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 출신의 특사 한 사람이 숨을 거뒀다. 119년 전 오늘이다.
그해 여름 헤이그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판사 이준, 전 공사관서기관 이위종.
'이상설'과 '이준'이 4월 하순 서울을 떠나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에 들어가 '이위종'과 합류했고, 세 사람은 6월 25일 헤이그에 닿았다. 고종의 전권위임장을 지닌 채였다. 일본 외무성이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들의 동향을 급히 타전한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특사단의 등장은 적의 기록으로도 입증되는 셈이다.
세 특사가 한 일은 명확했다. 을사늑약이 황제의 뜻이 아니라 강압의 산물이므로 무효라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각국 대표에게 돌렸고, 이위종은 각국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처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했다. 문서를 받아든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리고 7월 14일, 부사(副使) 이준이 헤이그에서 눈을 감았다. 유해는 그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도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준은 1895년 법관양성소를 1회로 졸업하고 이듬해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된, 이 땅 근대 사법의 첫 세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일진회를 앞세워 매국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맞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고, 반일진회 투쟁을 벌이다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됐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풀려난 뒤에는 '헌정연구회'를 만들어 다시 움직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상동교회에 모인 '전덕기', '이동녕' 등과 함께 조약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에 나섰다. '백범일지'는 이때 상소문을 지은 이가 이준이었다고 전한다.
1906년 6월 평리원 검사로 복귀한 뒤의 싸움은 법정 안에서 벌어졌다. 이듬해 초 황태자 가례를 앞두고 고종이 은사령을 내리자, 은사안 작성을 맡은 이준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옥에 갇힌 기산도 등 국사범들을 사면 명단에 올렸다.
법부대신 이하영, 재판장 이윤용을 정점으로 한 법부는 이 이름들을 명단에서 지워버렸다. 우국지사들이 풀려나면 제 자리가 위태로워질 자들이었다.
이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의 은사안을 함부로 삭제한 행위가 형법대전 위반이라며 형사국장 김낙헌을 기소한 것이다. 검사가 상관을 법정에 세운, 이 나라 공판 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대가로 이준 자신이 재판에 넘겨져 태 100대를 선고받았다. 태 100대면 면직이었다. 고종이 태 70대로 감형하는 칙명을 내렸고, 이준은 속전을 내고 풀려나 며칠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검사석에 앉았다.
봉건 권력의 비법 월권에 맞서 법의 이름으로 싸운 이 사건을 우리 준법투쟁의 효시로 꼽는 이유다. 그리고 한 달여 뒤, 그는 검사복을 벗고 헤이그로 가는 밀행길에 올랐다.
이준의 은사안이 지키려 했던 사람들, 을사오적을 겨눈 이들의 계보는 그가 떠난 뒤에도 이어졌다. 1907년 3월 '나철'과 '오기호' 등이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해 오적 처단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나철은 스스로 관에 나아가 지도(智島) 유배 10년 형을 받았다. 그해 겨울 특사로 풀려난 나철은 2년 뒤인 1909년 단군교, 곧 대종교를 중광한다.
"나라는 망했어도 도는 보존할 수 있다"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길이었다.
검사 이준이 법정에서 지키려 한 국사범들과 나철이 도모한 오적 처단은 같은 과녁을 겨눈 두 개의 화살이었고, 이준이 헤이그에서 몸으로 증언한 국혼은 나철의 중광으로 형체를 얻었다. 동지란 반드시 한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같은 일을 나누어 맡아 끝내 함께 이루는 사람이다.
그 증거가 특사단 안에 있다. 보재 이상설이다. 그는 헤이그 이후 연해주로 돌아가 '권업회'를 세우고 대한광복군 정부를 주관했는데, 동시에 대종교의 핵심이기도 했다.
1914년 나철이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며 동·서·남·북 네 개 도본사(道本司) 체제를 갖출 때, 노령의 북도본사 책임자로 임명된 이가 바로 '이상설'이다. 헤이그 특사단의 정사가 곧 대종교 북방 교구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은, 국권 회복 운동과 단군 신앙이 한 몸이었던 그 시대의 구조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준의 핏줄도 이 길 위에 있다. 외아들 이용(李鏞, 본명 이종승)이다. 대종교 기록은 그가 입교한 뒤 무장투쟁에 나섰다고 전한다. 그는 중국에서 '한인사회당'과 '고려의용군' 등에 참여하며 아버지와는 다른 노선,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을 걸었다.
해방 후 서울에서 '신진당'을 이끌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 북에 남았고, 그해 9월 출범한 북한 초대 내각의 도시경영상이 됐으며 이후 사법상과 무임소상을 지냈다. 1954년 세상을 떠나 평양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그 곁에는 아버지 이준의 가묘가 있다. 아버지의 유해는 1963년 헤이그에서 봉환되어 서울 수유리에 안장됐다.
한 부자의 무덤이 서울과 평양에 나뉘어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남에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고, 아들은 북에서 열사로 대접받는다. 이준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갈라진 반도 양쪽 모두가 붙들고 있는 드문 기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 오랫동안 이준은 만국회의장에서 배를 갈라 피를 뿌린 인물로 전해졌다. 독립군가 가사에까지 들어간 이 할복설은 망국의 분노가 빚어낸 서사였다.
1956년 문교부의 요청으로 조사가 이뤄졌고,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결이 아닌 쪽으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자결이 아니라 해서 그의 민족의식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상관을 기소하고 태형을 받아가며 법을 지킨 검사, 회의장 문이 닫힌 이국땅에서 통분 속에 스러진 특사. 이 삶은 극적인 각색 없이도 이미 순국(殉國)이다.
119주기의 과제는 그래서 두 겹이다. 기록은 정확하게, 기억은 온전하게. 검사 이준, 공진회 회장 이준, 상관을 기소한 이준, 그리고 헤이그의 이준으로 이어지는 삶의 전모를 복원하는 일.
그가 지키려 한 국사범들과 나철의 중광, 이상설의 북도본사, 남과 북으로 갈라진 그의 후손까지 시야에 넣는 일. 그것이 119년 전 오늘, 돌아오지 못한 길을 떠났던 한 사람에 대한 온당한 예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