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택 揀擇
조선시대 왕실에서 혼인을 치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혼인 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족 및 궁인 등이 나아가 직접 보고 저격자를 뽑는 행사를 간택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만 해도 이와 같은 간택제도는 없었으며, 비빈(妃嬪)을 구할 경우에는 상궁을, 부마(駙馬 ..왕의 사위)의 경우에는 감찰로 하여금 각각 예정된 처녀, 총각의 입으로 가서 혼인의 뜻을 전하고 당사자를 살펴 결정하게 하는 중매혼의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간택(揀擇)제도는 태종 때 부마선택 사건을 계기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태종이 춘천부사 이속(李續)에게 감찰을 보내어 혼인의사를 밝혔는데, 이속은 달가워하지 않으며 짚신 짜는 데는 지푸라기가 제격이라고 말함으로써 혼인을 거절하는 뜻을 암시하였다. 이에 태종은 크게 노하여 이속(李續)의 아들에게 금혼령을 내리고, 이후 국혼에는 후보자의 단자(單子 .. 명단)을 수집하여 직접 간택하도록 하는 것을 제도로 정하였다.
본래 간택의 적용범위는 비빈에 한정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반 왕자녀(王子女)의 배우자까지도 이 제도에 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간택의 사례는 1439년(세종 21) 3월과 4월, 의창군(義昌君)과 한남군(漢南君)의 배우자 선발이었다. 의창군의 경우에는 사족(士族) 처녀 26명을 사정전(思政殿)에 모아 11명을 뽑고, 이틀 후 같은 장소에서 재선을 했다고 하며, 한남군의 경우는 경회루에서 8명의 처녀를 대상으로 간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택의 절차는 먼저 금혼령을 내고 다음으로 처녀 혹은 동남(童男) 봉단령(捧單令)을 내린다. 금혼령이 내려 있는 기간에는 양반 아닌 서민도 결혼할 수 없었다. 봉단령은 적임자를 가진 집에서 스스로 단자(單子 .. 명단)를 내라는 명령이다. 그 자격은 사족으로서, 李氏가 아닌 사람, 부모가 있는 사람, 세자(또는 왕자녀) 보다 2~3세 연상까지의 여(남) 및 이성친(異姓親)의 촌수 제한이 있었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등 3차에 결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초간택의 후보자 수는 대체로 30명 안팎으로 여기서 5~7명을 선발하고, 재간택에서는 3명을, 그리고 마지막 삼간택에서 1명을 결정하게 되어 있다. 간택일은 특별히 점을 쳐서 정했으며, 당일 처자들이 궐내에 들어오면 넒은 마루에 모아놓고 각기 그 자리 앞에 아버지의 이름을 써붙이도록 하였다. 처자들에게는 각각 간단한 다과상을 내려 그 행동거지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이 때 왕과 왕비는 발을 드리운 안 쪽에서, 궁녀들은 면전에서 그들을 관찰하였다. 이렇게 하여 삼간택말 마지막으로 뽑힌 처녀는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별궁으로 들어가 가례(嘉禮) 전까지, 장래의 비빈으로서의 예비교육을 받았다. 그 기간이 50일 남짓하지만 경우에 따서는 단축되는 경우도 있었다.
선발의 기준은 우선 명문의 후예로서, 부친의 지위가 높지않은 집안의 딸이었다. 이런 집은 혈통과 가문은 좋되, 권력도 재산도 없는 집이 많았다. 이것은 사치와 교만을 경계하는 뜻도 있겠으나, 외척의 발호(跋扈)를 꺼리는 의도가 더 짙다. 또 본인의 됨됨이와 용모에도 장래 국모로서의 덕과 복, 어진 인상을 우위에 두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건은 원칙론에 불과했으며, 실제는 외적요인, 즉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간택이 형식적인 절차인데다 다행히 뽑힐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넉넉치 않은 선비의 집안에서는 처자의 의복, 가마에서부터 유모 등 수행원의 복장까지 마련해야 하는 부담때문에 처녀 단자 올리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될 경우 형벌이 따르게 되므로 난처한입장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는 그의 '한중록'에서 세자빈으로 간택될 당시 국명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單子를 올렸으나, 옷치장 등 경비때문에 빚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하였다. 이 때문에 대체로 어느 시대에나 초간택에 모이는 인원은 30명 안팎에 지나지 않았고, 때로는 그 정도의 인원도 차지 않아 관계 관원이 견책을 받고 간택 자체가 연기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간택제도는 적령기의 처자를 둔 사족들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이면서도 사실상 의례적인 행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내막으로 모르는 어린 당사자들은 간택의 의미를 알 리 없고, 고운 옷을 입고 대궐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는데, 초간택에 참여하면 명주옷감을 받았고, 재간택에 참예하면 중국 비단과 노리개까지 받았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 후기 노론계열에서 ' 국혼물실 (國婚勿失) ' 즉 국혼을 놓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제일의 당론으로 삼았던 것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한 권력의 유지와 확대를 꾀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왕비는 노론집안의 딸이 아닌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세도정치도 결국은 이러한 간택제도에 바탕을 두고 나타난 정치형태이었던 것이다.
위 그림은 '삼간택후예별궁반차도(三揀擇後詣別宮班次圖)' 이다. 반차도는 인물과 기물의 위치와 순서 그리고 종류와 수량을 나타낸 그림이다. 묘사보다는 그 내용을 명료하게 알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각 인물과 기물 옆에는 그 명칭과 숫자가 표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위 그림은 삼간택된 왕비나 세자빈이 가례를 앞두고 별궁에 머무르기 위하여 그곳으로 블어가는 행렬을 그린 것이다.
세자빈(世子嬪)이 되다
광해군을 내쫒고 왕이 된 인조(仁祖) ... 그는 서인(西人)의 도움으로 仁祖反正을 성공시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仁祖와 그의 부인 인열왕후는 남인(南人)출신으로 며느리를 간택하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서인들의 심한 반대를 무릎쓰고 1625년 남인 출신, 윤의립의 딸을 간택한다.
그러나 西人세력은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인조를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인조는 드디어 윤의립(尹毅立)의 딸과의 혼인을 파혼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세자빈(世子嬪)의 간택은 2년간 연기되었으며, 결국 1627년 서인 명문의 우의정 출신 강석기(姜碩期)의 딸, 강씨를 간택하게 되었다. 그녀의 나이 17세 이었다. 강빈(姜嬪)이다.
국혼물실 國婚勿失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을 축출한 반정(反正)정권은 서인(西人)이 주도하고 남인(南人)이 연합하는 형태로 시작된다. 그리고 서인정권(西人政權)은 두 가지 정책을 내거는데 이를 각각 숭용산림(崇用山林)과 국혼물실(國婚勿失)이라고 한다. 숭용산림(崇用山林)은 현재 정계에 진출하지는 않았지만, 명망 높은 산림세력을 존중하는 것으로, 정파의 계보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적 덕망에 의해 인물을 중용하고자 한 것은 성리학적 붕당정치의 상호 비판원리를 구현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국혼물실(國婚勿失)은 왕후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즉, 왕후자리는 반드시 서인에서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서인정권은 완성된다. 이 원칙은 인조반정 이후 계속 이어져 왔다. 이 원칙의 배경은 이러하다. 광해군의 며느리, 세자빈 박씨는 大北 집안이었다. 그 결과 광해군의 처남 등이 권력을 휘어잡고 있었고, 서인은 그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랬기에 외척을 자신의 당에서 배출하는 것이 서인의 장기집권할 수 있는 바탕이 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략결혼 政略結婚
인조는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 이후 군주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며느리만큼은 자신이 직접 간택하고 싶었고, 그것도 자신을 도와 반정을 성공시킨 주역, 西人이 아닌 南人에서 며느리를 고르고 싶었다. 또한 부인 인열왕후, 아들 소현세자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러나 서인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소위 '국혼물실'이었다. 반정공신 서인들은 인조에게 절대로 서인 규수가 아니면 안 된다고 미리 선을 그어 놓았다. 1625년 삼간택(三揀擇)에 윤의립(尹毅立)의 딸과 강석기(姜碩期)의 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파평 윤씨의 南人 윤의립의 딸이 확정되었다.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남인의 규수를 세자빈으로 간택하자, 西人이 인조를 협박하고 나섰다. 윤의립이 이괄의난(李适의 亂)에 연루된 윤인발과 같은 파평 윤씨라는 다소 유치한 이유로 적극적인 반대에 나섰다. 인조는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다가 서인의 半 협박에 못이겨 결국 남인 윤의립의 딸을 파혼시켰다. 결국 윤의립의 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자빈 간택은 2년 뒤로 미루어지고, 결국 1627년 11월 당시 동부승지 강석기(姜碩期)의 둘째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강석기는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17대 손이면서, 서인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당시 동부승지이었고, 뒷날 우의정을 지낸다.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627년 11월, 그들은 이제 백년가약을 함께 하기로 한 부부가 된 것이며 장차 조선 17대 왕, 왕비가 될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 두 인물이 겪게 될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들 자신도 몰랐을 것이고, 仁祖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17살의 나이로 간택된 그녀는 그렇게 궁궐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혼례를 치루었던 숭정전(崇政殿)이다. 그리고 소현세자 가례도감의례 (家禮圖鑑儀禮 .. 1628)에 나오는 姜嬪의 가마 행렬그림.
소현세자는 이미 간택이 확정된 윤의립의 딸에게 호감을 두고 있었으나, 서인(西人)의 반대로 파혼되고 그 2년 뒤 강석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자 내내 섭섭하였다. 이러니 강빈이 소현세자와의 사이가 원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 때는 소현세자가 강빈보다는 세자궁에 소속된 종2품 양제 귀희라는 여인을 더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제 귀희는 인조의 비(妃)인 인열왕후를 저주하다가 인조 10년, 1633년에 처형당했다.
야사에는, 소현세자는 윤씨 소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아였으나, 파혼되자 방황을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윤씨 소녀는 파혼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고 한다. 비록 허혼 한다고 하더라도 세자빈으로 삼간택까지 갔던 여성을 취할 사대부가는 없었으므로 평생 수절을 해야 할 운명이었기에 자결을 택했다는 것이다.
영회원(永懷院) ...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의 큰 아들 소현세자의 비(妃),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의 묘소이다. 1991년 10월25일 사적 제357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老溫寺洞)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왕릉(兒王陵)이라고도 하는데, 사적 지정 면적은 약 700평 정도이다.
아왕릉 兒王陵
이곳 영회원을 지금도 '애기능' 또는 한자로 '아왕릉'이라고 부르고 있다. 입구의 저수지도 애기능저수지라 부르며 낚시터로 유명하다. 애기능이라 부르는 이유는, 야사에 의하면 민회빈 강씨의 첫째 아들이 항문이 막힌 채 태어나 출생한 지 5일만에 죽었다고 하며, 영회원 가까운 곳에 묘를 썼기 때문에 이 일대가 '애기능'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애기능은 오래 전에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고, 그 자리에는 금천(衿川) 姜氏 문중묘역이 조성되었다. 아마도 민회빈 강씨가 금천 강씨이어서 이러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듯하며, 확실한 근거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1646년 3월,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가 죽음을 맞았다. 그녀의 시아버지 인조를 저주하고 국왕의 수라에 독약을 넣은 사건의 주모자로 의심받았기 때문에, 仁祖는 그녀를 폐출하고 마침내는 사약을 내린 것이다.
사건의 여파는 계속되어, 민회빈 강씨의 노모와 4형제가 처형되거나 고문을 받다가 죽었고, 인조의 손자이기도 한 그녀의 세 아들은 모두 제주도로 귀양를 갔다가 그곳에서 장남과 차남, 두 아들이 죽었다. 죽음 후 72년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억울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1718년(숙종 44)에 숙종은 그녀를 민회빈(愍懷嬪)으로 복권시켰고, 묘소의 이름을 민회원(愍懷院)으로 정하였다. 이때 민회빈의 신주는 이현궁(梨峴宮)에 있던 소현세자의 사당에 합쳐졌는데, 숙종은 특별히 제문을 지어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 후 1797년(정조 21)에는 正祖가 민회원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정조는 김포의 장릉을 방문한 다음 인천, 부평을 거쳐 안산으로 가던 길이었다. 이 때 정조는 민회빈과 그녀의 아버지 강석기(姜碩期 .. 인조 때 영의정 지냄)를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다음은 민회빈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명가에서 덕을 길러 우리 왕실에 출가하였는데, 부귀에서 점차 멀어지고 창상의 변고를 어찌 말하리오. 아득한 샘의 근원은 실로 무덤에서 가까운데 소나무, 잣나무는 일찍이 자라지 않았네. 내가 일을 벌여 봉분을 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무덤에 와서 절 하고 예주(禮酒)를 가득 따르네
민회원(愍懷院)은 1870년(고종 7)에 영회원(永懷院)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민회빈이 묻힌 이곳은 원래 친정인 금천(衿川) 강씨의 묘역이었다. 영회원 입구 저수지(지금은 낚시터로 이용)에서 영회원으로 이르는 길가에 있는 비석은 아버지 '강석기'의 신도비이고, 그 오른쪽 산자락에는 금천 강씨의 문중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민회빈의 부친인 강석기 부부는 물론 그녀의 동생으로 함께 화를 당한 강문성, 강문두, 강문벽의 묘소도 있다.그 가운데 강문성은 김광현의 사위이었는데, 김광현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사망한 김상용의 아들이다.
姜嬪의 일생
姜씨는 고려의 장군 강감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석기(碩期)이다. 仁祖 5년(1627)에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 결혼하여 세자빈이 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강씨는 청나라에 人質로 잡혀 간다. 9년만에 귀국하나, 仁祖는 아들인 소현세자가 자신의 王位를 노린다고 의심하여, 소현세자를 독살한다. 그리고는 곧 세자빈인 강씨에게도 사약을 내려 죽게한다. .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仁祖의 총애를 받던 소의조씨(昭義趙氏)에 의해 인조를 저주했다는 무고와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을 받아 후원 별당에 유치(幽置)되었다가 1646년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강빈의 친정 어머니와 4형제는 모두 처형 또는 장살(杖殺)되었고, 어린 3명의 아들도 모두 귀양을 갔다. 효종 때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신원(伸寃)을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1718년(숙종 44)에 비로소 복위되었다.
이리하여 남편인 소현세자는 경기도 일산 서삼릉에... 그의 부인 강씨는 경기도 광명시 , 이 곳에
따로 묻혀 있다.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 중, 조선 땅을 벗어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그리고 최초의 CEO이었다.
병자호란과 강화도 피난
仁祖 15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척화론과 주화론이 맞선 가운데 仁祖는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인조는 우선 왕실의 여인들과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다. 그 일행에는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강빈(姜嬪)과 아들이 있었다. 전쟁 때마다 왕실의 피난처가 된 강화도 .. 지금은 다리가 있지만, 당시에는 지금의 김포시 월곶면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나루터에 도착한 강빈 일행은 타고 갈 배가 없어 이틀이나 발이 묶였다. 때는 음력 12월, 병자년의 추위는 혹독하였다. 그리고 뒤에서는 淸나라 군사가 쫒아 오고 있었다.
왕실의 피난을 책임진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 1589~1637)이 자신의 식솔들을 먼저 챙기는데 모든 배를 사용해버린 탓이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경징이 배를 모아 가족과 친구들을 먼저 건너가게 하고, 다른 이들은 건너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런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강빈(姜嬪)이 드디어 김경징(金慶徵)을 크게 꾸짖었다.
慶徵慶徵 汝何忍爲此 (병자록)
경징아,경징아! 네 어찌 이럴 수 있는냐
왕실의 여인으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언사이었다. 당시 사회는 여인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면 안되는 분위기이었지만, 姜嬪은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는 분노하고,목소리를 내야 할 때에는 내는 성격이었다. 강빈의 일갈에 배가 마련되었고, 일행은 비로소 강화도로 건너 갈 수 있었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 1월22일, 청나라군대는 순식간에 강을 건너 강화산성으로 들이닥쳤다.이제 산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이었다. 강빈은 결단을 내린다.
나와 대군은 마땅히 이 곳에서 죽을 것이나,
원손이 같이 죽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다.
너희들은 이 아이를 안고 나가서 피하거라.
불행히 강을 건너지 못하면 산골짜기에 숨어 있으라.
죽든지 살든지 너희들이 잘 처리해라 ... 연려실기술 25권
吾與大君當死於此 不忍見元孫 爾等抱此阿出避 不幸不得渡江隱伏山谷間 死生之際汝基善處
결혼 9년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자, 장차 조선의 왕이 될 元孫이었다. 아들에 대한 조처를 마친 후 강빈은 자결을 결심한다. 왕실 여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강한 만류로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빈궁(嬪宮 .. 강빈)이 일의 형세가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고 칼을 취해
자기 목을 찌르니 급히 붙들어 큰 상처에는 이르지 못했다...연려실기술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52일 째, 1637년 1월30일 조선은 청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仁祖는 三田渡에서 淸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고두례(三拜叩頭禮)의 의식을 치루고, 그 자리에서 치욕적인 정축화약(丁丑和約), 이른바 삼전도조약까지 맺었다. 그런데 이 정축화약에는 장차 소현세자와 강빈의 운명을 뒤바꿀 조항이 들어 있었으니 .. 바로 " 너(仁祖)의 맏아들과 다른 아들 하나를 인질로 삼으라 "는 조건이었다.
관련 기록들 .. 심양장계, 심양일기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소현세자 일행이 청나라 인질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며느리를 보기 위하여 숙소에 들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조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2월5일,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 인질이 되어 만주로 향했다. 강빈은 처음으로 궁궐을 나와 조선을 벗어나고 넓은 대륙을 보게 된다. 4월10일 60여일의 기나긴 여정 끝에 강빈 일행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瀋陽)에 도착하였다. 심양장계(瀋陽壯啓)의 기록에 의하면 .... 이때 마중 나온 용골대(龍骨大)는 강빈 일행에게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기를 강요하며, 강빈의 가마를 가로 막고 나선 것이다. 조선의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강빈의 결단으로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탄다.
심양장계 瀋陽壯啓
소현세자와 강빈 일행을 수행한 시강원(侍講院)의 신하들이 승정원에 보낸 장계(壯啓)를 수록한 책이다. 정본과 부본 각 10책이다. 세자일행이 머문 심양관(瀋陽館)에서는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본국의 승정원에 장계를 보내 지휘를 받았고, 때로는 신속히 처리하기 위하여 임시조치로 평안감사, 義州府尹에게 世子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이 책에는 1637년 2월19일부터 1643년 12월15일까지의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주로 세자 이하 수행신하의 동정을 淸나라 아문(衙門)과의 교섭에 대한 보고와 처분을 구한 것, 심양의 상태 그리고 명과의 관계에 대하여 견문한 것 등이다. 심양일기(瀋陽日記)와 더불어 明,淸 교체기 조선의 외교상황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며, 풍부한 두 자료가 있어 국어학의 연구자료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심양일기 瀋陽日記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이 1637년부터 1644년까지 8년동안의 청나라 심양에서의 人質 생활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 때의 상황을 후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정리했다. 1637년 1월30일부터 연,월,일 순으로 기후, 일상, 동정, 문안 등 낱낱이 기록하였다.
연도별로 주요 수록 내용은 ... 1. 1637년 1월 仁祖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일과 세자 일행이 심양으로 출발하여 4월에 도착하기까지의 일... 2. 1638년봉림대군이 청나라 태종의 서행(西行)에 동행한 전말 .. 3. 1639년 청나라의 서역 정벌에 조선이 조병(調兵)의 약속 시기를 어긴 일로 책망한 내용 .. 4. 1640년 임경업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도착한 일 .. 5. 1641년 세자가 유림(柳琳)의 군대와 더불어 금주성(錦州城) 공격에 참가한 일 .. 6. 1642년 조선의 農軍이 청나라에 도착한 일, 최명길(崔鳴吉)의 압송, 임경업장군의 탈출 .. 7. 1643년 최명길, 김상헌의 석방, 청나라 태종의 죽음과 고애사(告哀使)입경 .. 8. 세자의 일시 입경과 심양으로 돌아간 일, 세자의 서정 참가, 청나라 세조(世祖)가 북경 천도 전 날 세자를 데리고 태종릉을 참배한 사실 등이 적혀 있다
瀋陽에서의 억류생활
심양에서의 人質생활이 시작된다. 姜嬪의 나이 27세이었다. 당시 중국의 형편은 .. 만주족을 통합한 後金은 이름을 淸으로 바꾸고 새 황제를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누르하치의 후계자인 청 태종,홍타이지(皇太極)이다. 淸은 이제 중원의 明나라를 넘보고 있었다. 심양은 청나라의 수도이었다.당시 심양으로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잡혀 왔고, 노예시장에서 賣買되고 있었다. 소현세자의 심앵 생활을 기록한 "심양일기"는 당시의 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포로의 매매를 허락하여 청인들이 남녀들을 성문 밖에 집합시키니
그 수가 수만이라. 혹 모자가 상봉하고 혹 형제가 서로 만나 얼싸
안고 울부짖으니 그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병자호란 때 主和論을 주창한 최명길 (遲川 崔鳴吉)의 "지천집(遲川集)"을 보면 당시 淸에 잡혀간 조선 사람이 50만명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빈과 소현세자도 사실상 포로나 다름없었다. 소현세자와 강빈 일행은 청나라 황궁의 남쪽인 대남문 근처 심양관(瀋陽館)에서 8년동안 살았다.
심양관 瀋陽館
이 곳은 황궁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이었다. 왕궁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통제하기 쉬웠고, 황궁과 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심양 도성의 성벽 위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심양관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 할 수 있었다. 淸나라가 사전에 치밀하게 강빈 일행을 억류할 장소를 물색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을 떠나온지 석 달째 되던 5월 7일, 소현세자와 姜嬪 일행은 비로소 심양관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함께 온 宮女와 臣下까지 조선인 일행은 모두 192명이었다. 당장 많은 식구가 먹고 살 일이 문제가 되었다.
"인조실록"에 " 심양에 있는 사람들의 거처와 의복이 마치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과 같았다 "고 기록될 정도로 초창기 이들의 생활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淸나라는 明나라를 정복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어서 소현세자 일행의 경제적인 대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선군의 파병과 군수물자의 협력을 소현세자에게 강요하였다.
貿易으로 富者가 되다
어렵게 심양생활 3년째를 꾸려가던 1639년 6월, 강빈과 소현세자 일행에게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청나라 황족 한 사람이 은밀히 사람을 보내 은자 500냥과 편지를 전해 왔다. 편지에는 면포, 표범가죽, 수달피 등 조선의 물건을 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仁祖實錄 .. 심양 팔왕(八王)이 은밀히 은자 500냥을 보내 무역을 요구하였다.
문제의 편지를 보낸 팔왕(八王)은 청태조 누르하치의 열두번째 아들이었다. 그 이유는 ? 원래 유목민족인 청나라 사람들은 농사와 수공예에 서툴렀다. 그리하여 생활필수품이나 생산도구 등은 교역을 통하여 해결해 왔는데, 주요 교역대상국이었던 明나라와 적대관계가 되자 더 이상 그들로 부터 그런 물건들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八王은 淸나라를 대신하여 조선을 교역의 대상국으로 선택한 셈이었다. 八王과의 첫 거래가 이루어진 후 청나라와의 본격적인 무역이 시작되었다. 종이와 담배에서부터 홍시와 배 등 과일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과 양이 점점 늘어났다. 팔왕과의 무역을 통해 심양관은 시급한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거래는 강빈이 직접 챙겼다. "인조실록"에는 "강씨가 반드시 장계를 가져다 임의로 써 넣거나 삭제하였다 "는 대목이 나온다. 청의 요구를 조정에 전달하는 공식문서인 장계(壯啓)도 강빈의 손을 거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무역을 통하여 재물도 쌓이기 시작했다. "仁祖實錄"에 따르면 강빈의 개인 재물만 해도 "은 1만650냥, 황금이 160냥에 이르렀다 "고 한다. 소현세자는 심양관의 재력을 바탕으로 청나라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아나갔다. 덕분에 소현세자는 조선을 압박하던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제 무역은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뛰어난 경영능력을 지닌 강빈(姜嬪)의 활동이 있었다.
인조의 반감 仁祖의 反感
그러나 인조는 심양관과 강빈의 무역활동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인조의 입장에서는 왕실의 세자빈이 오랑케를 상대로 돈벌이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仁祖의 마음에 소현세자와 강빈은 점점 멀어져 갔다.
仁祖實錄 ..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돈벌이만을 일삼아 크게 인망을 잃었다.
조정에 보내는 장계까지 직접 챙길 정도로 심양관의 실질적인 경영을 도맡았던 강빈.. 강빈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조선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조선 사대부 女人의 기본 법도는 집에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在家從父),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適人從夫),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夫死從子) ..이른바 삼종지도(三從之道)이었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닌 世子嬪이 사업에 나섰으니 仁祖가 못마땅하게 여긴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였다. 게다가 강빈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또 다른 일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姜嬪이 일군 淸나라의 조선 땅
심양 생활 5년째 되던 인조(仁祖) 19년 12월, 청나라는 소현세자 측에게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한다.
황제이위 皇帝以爲 황제께서 이르기를
조선왕자입래 朝鮮王子入來 조선의 왕자가 이 곳에 온지
금과오년 今過五年 금년으로 5년이 지났으니
불가년금료 不可年給料 더 이상 식량을 대줄 수 없으니
자명년춘경작 自明年春耕作 내년 봄부터는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라..
농사는 곧 정착을 의미하였다. 소현세자는 크게 당황하였고, 심양관의 신하들은 조선에 돌아가지 못 할 것을 우려하여 계속 반대하였다. 그러자 청나라는 다른 조건을 제시하고 살득하여 왔다.
칙피로인속출 則被虜人贖出 이곳의 조선인 포로들을 직접 속환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이왕자조만귀거시솔거 而王子早晩歸去時率居 왕자가 귀국할 때 데리고 가면 될 것이오.
조선인 포로들을 돈을 주고 되찾아가서 농사를 지으라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제안에도 조선 측의 신하들은 계속해서 반대했지만, 강빈의 생각은 달랐다. 노예시장에서 보았던 조선인 포로들의 참상을 강빈은 잊지 않고 있었다. 농사는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기회이었다. 결국 강빈은 청나라의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청나라가 준 땅은 사실상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심양장계"에 따르면 당시 심양관의 농장은 모두 여섯 곳이었다. 노가새(老家塞), 사을고(士乙古), 왕부촌(王富村), 사하보(沙河堡) 등 그 지명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강빈과 조선인 포로들은 그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곡식을 심었다.
거칠고 험한 유목민족의 땅에서 강빈은 조선의 우수한 기술을 살려 농사를 지었다. 성과는 대단하였다. 양식을 마련하고자 시작한 농사는 얼마 후 필요량의 세배가 넘는 곡식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곡식은 청나라의 그 것보다 품질이 좋았고, 자연히 청나라 귀족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렸다.
인조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조씨는 원래 숙원(淑媛)이었다가 1645년(인조 23)에 소의(昭儀)가 되었고, 1649년에는 귀인(貴人)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와 소현세자 그리고 소현세자빈 강씨를 매우 미워하였다. 그녀는 성품이 매우 응큼하고 간사하며, 그녀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인조임금 앞에서 자주 모함하여 궁궐 안에서도 그녀를 매우 두려워 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소현세자 및 세자빈 강씨와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소용(昭容)이던 시절, 밤낮으로 인조의 앞에서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고, 세자 내외에게 누명을 씌우는 등 항상 두 사람을 모함하기 일쑤였다. 인조실록에서는 그녀와 소현세자의 죽음과의 관계를 직접적으로언급하고 있지만 않으나, 소현세자의 부검결과와 함께 그녀가 평소 소현세자 내외를 모함하던 모습을 한 기사에 하께 기록하고 있다.
훗날 강빈은 인조의 게비 장렬왕후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몰랴 사사되었다. 그밖에도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았던 어의 이형익(李馨益)이 조씨 본가에 자주 왕래하는 바람에 조씨의 생모와 추잡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645년. 인조실록, 인조 23년 음력 1월4일의 기사
김자점의 옥 金自點의 옥
그 외에도 그녀는 평소 인조와 계비 장렬왕후도 이간질하여 서로 별거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결국 1651년 (효종 2년) 음력 11얼23일에는 그녀가 사돈 김자점(金自點)과 함께 장렬왕후와 숭선군 부인 신씨 (장렬왕후 여동생의 딸)를 저주한 사건이 밝혀져 관련자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김자점의 옥(金自點의 獄)'이라 한다. 당시 이 사건에는 귀인조씨의 딸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그 여종도 관련이 되어 조정에서는 귀인 조씨와 효명옹주를 모두 치죄할 것을 요청했으나, 효종은 효명옹주가 나이가 어린 관계로 귀인 조씨만 자결하게 하였다. 이때가 1651년 음력 12월14일이다. 다음해인 1652년에는 조씨의 생모 한옥(漢玉)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았다. 그녀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상소가 잇달았지만, 효종은 부왕 인조가 그녀를 총애하였던 점을 고려하여 자결케 하되, 장례는 제도에 맞도록 치르도록 하였다. 그녀는 인조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두었다.
조씨의 등장
인조반정이 지나고 얼마 후, 임금은 권력에 피로를 느끼고, 소현세자 역시 학문에 피로를 느끼게 되는 시점이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반정(反正) 뒤로 대간(大諫)이 대궐에 드나드는 여인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청하였던 것은 경계헤야 될 점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방금(防禁)이 해이해져 적(籍)도 없는 여인들이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궐에 출입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병조는 대궐의 통행을 살필 이무가 있는데, 전혀 단속하지 않고 있으니 직무를 태만히 한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당해 당상과 낭청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실록은 바로 인조의 후궁 조씨의 출현을 말하고 있다. 훗날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민회빈강씨와 함께 삼각관계를 이루며 궁중에 피바람을 불러왔던 후궁 조씨는 등장부터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소현세자의 비극과 조선의 불행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후궁은 간택을 통하여 입궁하거나, 궁녀로 들어와 임금의 눈에 띄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씨는 중전의 형부되는 승지 여이징(呂爾徵)의 천거로 궁에 들어왔다. 뒷구멍으로 들어온 것이다.
'여이징'의 처와 '정백창(鄭百昌)'의 부인은 서로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이었다. 용모가 빼어난 아이를 정백창의 처가 여이징의 부인에게 소개하였다. 궁에 들어온 조씨는 한 눈에 인조의 시선을 빼앗았다. 종4품 숙원(淑媛)에서 정4품 소원(昭媛)을 순간에 꿰어찼다. 병약한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와 숙의 장씨가 있었지만, 인조는 요염한 조씨에게 빠져 들었다. 조씨는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여이징과 정백창은 승승장구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동시에 임신하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금실이 좋았다. 소현세자가 다른 여자들에게 한 눈 팔지도 않았다. 헌데 결혼 6년차가 지나갔는데도 태기가 없었다. 왕실에서도 기다렸지만 은근히 걱정스러운 곳은 강빈의 친정이었다. 신랑이 나이가 어려서 그러려니 하면서도 전전긍긍했다. 세자 나이 20세가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불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왕실에 겹겹사가 터졌다. 삼겹이었다. 인조의 후궁 소원 조씨가 임신한 것이다. 뒤이어 중전이 회임하였다. 원손을 기다리던 인조에게는 아쉬었지만 왕실의 경사이었다. 드디어 기쁜 소식이 순화방에 날아들었다. 강빈이 회임한 것이다. 세자빈의 회임은 친정 강석기의 집을 안도케 하였으며 왕실의 축복이었다. 하지만 강빈은 드러내놓고 기뻐할 수도 없었다. 강빈이 회임 7개월 째 중전이 만삭이었다. 私家의 경우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시에 임신 한 것이다.소원 조씨가 딸을 순산하였다. 효명옹주(孝命翁主)이다. 그러나 아들을 사산하고 산후통으로 위독 상태에 빠져 사흘을 혼수상태로 헤메이던 중전이 산실청에서 죽었다. 인열왕후이다.
점점 멀어지는 시아버지(仁祖)와 며느리(姜嬪)
나라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조선인 포로들에게 강빈과 소현세자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강빈이 벌어들인 돈으로 해방시킨 포로들이 어느덧 5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들 부부들의 선행이 가시회되고 널리 알려질수록 이를 지켜보는 仁祖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갔다.
오랑케를 상대로 돈벌이하는 일도 당시의 윤리로 어긋나는 일이었는데, 조선인 포로들의 구출은 국왕인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포로들의 구출을 세자가 해내는 일은 상당히 부담으로 작용되었고 격려보다는 견제의 마음이 앞 설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세자가 그러한 움직임을 통하여 정치적 야망을 키우고 있다는 의심도 하였다. 사실 인조의 그러한 우려에는 이유도 있었지만, 인조는 옹졸하였고 불안해 하였다. 게다가 세자는 민심까지 얻고 있었고, 그 증오의 화살은 이런 일을 가능케 한 며느리 姜嬪에게 향한다.
仁祖, 강빈 아버지의 문상을 막는다.
강빈이 심양에서 생활을 한 지 7년째 되던 1643년 6월13일, 강빈의 아버지 영중추부사 강석기(姜碩期. 1580~1643)가 사망한다. 소현세자 내외가 왕곡(枉曲)을 위해 귀국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대신 원손 이석철과 다른 아들들을 인질로 맞바꾸는 것을 조건으로 수락하였다. 인조 21년(1644) 1월 초하루 세자 내외는 자신들 대신 볼모로 돌아온 원손과 다른 아들들을 봉황성에서 눈물로 상봉하고 귀국하였다. 강빈은 아버지의 喪을 치르기 위하여 청나라에서 귀국하였지만, 仁祖는 며느리가 친정에 가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仁祖의 가혹한 조치에 보다 못한 신하가 나섰다.
8년동안 서로 막혀 있다가 천리길에 돌아와 어버이를
만나보지 않고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喪에는 가서 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조실록
그러나 강빈을 향한 仁祖의 증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인조는 세자빈이 부친의 빈소를 찾는 것은 왕실의 법도에 없는 예의라며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민심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 걱정되어 법 밖의 예의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인조실록. 인조 22년 2월 9일.
결국 강빈은 허망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심지어 와병 중인 어머니도 만나지 못하였다. 강빈은 부친의 빈소에서 한 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심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인조는 이때 환관 김언겸을 동행하도록 명하였는데, 그는 소현세자 내외를 감시하기 위한 임무를 갖고 있었다. 강빈의 심양생활에 대한 인조의 의심과 불만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그 후 시아버지와 며느리,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 갔다. 청나라는 인조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안겨 주었는데, 그런 그들과 잘 지내는 소현세자와 강빈이 인조의 눈에 곱게 비칠 리 만무하였다. 仁祖는 비겁하고, 옹졸하고 치사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몰락
소현세자, 강빈의 귀국
인조 23년(1645) 2월 1일. 강빈과 소현세자는 드디어 귀국길에 오른다. 인질 생활은 두 사람에게 큰 시련이었지만 또 많은 것을 얻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조선을 꿈꾸고 있었다. 8년간의 중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강빈과 소현세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그들은 청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고 실리를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아직도 멸망한 명나라를 섬길만큼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 중심의 사회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조가 있었다.
생사의 고비를 넘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맏아들 내외를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가져온 서양 서적과 과학기기, 천주교 물품들도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인조에게 청나라 문물을 소개하는 소현세자는 배신자와 다름 없었다. "세자가 돌아올 때 북경의 물건들을 많이 싣고 와서 사람들이 매우 실망했다 .. 인조실록 " 이러한 대목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소현세자의 돌연한 죽음
세자 부부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1645년 4월 25일, 소현세자가 돌연 사망했다. 누가 봐도 의문스러운 죽음이었다. 屍身의 상태부터 이상했다. 온몸에 검은 빛이 돌았고,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하였다. 사관들조차 독살 의혹을 제기할 정도이었다.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고, 얼굴의 일곱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 나왔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인조실록.1645년6월27일
소현세자가 죽고 난 뒤, 왕실에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소현세자의 동생인 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그리고 불과 두 달 후 봉림대군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孝宗이다.
세자가 죽으면 세자의 아들, 즉 原孫에게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조선의 법도이었다. 그런데 인조는 원손이 아닌 동생 봉림대군을 후사로 정한 것이다. 이는 소현세자 가족에 대한 仁祖의 不信이 매우 커서 청나라 물을 먹은 소현세자 세력이 조선의 왕권을 이어서는 안된다는 인조의 확고한 의지가 명확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姜嬪의 몰락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과 전격적인 세자 책봉..강빈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仁祖는 끝내 외면하였다. 그리고 강빈을 감금하였다. 당시 그녀는 유복자를 임신한 상태이었다. 강빈을 홀로 갇힌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死産되었다.
인조의 학대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강빈에게 칼날을 겨누었다. 1646년 1월3일, 인조는 수라상의 음식에 毒이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강빈 측 宮女들을 고문하였다. 그리고 그 배후로 강빈을 지목했다. 그녀의 무고함을 말하던 궁녀들은 고문 속에 죽어갔다. 인조에게 강빈은 이미 역적이었다. 인조는 강빈의 궁인들을 내사옥(內司獄)에 하옥하고 국문을 하였으며, 동시에 강빈을 후원 별당에 감금한다.
인조실록. 인조24년 2월 7일
仁祖 : 강씨가 소시에는 별로 불순한 일이 없었는데, 심양을 왕래한
뒤로부터 갑자기 전과 달라졌소. 이 사람이 귀국할 때 금백(金帛, 황
금과 비단)을 많이 싣고 왔으나, 이것을 뿌린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소.
김자점(金自點) : 강씨가 반드시 강원(講院)의 장계(壯啓)를 가져다가
마음대로 써넣기도 하고,삭제하기도 했다 합니다. 어찌 부인으로서
바깥 일에 이런데까지 간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강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인조의 수하들이 감시하는 상황에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는 것은 불가능한일이었다. 인조가 이미 '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 '라고 엄명하여 강빈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도 인조의 자작극이었다. 인조의 번복구이에 독을 넣은ㅅ ㅏ건도 오리무중에 빠진 후, 인조는 비망기(備忘記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를 내리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이는 그 자신이 소현세자를 죽인 당사자이며, 저주사건과 독약사건을 자작한 범인이라는 자백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미리 홍금(紅錦) 적의(翟衣)를 만들어 놓고 내전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 지난 해 가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와서 분한 마음대문에 시끄럽게 성내는가 하면 사람을 보내 문안하는 예까지 폐한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인들 못하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헤아려 본다면 흉한물건을 파 놓아 저주하고 음식에 독약을 넣은것은 모두 다른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가 어느 시대에나 없겠느냐마는 그 흉악함이 이 역적처럼 극심한 자는 없었다. 군부(君夫 .. 임금과 남편)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천지에서 하루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해당부서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그러나 인조의 비망기를 읽은 신하들은, 강빈을 역적죄로 품의하여 올리라는 인조의 명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기의식을 조장하였다. 병조판서를 궁중에 머무르게 하고, 김자점(金自點)을 호위청에 입직시켰으며 포도대장에게 궁궐의 엄중한 경비를 명령하였다. 이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강빈을 처형하라고 명했다. 이 명령에 대해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등 많은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나, 인조는 요지부동, 오히려 대사헌 홍무적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고 만다.
결국 인조는 강빈의 지위를 박탈하고 궁궐에서 내쫒았다. 1646년 3월15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강빈에게 賜藥이 내려졌다. 17살에 宮에 들어와 세자빈이 된 지 19년만에 대역죄인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명분과 형식에서 벗어나 實利를 추구했던 강빈. 실용적인 새로운 나라 조선도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역사는 그녀를 불순한 행실자로 기록하였다.
인조실록. 인조 24년 3월15일.. 소현세자빈 강씨를 폐출하여 옛날의 입에서 사사(賜死)하고, 교명죽책(敎命竹冊), 인(印), 장복(章服) 등을 거두어 불태웠다. 의금부 도사 오이규가 덮개로 있는 검은 가마로 강씨를 싣고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나가니,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上의 뜻을 거슬려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않앗는데,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하였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에게 죄를 돌렸다.
위 사진의 왼쪽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이고 오른쪽은 후문인 선인문(宣仁門)이다. 죄인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서, 강빈 역시 바로 옆 선인문을 통해 쫓져나갔다.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시신도 이 문을 통해서 나갔다.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3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강빈의 불행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았다.逆敵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강빈은 남편 소현세자의 곁에 묻히지도 못하고 집안의 선산에 홀로 묻혀야 했다. 이 곳 경기도 광명시이다.
그로부터 강빈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지는 73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강빈의 억울함을 인정하여 그 명예를 회복하고 슬픔을 위로한다는 의미의 "민회빈(愍懷嬪)"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이다. 혼란한 시기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悲運의 女人, 강빈.. 오늘 날 역사는 강빈을 "현실의 고난을 헤쳐나간 강인한 여성리더"로 다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