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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1 - 강족의 한 갈래인 티베트인들이 토번제국을 세우다!
중국의 24사(史) 역사서 중에 가장 오래된 최초의 역사서는 “사기(史記)” 이니 기원전 109년
에서 기원전 91년 사이 전한의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했으며.....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입니다.
1. 서남이(西南夷)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기원전 22세기의 요 임금에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는데, 열전 55는 조선열전으로 “조선왕 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다”
라고 시작해 치열한 전쟁을 치루었음에도 5페이지 정도인데 비해.... 50 흉노는 35페이지
분량이고 53 남월은 11페이지, 54 동월은 6페이지 그리고 56 서남이는 7페이지 분량입니다.
서남이(西南夷)의 군장(君長)은 열명을 헤아렸는데 야랑국(夜郎國: 귀주 贵州 서부) 의 세력이 가장
컸다. 야랑국의 서쪽에는 미모(靡莫) 부족이 열을 헤아렸는데, 그중 전(滇 : 운남성 동부 전지
滇池)의 세력이 가장 컸다. 전으로 부터 그 이북에도 군장이 열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공도(邛都:
사천성 서창시 西昌市 )의 세력이 가장 컸다고 하니 아직 티베트의 토번은 출현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원전 2070년 우(禹)를 시조로 하는 하(夏)나라는 하남성 황하유역에 있었는데 기원전 1600년
동쪽의 탕(湯)이 군대를 일으켜 하를 멸하니 상(商, 은) 나라로.... 기원전 1046년에 무왕이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세웠으니 기원전 771년까지 장안에 도읍했던 서주와, 견융을 피해
수도를 낙양으로 옮겨 기원전 256년 진(秦)나라에 망하기 까지를 동주(춘추 + 전국) 라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화하족(華夏族) 이라고 말하면서 세상의 중심에 있으니 사방의 이민족을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동이(東夷)는 한반도나 왜국을 가르킨 말이 아니고 중국 동부인 하남성 동부와 산동성
을 가리켰으며 상(商)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니 동이(東夷) 는 더 동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을
말하며 주나라가 중국 전체를 차지한 이후에 만주와 한반도 및 일본이 동이(東夷) 가 됩니다.
2. 견융(犬戎)
고대에 관중 서부(섬서성)에 있었던 민족으로, 당시 중원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서융
(西戎) 으로도 불리웠는데..... 오랑캐로 상나라와 주(周) 나라가 자주 토벌하려고 했으나 완전한
토벌에는 실패했는데 상나라와 주나라 문서에 관련된 기록이 많으니 주로 토벌했다는 내용입니다.
견융족은 티베트인과 연관된 민족으로, 언어학적으로도 견융의 언어는 중국 티베트어족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보여지니 주(周)나라 유왕때 서주를 침공해 유왕을 시해하자 주나라는 수도 호경(장안)을
포기한 후, 동쪽인 낙읍(낙양)으로 천도하니 동주시대로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뉩니다.
견융(犬戎)은 그 전인 목왕 대부터 주나라와 충동하고 있었는데 춘추시대가 열린 이후 진(秦)나라에 토벌
되거나 밀려난지라 기록이 끊기는데 스후 중원의 여러 제후국들이 서쪽에 위치한 진(秦)나라를
비하하기 위한 의미로 진융(秦戎)이란 표현을 쓰는 등 '융' 이라는 표현은 춘추시대 이후에도 나타납니다.
3. 강족(羌族)
서남이의 하나인 강족(羌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저 견융(犬戎) 처럼 티베트어족
에 속하며.... 현대에는 캄 지역(쓰촨성 아바티베트족창족와 간쯔티베트족
자치주) 에 분산되어 분포하고 있으니...... 인구는 2020년 기준으로 31만명 입니다.
산시성 서부와 간쑤성 동남부 일대에 생활했고 갑골문에 따르면 이때 강방(羌方)
이라 불렀고 두 개의 큰 부락이 있어 북강(北羌)과 마강(馬羌)이라 불렀습니다.
상나라 말에 주나라가 상(商)나라를 공격할 때, 상나라가 강족을 인신공양할 때 제물로 자주 사용
했기 때문에 주(周)나라의 세력에 가담해 이를 도왔지만 어디까지나 이해관계가 맞물려 손을
잡았던지라 오래치 않아 다시 사이가 벌어졌고, 춘추시대 때 진(秦)나라가 발전하면서
밀려서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월수강(越雋羌), 광한강(廣漢羌), 무도강(武都羌) 등으로 발전합니다.
강족은 진 효공 때 진나라에게 굴복했으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몽염을
통해 흉노와 함께 압박을 받았고 한나라 초에 흉노의 묵돌이 서역을 압박하고
세력이 매우 강성해지자 흉노에 귀부해 한나라의 서쪽 지역을 자주 침범 합니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중국을 자주 공격해 농서까지 진출했지만 한나라가 강족과 흉노가
왕래하는 길을 끊어 황중 지역에서 쫓겨났다가 선제 때 이르러 흉노와 연합해
장액, 주천 등 하서 지역을 공략했지만 의거안국, 조충국 등의 공격을 받아 패했
는데.... 여기서 조충국이 말했다는 “百聞 이 不如一見” 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납니다.
전한 말기에 중국이 혼란하자 금성, 농서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후한 초기에 내흡, 마원 등의
공격을 받아 한나라에게 귀부와 저항을 반복하면서 한양, 안정, 농서를 정복하며 살았습니다.
이때 부터 강족은 거주 지역에 따라 서강과 동강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와
서진(西晉) 시기에도 중국을 정복해 관중 지역에 거주했으며, 오호십육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강족이 중국 중원을 정복하여 건국한 국가인 후진(後秦) 이 건국되었습니다.
토번의 압박을 받아 감숙, 영하, 섬서 북쪽 일대로 옮겼다가 후에 하주로 옮겨갔으며, 북송 때 강족
들이 한족들을 정복하면서 한족들을 피지배민족으로 둔 서하국이 건국되었고, 서하국은 몽골보다
더했으니 한족들을 노예로 만들어 농락한 국가였으며 서하를 세운 강족의 일파가 탕구트족 입니다.
강(羌)족은 후한 초기 허신이 지은 설문에 따르면 서융 가운데 양을 목축하는 사람들로 사람 인(人)
과 양 양(羊)의 뜻을 따른다고 했고 후한 말의 응소가 지은 풍속통의에 따르면 강족은 주로 양을
기르기 때문에 강(羌)이란 글자는 양(羊)의 뜻에 따르고 그 곳 사람들을 이 때문에 강족이라 불렀
다고 하며, 군신이나 상하의 구분이 없고 힘센 자가 수령이 되었기에 하나가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강(羌)족 종족은 거주지에 따라 나누고 강자는 약자를 멸시했으며.... 또한 유목민들이 그렇듯
일정한 거주지 없이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했는데, 남자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일본처럼
매우 길(吉)하게 생각했으며, 안방에서 병사(病死) 하는 것을 흉(凶) 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이 가장 두려워 하던 것은 객사(客死) 니 집에서 자식과 제자들이 임종하는 가운데 죽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총에 맞아 죽자 한국인들은“나쁜짓을 하더니
객사(客死) 했다”며 꼴좋다고 비웃었지만 정작 일본인들은 “이토님은 행운아야! 전쟁터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거든” 라고 엄청 부러워 했으니 강족은 일본 사무라이들과 생각이 같았던 모양입니다.
강족의 유명 인물로 태공망으로도 알려진 곧은 낚시바늘을 위수에 드리웠다는 강상(姜尙)이 있으니
그는 무왕을 도와 상(은)나라를 멸하고 주(周)나라를 건국하는데 1등 공신이었으니 산동성에
봉지를 받아 제나라 시조가 되었는데 제나라는 훗날 한족(漢族)인 전(田)씨들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강(羌)족 수령 낭막(狼莫) 은 118년에 임상과 마현의 공격을 받아 북지에서 60여일을
버티다 패해 참수당한 자가 5천명이었고 기오(飢五)는 120년에 금성을 침입했다가
마현의 군사에게 패해 수천명이 죽었으며..... 나리(那離) 는 140년에 봉기했다가
마현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으며 이때 죽거나 사로잡힌 자가 1200여명이었습니다
4. 후진(後秦)
후진 (後秦) 은 오호십육국(304년~ 439년) 시기 티베트계 강(羌)족이 세운 나라로 북진(北秦), 호진
(胡秦), 강진(姜秦), 요진(姚秦)이라고도 불리는데 황하 연안에서 할거 중이던 강(羌)족의 추장
요양(姚襄)은 후조(後趙)와 염위(冉魏) 대립으로 화북이 혼란해지자 옛 근거지 관중으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중국 지역을 정복하여 후진 (後秦) 을 건국하였으니 강족은 이민족의 기마 전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중국 지역을 정복하였고 지배층은 강족, 피지배층은 한족(漢族)
이었는데 요양의 강족 세력은 역시 관중으로 돌아가려던 저(低)족의 포홍(蒲洪) 과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다시 회하 방면으로 이동해 동진(東晋)의 관작을 받고 제휴합니다.
383년, 저(低)족 전진(前秦)의 부견이 비수대전으로 몰락한 뒤 화북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
하였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한 강족의 요장(姚萇)이 부견을 배반하고, 384년
왕을 자칭하면서 후진 (後秦)이 세워지니, 385년에 요장(姚萇)은 부견을 죽이고는
386년 장안에서 천왕(天王)을 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칭하여 후진을 건국합니다.
394년 제2대 왕으로 등극한 아들 요흥(姚興)은 잔존한 저족 부씨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400년에는 선비족 걸복씨가 건국한 서진(西秦)을 멸하고, 403년에 하서 회랑지대
에 저족이 세운 후량(後涼)마저 무너뜨려 화북 서부 관중의 강국으로 올라섰으며
그 결과 유명한 고승 구마라습(鳩摩羅什, 쿠마라지바) 이 들어와 불교가 융성했습니다.
그러나 서쪽 감숙성 부근의 한족(漢族) 서량(西涼) 과 선비족 남량(南涼) 그리고 409년에 다시
독립한 선비족의 서진(西秦), 토욕혼, 흉노족의 북하(北夏) 까지 가세하여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416년에 요흥이 죽은 후 요홍(姚泓)이 황제로 등극했으나 강족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이를 기회로 여긴 주변 나라가 공격해 왔으니..... 마침내 417년 한족(漢族) 국가인
동진(東晉)의 유유(劉裕) 가 북벌 중에 침공을 받아 수도 장안이 함락당해 멸망하였습니다.
5. 토번(土蕃) 제국
서남이는 사천성과 운남성에 가주하는 소수민족들이었으니 티베트는 그 보다도 더 서남쪽
에 거주한 민족이었는데..... 그 중에 걸출한 인물이 나왔으니 7세기 초에 손챈감포
(송찬간포) 가 토번 부족을 통일해서는 근 300년 가까이 이어갈 “토번 제국" 을 세웁니다.
서기 4세기에 토번의 선조라고 할만한 티베트 정치 집단이 등장하여 중앙 티베트 부근
에서 영향력을 키웠는데... 티베트의 동부지역에서는 오래 전에 강족과 저족 등이
동쪽 중국으로 침투하여 왕조를 세웠으니 늦은 편으로...... 티베트 서부 일대에는
샹슝국도 있고 탕구라산맥 동부에는 숨파와 같은 부족연맹 형태의 국가가 있었습니다.
토번의 원류가 되는 집단은 티베트 중부인 라싸 남동쪽의 얄룽(톨기 지방)을 기점으로 근처 여러 부족을
흡수해 세력을 불려나갔는데.... 서기 570년경에 남리룬첸이 즉위하게 되면서 토번은 역사에 기록
되기 시작했으니 주변 경쟁 세력들을 능가하는 국력을 갖추는가 하면 중앙 집권화에 대한 준비에도
들어갔으나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에 남리송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해 나갑니다.
그의 아들 손챈감포(재위 617~649년 추정) 는 불과 13세의 나이로 왕에 올라 예상을 깨고 주변 모든
세력들을 평정하고 통일 티베트의 서막을 열었으니 633년, 손챈감포는 스키타이 계열 유목민
을 평정하는 한편 티베트 일대를 통일한 후에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토번(吐蕃) 왕국을 건설합니다.
당나라 이정이 630년 동돌권을 멸망시키고 토욕혼을 공격해 속국으로 삼자 634년 손챈감포는 20만으로
당나라를 공격해서 수도 장안을 유린했고,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636년에는 당태종에게 당나라의 공주를
왕비로 맞기 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손챈감포는 638년에 25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당나라 속국인 토욕혼을 정벌하여 멸망시킨
후에 백란 등의 강족 마을도 공략한후, 장안에 육박해 송주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하니
후군집이 간신히 막아내는데... 그후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을 보내, 금 5천령을 납폐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를 토번에 시집보냅니다.
문성공주는 사서오경과 유가사지론, 예림삼백육십법보감, 공예 육십법등 서적과 석가모니 불상에다
토번의 풍토에서도 견딜수 있는 순무 종자를 챙기는데 또한 토번에 없는 곡물, 과일, 채소 종자와
누에 종자도 포함되었으며 의약품과 공구도 있었으니 유모와 당나라 여인들까지 공녀로 보내지니
641년 문성공주는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이도종과 가르통첸의 호위를 받으며 토번으로 향합니다.
공주 일행은 강의 물살이 완만해지는 한겨울에 길을 떠나 청해에 다다른
문성 공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천하의 강물이 모두 동쪽으로 흘러가건만, 나만 홀로 서쪽으로 가는구나. ”
문성공주 이전인 기원전 105년 한나라 무제는 공주 세군(細君)을 “天馬(천마)” 를 바친 “오손 (烏孫)”
왕 곤막에게 시집보내니 “물에 비친 고운 꽃,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버들” 같았다는 공주 세군은
악기 비파를 만든 여인 답게 悲愁歌(비수가), 일명 황곡가 (또는 백조가) 라고 불리는 시를 짓습니다.
우리집이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 한모서리요
멀리 다른 나라에 의탁하니 오손왕이로다.
궁려는 방이 되고, 전은 담이 되었으니,
고기는 음식이요 낙은 장이로다.
항상 고향을 그리워함이여 마음이 슬프니
黃鵠(황곡, 백조) 이 되기를 원함이여 고향으로 돌아감이로다.
그 72년 후인 기원전 33년 한나라 왕소군은 한나라 선제때 후궁으로 흉노 선우인 호한사 에게
시집을 감으로써 60년간 두나라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여인이니 “침어낙안(浸魚落雁)” 에
“폐월수화(閉月羞花)” 중에 낙안(落雁) 은 바로 왕소군(王昭君) 을 지칭하는데....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가다 왕소군을 보고 날갯짓 하는 것을 잊어 추락한다” 라고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공주 일행이 토번의 변경인 하원에 도착하자 손챈감포는 라싸 근방까지 마중나가 영접을 했으니
그는 문성공주에게 토번의 옷을 입히고 토번의 머리를 하게 하였으며 손챈감포에 의해
문성공주는 백해(칭하이성 찰릉호)에서 첩이 되었고 이도종은 당나라로 돌아갔는데 토번의
백성들은 명절에 입는 옷차림을 하고 춤과 노래로 공주를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손챈감포는 당나라를 굴복시켰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포탈라궁을 지었습니다.
원래 문성공주는 손챈감포의 아들인 궁송궁첸에게 시집갔으나 아들이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의 형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와 재혼했는데, 사실 문성공주 자체의
혼인은 당시 당나라에 큰 사건이 아니었으니 공주는 안시성에서 토산을 쌓은 것
으로 유명한, 당태종의 6촌인 강하왕 이도종의 종녀(宗女) 라는 기록만이 있을 뿐 입니다.
문성공주와 손챈감포의 결혼을 두고 누가 숙이고 들어갔느냐는 설론이 있는데 손챈감포
는 문성공주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 문성공주가 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티베트인
들의 '자면의 풍습 '을 싫어하자 이를 폐지하는 등 정성으로 대했으며..... 또한 친당
정책을 시작해 당나라와 교역하며 당이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챈감포 사후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으니 당시 토번 왕국의 국력은 정점에 달한
시기였고, 명신 가르통첸의 개혁과 가르 가문의 집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
이니 669년 토번은 실크로드 안서 4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서 양국은 적대관계로 돌아서며,
신라는 이 기회를 틈타 백제땅의 웅진도독부를 차지하기 위해 2만의 군대를 압록강 너머로 보냅니다.
당나라는 최고의 명장 평양 안동도호부의 설인귀를 불러서 10만 군대를 주어 반격 했지만....
토번 왕조는 대외 제도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 또한 증가되어 "대비천전투" 에서 전멸
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으며.... 이후 토번이 당나라 본토를 침공하는지라 신라는 이 기회
를 틈타서 머나먼 동쪽 한반도에 전력을 다하기 어려운 당군을 황해도 이북으로 몰아냅니다.
그러나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되고 그후 710년에 금성 공주가 토번에 시집
오면서 일시적으로 당나라와 화친했지만, 715년경 부터 당나라가 토번에 대공세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줄였고, 당의 명장이었던 고선지의 원정으로 그 성과는 최고 정점에 달합니다.
고선지 역시 서쪽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의 이슬람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하고, 안사의난
이후 하서 및 농우, 안서 및 북정 지역의 군사들이 반란 진압에 소모되면서 당나라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하니.... 이에 당나라는 자자세가 되어 토번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토번 제국의 정복 활동은 계속되어 왕국의 힘은 8세기 후반에 더욱 확장되었으니 토번은
파키스탄 북부와 네팔, 인도 북부와 벵골과 방글라데시는 물론 중국의 간쑤성(甘肅省) 과
쓰촨성(四川省) 서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실크로드를 장악해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였습니다.
763년 당이 안녹산의 대란으로 혼란에 빠지자 공물을 보내지 않았음을 빌미로 삼아 20만 대군
을 몰아 당군과의 수차례에 걸쳐서 정면 대결을 시도해서는 승리를 거두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 했고... 자신들이 당나라 황제를 마음대로 세울 정도로 엄청난 위세를 떨쳤습니다.
토번제국의 당나라 수도 장안 점령과 약탈은 토번이 동북아시아 최강국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으며 781년에는 상치싱얼이 월아천 전투 대승 후에
서역의 돈황을 점령했고 790년에는 줘치수가 북정을 점령해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791년 서역의 전역에서 위구르제국에게 패하면서 조금씩 영향력이 줄어들더니 800년대 초반
부터는 운남 지방의 남조 왕국에서 까지 견제를 받았으며 결정적으로 아랍의 아바스 왕조와의
대결에 국력을 너무 소모하고 당, 위구르와의 전쟁에서도 큰 성과를 얻지 못해 결국 당과 화친을 합니다.
토번과 당나라는 820년에 협정을 맺어 국경선을 확정함으로써 서로 무력 충돌을 피하기로 했는데 이때
확정조약은 티베트 수도 라싸의 조캉사원 앞에 당번회맹비라는 내용으로 새겨져 지금까지 내려 옵니다.
'이 비문이 세워진 날부터 토번인은 토번인의 땅에서, 당나라인은 당나라인의 땅에서 각자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라고 쓰였고 1950년 대지진으로 국경 지방의 비석이
파괴되기 전까지 이 비문은 그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였는데, 라싸 지방의 당번회맹비
는 아직 무사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모택동의 중국군이 침입해 티베트를 점령했습니다.
토번 제국은 줄곧 당나라와 대립을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인 관계만을 지속했던 것은
아니었으니 초대 손챈감포 본인 부터 당나라의 제도와 기술 수용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부인이 당나라 공주였으니 문성공주는 티베트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습니다.
율령제와 한자를 비롯한 유교 경전등 다른 한자문헌들을 받아들인 기록도 있는데 그러나 티베트는 인도문자
계열을 잇는 티베트 문자를 따로 만들어 활발히 씀으로써 한자나 한문 사용은 정착하지 않았고, 불교도
한역 불경이 아니라 티베트어로 바로 번역하여 받아들여 한국이나 일본등 중국 문화권과는 전혀 다릅니다.
압바스 왕조 이전의 우마이야 왕조 칼리파 우마르 빈 압둘 아지즈가 당나라와 토번 제국으로 각각
사절을 파견하는데 이 중 티베트로 간 사람의 이름은 살라 빈 압둘라 하나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753년(신라 경덕왕 12년) 1월 1일, 당나라 봉래궁(蓬萊宮)에서는 신년을 축하하는
의식이 거행됐는데 식장에 참석한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으니 누가 더 서열이 높은 자리에 서느냐를 놓고 빚어진 갈등이었습니다.
애초 당 조정은 서반(西班)의 서열 1위에 토번(吐蕃) 사신, 2위에 일본 사신을, 동반(東班)
의 서열 1위에 신라 사신, 2위에 대식국(大食國) 사신을 배치했는데, 일본에서는
712년에 고사기 그리고 1145년에 고려에서 편찬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 720년
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일본서기가 출판되었으니 저 사건은 그 30여년 후의 일입니다.
일본 사신 대반고마려(大伴古麻呂)는 “신라는 옛날부터 일본에 조공하는 나라인데 일본 사신 보다
윗자리에 서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고 당 관리들에게 항의했으니 당 조정에서 누가
더 높은 대접을 받느냐를 놓고 신라와 일본 사신이 벌인 다툼을 '쟁장(爭長) 사건' 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토번 제국을 우마이야 제국이나 압바스 제국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고 더 우대해주었으며 탈라스 전투에서 당나라 군이 압바스제국에 패배한
이후에도 한동안 신장 지역은 이슬람이 아닌 불교가 우세했는데 그 이유는 중앙아시아
패권을 두고 토번 제국과 압바스 왕조 사이의 전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기 때문 입니다.
801년 티베트인들은 상당수의 이슬람 압바스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이들을 동부 국경으로 배치
하였는데, 토번 제국과 압바스 제국은 중앙아시아 영토를 두고 대립을 계속하였는데, 한쪽이
절대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일진일퇴를 거듭햇으니 호탄 일대에서는 티베트인들이
압바스 칼리프조 군대에 맞서서 영토를 지켜내는데 성공했으나, 아프가니스탄 일대
에서는 무슬림 군대가 812~815년경 카불의 티베트 총독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한때 당나라와 이슬람 아바스, 위구르 제국 마저 벌벌떨게 만들던 토번 제국의 쇠퇴는 참 아이러니
하게도 티베트의 정체성인 불교에서 시작되었으니 향후 티베트의 종교의 방향성을 결정짓게 되는
삼예논쟁 이후로 토번 제국의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에 엄청난 지원을 하면서 불교를 융성시킵니다.
불교 위상이 드높아지면서 귀족과 승려들의 자만 역시 하늘을 뚫을 기세가 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으니
41대 왕인 랄파칸은 금강수보살의 화신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에 적극적이었으며 국력 또한
최고를 달리고 있었으나 불교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비정상적, 맹목적으로 불교를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7개 가구가 한 승려를 받들게 하는 법인 칠호양승제를 시전하는 동시에 그 일곱 가구가 한
승려의 의식주를 지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최고급 옷까지 바치게 하며 옷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게 만들어질 경우 벌을 면치 못했으며 승려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시 손가락
을 자르고 승려를 삐딱하게 볼 시 눈을 뽑는 등, 불교 우대의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불교답게 육식을 금하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티베트의 척박한 사정으로 육식 금지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써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며 랄파칸의 사망 이유에는 지병으로 죽었다는 설,
전투 도중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로는 불교의 만행을 보다못한 뵌교 승려들의
암살설이 있으니 랄파칸 사후, 불교를 탄압했던 랑다르마의 즉위로 보아 뵌교 암살설이 유력합니다.
이후 마지막 왕인 랑다르마가 암살당하면서 토번제국은 실질적으로 붕괴하는데.... 그는 승려 강제
결혼, 강제 사냥, 사원 및 불경 화형식 등으로 불교를 강력하게 탄압했으니 반발한 한 승려가
신의 계시를 받고 티베트 전통 종교인 뵌교 사제처럼 검은칠을 한 흰옷을 입고 역시 검은 칠을
한 백마를 타고는 당과 토번 간의 회맹비를 보던 랑다르마의 미간을 맞추어 암살하는데 성공합니다.
랑다르마때 가르공열의 반란은 중국 사서에도 기록될만큼 대단했으니 랑다르마가 찬보에 있던 시절
상비비와 랑다르마를 위시한 주화파와 가르공열을 위시한 주전파가 대립하였고 가르공열이 결국
하서에서 탕구트와 회흘을 규합해 당을 공격하지만..... 당조와 토번의 연합 공격으로 인해 도망칩니다.
이에 토번왕의 친위대가 쫓아갔으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검은 칠이 벗겨서 흰 옷을 입은 사람과 흰
말을 탄 사람으로 변해 친위대가 알아보지 못해 도주에 성공할수 할 수 있었다고 하며, 랑다르마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둘은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이자 적자인 염탄과 둘째 부인의 아들 오성이었습니다.
죽기 전에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는데, 두 이복형제의 싸움이 내전으로 이어졌고 300년
역사의 토번 제국의 종말을 거히게 되는데 오성의 반란은 성공적이지 못했는지, 결국 그의 무리는
제국의 서쪽 경계선인 응아리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지역의 귀족 자제와 결혼해 구게 왕국의 기원이 됩니다.
염탄은 반대로 티베트의 중앙 지역인 우 지역을 갖게 되지만 제국의 힘은 결국 상실하게 되고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이후 851년 사주(돈황)의 호족 장의조가 돈황 인근에서 토번군
을 몰아냄으로써 귀의군을 설립했으며... 량주를 제외한 농우 지방도 전체를 당나라에 바쳤습니다.
그후 저 장의조 사후 하서 지역은 회흘인들에게 빼앗겼고, 하황 일대는 토번인들이 다시 회복
했지만..... 결국 토번은 이어지는 내전과 반란으로 토번 제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티베트는 분열되고 말았으니 어떤 이는 843년에 토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