들으며 정상산장(1박2식 7,500엔)을 거쳐 정상에 올라서자 뜻밖에 동산 같은 정상이 나타난다.
“검이란 의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산정이지요? 이 산은 외모보다는 전설에서 산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옛날 천황이 검을 숨겨놨다는 전설과 1,000여 년 전 원평전쟁 때 원씨에게 패해 교토에서 이곳으로 쫓겨난 평씨가 복수를 꿈꾸며 이 산정에서 말을 타며 검술을 익혔다는 전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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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릿대 울창하게 우거진 산릉을 따라 마루이시로 향하는 김용균씨(맨앞)와 이영섭씨(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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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일출맞이 명소이기도 한 쓰루기산 정상에 서면 세토내해와 혼슈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쉽게도 구름안개가 기회를 주지 않는다. 혹시 하는 마음에 버티다 오히려 구름이 더욱 두터워져 10시40분 마루이시산을 향하자마자 홍일점인 박정규씨(뫼솔산악회 회장)가 탄성을 지르며 경쾌한 걸음으로 산릉을 따른다. 알프스 산록 같은 능선은 구름이 떠오르자 깊이 파인 골짜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주변 산릉들도 모습을 드러내면서 산세가 더욱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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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경, 얼마 전 사슴이 뛰어다닌 흔적이 남아 있는 능선에 앉아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산행에 나서자 숲길과 초원길이 반복되면서 산행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갑자기 불어댄 거센 바람에 남쪽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벗겨지며 자태를 드러낸 산릉은 무더운 여름에서 벗어난 듯한 홀가분함에 덩실거린다.
산정이 둥근 돌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을 얻은 마루이시산을 넘고 마루이시 무인대피소에 닿자 이치오카씨는 대피소 안을 둘러본다. 무인대피소는 깨끗이 치워져 있고, 모터용 제초기와 연료 한 통이 입구 선반에 놓여 있다. 이치오카씨는 “풀이 우거졌을 경우를 대비해 비치해둔 것”이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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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훼손지를 복원하기 위해 깔아놓은 목도를 따라 쓰루기산 정상으로 오르는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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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를 지나자 오른쪽 사면길을 따라 내려선다. 산릉은 초원이 일품이라면, 사면길은 숲이 인상적이다. 두터운 이끼옷 입은 거목은 기본이고, 나무 표면이 황톳빛을 띤 히메샤라라는 희귀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아름드리 숲길의 절정은 나무다리(國體橋·쓰루기산 정상에서 5.8km)를 건넌 다음 1.2km를 더 가서 만난 오쿠이와니주자즈라바시였다. 전날 오보케고보케(大步危小步危) 협곡을 거슬러 오를 때 답사한 덩굴다리인 이야노가즈라다리(祖谷のかずら橋)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자연미는 한층 더했다.
다리를 건너 짤막한 오르막을 올려치자 이야가도(祖谷街道) 변. 입구 매표소 안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소박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자 6시간 동안 쌓인 산행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고, 일행 8명과 토쿠시마 현청 공무원과 가이드 등 일본인 3명은 자연 속에서 지내는 사이 오랜 기간 함께 지내온 사이처럼 가까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