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ㄴ)
2월의 둘째 주 주일이며 동시에 2월 11일인 오늘은 교회 안에서 세계 병자의 날로 기려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2월 11일인 오늘이 세계 병자의 날로 기려지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바로 오늘인 1858년 2월 11일에 자신을 드러내신 성모님의 기적과 관련됩니다. 1858년 2월 11일 프랑스 루르드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 성모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의 그 같은 발현은 교회의 저명한 추기경이나 주교, 사제 수도자에게 이루어지지 않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가난한 시골의 14살의 어린 소녀 베르나데뜨 수비루에게 일어납니다.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집안을 따뜻하게 할 땔감을 구하기 위해 개울을 건너려 하는 베르나데뜨 앞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고 그로부터 18차례에 걸쳐 그 여인은 소녀에게 나타나 여러 가지 메시지와 샘물을 통한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성모님이 발현한 미사비엘 동굴 바닥에서 솟은 샘물을 통해 그 물을 마신 이들이 병으로부터 낫게 되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그곳으로 찾아와 기적을 갈구하게 되고 교회는 공식적으로 그 기적을 심사한 후, 1862년 성모님이 발현하신지 4년 후 이 모든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곳을 성모성지로 선포합니다.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년 6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루르드 성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곳 성지를 재임 중 세 번이나 방문하고 1992년 5월 13일, 루르드에서 성모님이 발현한 사건을 기억하는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2월 11일을 모든 병자들을 기억하는 세계 병자의 날로 거행하도록 제정하였습니다. 이 같은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병자들을 위한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 곧 육신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깨끗이 낫게 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레위기의 말씀은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규칙과 법규’들의 모음집인 레위기의 내용 가운데 악성 피부병인 나병에 관한 규정을 이야기합니다. 곧 나병에 걸린 이들은 하느님께 합당치 못한 이들, 곧 정결하지 못한 부정한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 스스로를 부정한 사람이라 외쳐야 하며 다른 이들과 격리 수용되어야 한다고 레위기는 이야기합니다.
이 같은 오늘 독서의 내용은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병에 걸린 것이 왜 하느님께 합당치 못한 부정으로 여겨지며 병으로 고통 받는 것도 서러운데 부정이라는 또 하나의 올가미를 씌우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정결과 부정을 나누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을 ‘나병’이라는 병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병이란 균에 의해 피부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몸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치명적 병을 말합니다. 현대에는 그 치료법이 개발되어 더 이상 불치병으로 인식되지 않지만, 유다인들의 상황 속에서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인 동시에 피부의 접촉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염된다는 이유로 나병에 걸린 이들은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수용되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배경 속에서 오늘 제 1 독서의 레위기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서는 나병에 걸린 환자를 계속해서 공동체 안에 둘 수 없는 이유로 그를 격리시켜야만 했던 유다인들은 사제에게 나병의 판단의 권한을 줌으로서 사제를 통해 환자를 격리할지 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이로써 공동체는 전염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오늘 제 1 독서의 레위기의 말씀에 담긴 나병에 관한 규정들로서 나병에 걸린 이들은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레위기의 이와 같은 말씀은 오늘 복음의 말씀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오늘 복음에서 역시 나병에 걸린 환자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지방을 중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한 나병환자가 다가와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은 말로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ㄴ)
오늘 제 1 독서의 레위기의 내용을 감안해 볼 때,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주위에는 언제나 수없이 많은 군중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나병에 걸린 이 환자가 어떻게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앞에서 이와 같은 청을 드릴 수 있었는지 의아합니다. 오늘 독서의 레위기의 규정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그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함부로 갈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 곳을 가게 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나병에 걸린 부정한 사람이라고 큰 소리로 세 번을 외침으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곁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스스로 막아야 하는 규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수많은 군중들 한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군중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분께로 다가가는 방법 외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앞으로 다가와 청을 올렸습니다. 그는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괴롭히는 이 나병이라는 지독한 병에서 벗어나고자, 병으로 인해 모든 이들로 격리되어 소외감과 고독함에 몸서리쳐야만 하는 지옥과 같은 하루하루에서 벗어나고자 모세가 정한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곁으로 다가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이르러 그는 다음의 한 마디 말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스승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ㄴ)
예수님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한 마디 말로 청을 올리는 나병환자를 보고 마르코 복음사가가 분명히 지적하듯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이에 예수님을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ㄴ)
예수님은 고통 속에 있는 나병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가 겪고 있는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깊은지를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으로 느끼시고 그 고통에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에 그 분은 가엾은 마음으로 나병환자에게 다가가 그의 마음의 고통을 함께 나누십니다. 그리고 아무도 다가가지 않고 만지려 하지 않는 그 나병환자에게 손을 얹어 그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나병환자를 대하는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그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지금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공감’(共感)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감’(共感), 말 그대로 ‘함께 느낀다’는 뜻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이와 함께 그 고통을 느끼고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이 ‘공감’의 모습,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내 곁에 있는 형제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그 형제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마음의 나병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병이란 병이 감각이 사라지며 무감각해진 상태에서 몸의 일부분을 잃게 되는 병이라면, 내 곁의 형제의 아픔에 무감각한 것, 아파하는 형제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의 나병, 영혼의 나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마음이 무감각해지는 병, 영혼의 나병에 걸려 있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제 2 독서의 코린토 1서의 말씀 안에서 바오로 사도는 정결과 부정이라는 유대의 규정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린 코린토 공동체에 다음의 말로 냉엄하게 경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유다인에게든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 10,31)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율법의 규정에 사로잡혀 무엇이 부정한지 무엇이 정결한지를 따지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본질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때로 아니 너무도 자주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구실로 나 자신을 내세우고 심지어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을 하며 나를 내세우고 앞세우려 합니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은 나병이라는 고통스러운 병에 걸린 이웃 형제를 매몰차게 외면하며 율법의 규정만을 찾던 예수님의 곁에 있던 이들과 다르지 않으며, 오늘 제 2 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냉혹하게 비판하는 율법의 규정만을 내세우며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아니, 오히려 교회의 방해가 되는 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은 바로 바오로 사도의 다음의 말에 모두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은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오늘 복음이 전하듯, 바로 이 병, 곧 나병에 걸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며 그들을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려하지 않는 나병환자의 곁으로 다가가 그에게 손을 얹으며 그의 병을 낫게 해 주시는 분, 바로 그 분이 우리가 믿어 고백하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본받으려 노력하십시오.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웃에 대한 관심은 내버려 둔 채,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의 나병에 걸려 하느님께 그리고 교회에 방해가 되지 말고,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와 고통들도 모두 감싸 안아주시는 분, 그 감싸 안음으로 모든 아픔의 상처를 낫게 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본받으려 노력하십시오. 그 분은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해 주셨듯이 우리 마음의 병을 낫게 해 주실 분이십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바 그대로 병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성모님을 통해 하느님이 베푸신 루르드의 기적을 체험한 우리들이 우리 주위의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동시에 우리 각자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 맡겨 드리며 여러분 모두가 그 분의 사랑으로 모든 상처가 깨끗이 나아 여러분이 체험한 그 분 사랑의 힘을 다른 이에게 전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나병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