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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에서 온 편지
김 정 한
어떤 문예평론가가 나를 평하기를 체험하지 않은 일은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거니와, 사실 나는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는 자신이 없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먼 옛날의 인류 생활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도처에서 열심히 고분을 파헤치듯이, 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진실의 한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여름 강원도의 탄광 지대를 몇 군데 돌아다닌 일이 있다.
그때 다행히 어떤 광부의 집 (주인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에서 오끼나와란 일본 섬에 계절노동자로 가 있다는 그의 딸이 보내온 편지 뭉치를 얻어 볼 수가 있었다. 나는 나를 그 댁에 소개해준 친구의 조언도 참고하고 또 빠진 연대라든가 숫자 따위를 아는 대로 보충해서 여기에 발표하기로 했다.
1월 16일
어머니, 편지 늦었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가거든 곧 편지 내라고 하셨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시일이 걸린 줄 아세요? 꼬박 한 주일이 넘게 걸렸답니다. 서울서 부산까지는 기차로 왔지만 부산서는 계속 배만 탔어요.
그것도 어디 사람만 싣고 다니는 뱁니까. 일본 고베란 데서는 화물선을 탔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수출되는 우리 계절노동자들은 무슨 짐덩어리처럼 다른 거추장스런 짐짝들과 함께 마구 배에 실렸지요. 홍콩으로 수출되는 돼지― 아니 그 얘기는 집에 돌아가서 하겠어요.
“이게 무슨 짓이야?”
남자 노무자들은 이런 불평도 하였지만 여자―스물 안팎의 우리 처녀 노무자들은 그런 말도 못 했습니다. 다만 광산 지대의 근로자의 가족들을 돕는다는 명목은 좋았지만 그러한 식으로 우리들을 수만 리 타국의 외딴 섬으로 끌고 가는 우리나라 재단법인인 무슨 ‘기능개발협회’ 사람들을 속으로 원망했을 뿐입니다. 서울 일원에서 모집했다는 가난한 집 청년 333명과 강원도와 전라도의 탄광촌 출신 처녀 311명, 도합 644명은 이렇게 해서 일본 오끼나와란 먼 섬으로 오게 되었답니다. 여자들은 열여덟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의 모두 저와 같은 처녀들이었지요. 왜 하필 처녀들만 모집 하느냐고 하시 잖았어요?
어머니께선 그때 대동아전쟁 당시에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라 해서 우리나라 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던 얘길 하시면서 몹시 걱정을 하셨지만, 이번은 절대로 그렇지 않으니까 안심하세요. 사탕수수를 베는 게 일이랍니다.
오끼나와 본섬에 닿자마자 우리는 곧 이곳 분밀당공업협회란데 인계되어, 본섬 이외의 여러 외딴 섬들의 농가로 분산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같은 강원도 출신 처녀들은 모두 미나미 다이도오지마란 섬으로 옮겨졌습니다. 오끼나와 본섬에서 배로 꼭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곳이랍니다. 전라도 처녀들도 물론 이 섬에 많이 왔습니다.
기껏 한 8백여 가구의 농가가 있는 섬이지만 사탕수수와 파인애플로 꽤 재미를 보는 곳이래요. 우리는 이곳 한 농가에 한두 명 내지 대여섯 명씩 분산해서 입주하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여자머슴이 된 셈이지요.
우리 황지(黃池)에서 온 애들 중에서 막순이와 두리는 나와 함께 ‘하야시’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입주한 후 사흘 동안은 그들의 생활 방식 이라든가 작업에 대한 예비 훈련을 받았어요. 우선 다급한 대로 쓰이는 말도 몇 마디씩. “오하요우 고자이마쓰”란 건 아침 일어나서 하는 인사말이랍니다. 되게 길지요? 막순이는 “오하요우 고자이마쓰”의 ‘고’자를 자꾸만 ‘꼬’라고 말음해서 그 집 식구들의 웃음을 샀지요. 계집앤 왜 그렇게 혀가 잘 안 돌아가는지.
주인 영감은 나이가 돌아가신 아버지 정도로, 사람이 퍽 어질어 보입니다. 대동아전쟁 때는 라바울이란 섬에까지 가서 죽다가 살아왔다나요. 흔히 보는 일본 사람들처럼 수염 자국도 그다지 퍼렇지 않고 역시 노동일을 많이 해본 듯 마디가 툭툭 튀어나온 손짓으로 이것저것 깍듯이 가르쳐주면서 늘 얼굴에 미소를 띠우곤 합니다.
“꼬자이마쓰, 알아듣겠나?”
그는 어느새 막순이를 ‘꼬자이마쓰’라고 불렀습니다.
“하이(네), 꼬자이마스.”
막순이년은 꼬자이마쓰란 말을 아무데나 붙여대지요. 어디 가도 털털한 애니까요.
하야시 노인의 집은 세운 지가 얼마 안 되어 보이지만 우리 한국 농가처럼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자는 방은 헛간이 거의 차지하고 있는 아래채에 붙어 있지만 식사는 주인집 식구들과 함께 안채에서 합니다. 그러니까 좋게 말하자면 같은 식구가 된 셈이지요.
떠나올 때 어머니께선 학질모기 걱정을 하셨지만 모기장도 있고 하니까 걱정 마세요.
1월 25일
어머니, 집에는 별일 없겠지요. 여긴 사탕수수 거두기가 한창입니다. 정월부터 4월까지가 고비랍니다. 꼭 우리나라 모내기 때처럼 온 식구가 들에 가 사는 듯합니다.
수수는 어른들의 키가 넘도록 자랐는데 밑둥치가 늙은 죽순 둥치처럼 굵고 질겨서 그놈을 휘어잡고 베자니 금방 부르트더군요. 그러나 곧 굳어져서 이젠 별로 아프진 않아요. 낫이 한국 낫보다 커서 손을 다칠까 염려가 되었지요. 그러나 그것도 이젠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하야시 노인도 할머니도 다 같이 낫질을 하지요.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아들도 곧잘 베어요. 아들도 아버지를 닮아 부지런하고, 우리에게도 친절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아요. 이름이 ‘다케오’라나요. 나이 스물일곱이나 되지만 아직 장가도 들지 않고 있어요.
어머니, 참 이 댁 수수밭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하시겠어요? 어머니가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겝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꼭 백사십 마지기가 넘습니다. 그게 다 수수밭이랍니다. 물론 우리가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하야시 씨네 댁만이 아닙니다. 이곳 남북 다이도오지마의 농가들은 대개가 그런 정도의 수수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그래서 일손이 제일 바쁜 요즘 철에는 옛날부터 외지에서 계절노동자들을 많이 데리고 왔답니다.
옛날이라 해도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머 처음에는 자유 중국의 땅인 대만에서만 데리고 왔다나요. 그러던 것이 자기 나라 정부가 중공(中共)과 국교를 트고부터는 대만 사람들을 못 쓰게 됐대요. 그래서 대신 한국에서 노무자들을 모집해오게 된 거래요.
“모든 것이 다 전쟁의 탓이지. 지긋지긋한 그놈의 전쟁…….”
하야시 노인은 언젠가 저녁상을 물리구 나서 자기들이 살던 본 섬 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구두덜거리더군요.
“너희들의 나라에서 해방의 해라고 말하는 바로 그해 봄이었지. 그해 4월 초하룻날 이래, 무서운 화력을 자랑하던 미군 부대가 노도처럼 쳐들어와서 육십여 곳이나 되는 이곳 섬들을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대. 나는 그 당시 라바울이란 먼 남방 섬에 출정해 있었지만, 오끼나와 본섬에 살고 있던 가족들과 집은 아주 결단이 났지 머. 자석이라고는 단둘 있던 오뉘는 그때 없어지고 저 늙은이만 어째 용케 살아남아 거지가 되어 있더군·…‥ 어떻게 찾았느냐고? 행여 내가 살아 돌아와서 옛날 살던 곳을 찾을까 싶어, 미국 군사 기지가 되어 있던 옛 집터 언저리를 넋 잃은 사람처럼 매일같이 헤맸지.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나잖았겠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지. 자식과 집을 송두리째 빼앗긴 두 거지가 부둥켜 안고 울다가 코 큰 파수병이 ‘깟땜(꺼져)’ 하는 바람에 쫓겨났지 머. 그래서 죽지는 못하고 떠돌다가 겨우 이 섬으로 와서 이런 고생살이를 시작했단다. 어느덧 삼십 년이 가까워오는군그래.”
이렇게 말을 마친 하야시 노인의 입가가 별안간 실룩실룩하잖겠어요. 아마 어떤 저주와 분노의 발작인 듯싶었습니다.
“그럼 다케오 씨는 여기서 태어났겠네요?”
제가 이렇게 뒤퉁스런 소리를 하니까, 곁에 있던 아들이 얼른 말꼬리를 낚아채어,
“그래. 난 이 섬의 하야시 가의 중시조²야.”
하고 웃더군요. 그러나 그의 웃음도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어요.
진절머리 나는 부모들의 과거가 듣기 거북했던 게죠.
물론 그는 전쟁을 직접 겪지는 않은 청년입니다. 하지만 그 또래의 일본 청년들은 2차대전― 그들은 소위 대동아전쟁 때 그들의 부모나 가족들이 입은 피해와 고통을 언제까지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전쟁이란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를 낼 뿐 아니라, 얼굴에 핏대를 올리거든요. 그런 점이 성도 이름도 뺏기고, 가족이랑 이웃 사람들이 수십만 명이나 징용으로, 정신대로 끌려가 죽고 병들고 했어도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느냐는 듯이 시시덕거리게 마련인 우리나라 일부 젊은이들과는 다른 것 같은데, 그건 저의 잘못된 생각일까요?
하야시 노인이나 다케오 씨는 또 저희들과 잘 모르고 있던 우리들의 과거 ―식민지 시대의 일까지 알려주면서 때로는 동정도 해주어요. 창피해서 듣기 싫은 일도 많더군요.
그보다 오늘은 어머니께서 궁금하게 여기실 이곳 사정이나 생활 모습 같은 걸 알려드릴게요.
우리나라에서 수만 리 떨어져 있다는 얘긴 저번에 했지요. 이곳 농가들은 우리나라의 시골집들과 비슷합니다. 대개 초가로 태풍이 잦은 곳이라 우리나라 제주도 지방의 집들처럼 모두가 높은 돌담에 에워싸여 있어요. 뜰과 울안은 훨씬 넓고요. 우리들과 다른 점은 방과 방 사이가 토벽 대신 널빤지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겝니다.
우리가 들어 있는 집은 비교적 큰 농가인데, ‘우후야(母屋)’란 ―우리말로 하면 안채는 붉은 기와를 이었고 우리가 거처하는 아래채는 갈대 이엉을 덮었지만 널따란 헛간과 머슴들을 위한 방이 둘, 그리고 ‘후루’라고 부르는 변소가 붙어 있어요. 그리고 참, 이곳 변소는 꼭 우리나라 제주도 농가처럼 돼지우리를 겸하고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변소에 들어가기가 겁나데요. 그놈이 밑에서 쳐다보며 꿀꿀대거든요. 막순이년은 질겁하고 튀어나온 일까지 있었지요.
식사는 ‘우후야’에서 하는데, 밥은 안남미 비슷한 오끼나와 쌀과 보리 그리고 조로 지어요. 때로는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물론 온 가족이 다 그렇지요. 가끔 돼지고기와 염소고기도 얻어먹지만 좀 싱거운 게 덜 좋아요.
옛날에는 독사와 학질모기가 들끓었다지만, 폭격을 많이 받은 탓인지 지금은 많이 퇴치되어 그것으로 사람이 죽거나 하는 일은 드물답니다. ‘하부’라고 불리는 이곳의 무서운 독사는 능글맞게 밤에만 나타나서 사람이나 가축을 해친다고 하나 우리는 아직 한 번도 그놈을 보지 못했습니다. 밤에는 모기장을 꼭꼭 치고 잡니다(여기는 일 년 내내 그런다나요). 같이 온 두리년이 학질을 한 번 치르고부터 하야시 노인은 자주 주의를 시킵니다.
“모기장 밖으로 다리 내밀지 말아!”
머슴이 병나면 주인이 손해를 보기 때문일 테지요.
그리고 일 년에 농사를 두 번 짓는 곳이니까 햇볕이 몹시 따갑습니다. 한국처럼 춘하추동이 있는 게 아니고 봄과 여름 두 철뿐인데, 소나기가 잦은 것과 여기 말로서 ‘가―치베―(남풍)’니 ‘미―니시 (신북풍)’니 하는 계절풍의 덕으로 그럭 저럭 무더위를 이겨나가고 있답니다.
그럼 너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2월 4일
보내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오빠가 또 고깃배를 타시련다고요? 작년 태풍 때 그렇게 혼이 나고 다시는 안 타시려더니…… 없는 사람은 할 수 없는가 보지요. 이번에는 좀 실한 배나 타셔얄텐데. 선주도 남의 목숨 귀한 줄 아는 분을 골라서.
어머니께선 아직도 껌정 빨래 못 하게 된 것이 그렇게 서운하고 답답하신 모양이지요? 매일같이 탄광에서 더럽혀 오시던 아버지의 그 흙과 땀과 무연탄 가루에 짓이겨진 작업복! 매일같이 그걸 씻는 일을 숫제 낙으로 삼으시듯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옵니다. 그래서 편지를 읽다가 또 울었지요. 지난해 가을, 갱목도 낡고 썩은 지하 수천 척의 굴속에서 낙반사고로 생목숨을 버린 아버지의 무참한 모습과, 어머니의 실신하시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올라서요.
그러다가 우연히 툇마루께로 돌아오던 하야시 노인에게 들켰더랬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지난날의 고생살이를 더욱 잘 알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딜 가도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더욱더 절실히 깨닫게 되었답니다.
막순이란 년이 괜스레 돌아가신 아버지의 얘길 꺼내자,
“머, 광산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산일은 언제부터 했는데?”
하야시 노인은 갑자기 눈을 커다랗게 뜨시더군요. 그리고 내 얼굴을 뚫어지듯 내려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을 해주었지요.
“어릴 때부터랍디다. 열여섯 살 때라던가요. 징용으로 북해도에 끌려가서 북탄(北炭) 이라든가 어딘가 하는 탄광에서 처음으로 버럭³통도 지고, 막장⁴일도 배웠답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한국 노동자들을 머 ‘다꼬⁵(문어 새끼)’라고 불렀다지요? 한국인 합숙소를 ‘다꼬베야(문어 수용소)’라 하고요.”
들은풍월로 이렇게 대답했더니,
“머, 북해도? 다꼬베야?”
하야시 노인은 눈이 더욱 휘둥그레지면서 느닷없이 내 거칠어진 손을 덥석 쥐다가 말고, 자기 방으로 횡 돌아가더군요. 그리고 한참 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요.
나와 막순이와 두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놀랐습니다. 하야시 노인이 무슨 까닭으로 그러는지 얼른 짐작이 안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속으로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의 얼굴을 바로 보기조차 서먹거려지더군요.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 하야시 노인이 그렇게 진절머리를 내던 까닭을 알게 되었어요. 사탕수수를 한참 베고 나서 쉬던 참이었습니다. 우리는 저녁 해가 한결 붉게 비치고 있는 산호초를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여러 가지 모양과 무늬를 가진 고기 새끼들이 불그레한 산호초의 가장자리를 바쁘게 맴돌고 있었어요.
그때 마침 내처 기가 죽어 있는 내 표정을 눈치 챈 다케오 씨가 가까이 오더니,
“봇진상(복진이), 걱정 필요 없어.”
하고 모든 걸 털어놓습디다. 그의 아버지 하야시 노인 역시 젊었을 때 북해도의 탄광에서 막장일을 했다나요. 그런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에 아버지 얘기에 별안간 어떤 충격을 받아서 그랬을 거라고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죠.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있고부터 하야시 노인은 광부들의 딸인 우리들에게 한결 친절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제국(일제) 말년에 국민징용령이 발표되고부터 십육 세 이상 오십삼 세까지의 한국인 노무자가 칠십여만 명이나 일본에 끌려왔다지만, 적어도 그중 이십만 명가량은 아마 북해도 탄광들이나 땅굴 파는 일에 동원됐을 거야. 봇진상 아버지도 틀림없이 그중의 한 사람이었을 거야. 어쩜 나와도 만났을는지도…….”
하야시 노인은 이틀 전과는 아주 달리 담담한 어조로 당시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다꼬, 빨랑빨랑 움직여!”
총칼을 든 감독들은 이렇게 호통을 치며 한국인 노동자들을 개 패듯 팼고, 만약 부상이라도 당해서 치료에 시일이 걸릴 만하면,
“그놈은 수렁이나 버럭탕에 갖다 던져버렷! 반도(조선)에 가서 다시 끌고 오면 되잖아.”
하는 식으로 한국인 막장꾼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다루었다고 하더군요. 어찌 같은 사람으로서 사람을 그렇게 다루었을까요?
그런 모욕과 고생을 당하다가 해방이 되어 조국에 돌아온 아버지는 무슨 팔자기에 또 막장일을 하다가 결국 수천 길 갱 속에서 이승을 버리고 말았을까요.
“진짜 해방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하던 하야시 노인의 며칠 전의 말 서두가 문득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아들 다케오 씨는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더군요.
“그때에 비하면 그래도 너희들의 나라는 많이 발전을 한 셈이지. 열두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처녀 미혼녀들을 무려 이십만 명이나 여자정신대란 이름으로 끌고 와서 군수 공장 노무자로 일본군인 아저씨들의 오물받이로 상납했더랬는데, 지금은 처녀들이 이렇게 달러를 벌기 위한 인력 수출에 동원되고 있으니까 말야, 안 그래?”
하며 입을 약간 비쭉하더군요. 그러나 그의 말눈치는 우릴 업신여긴다기 보다 차라리 어떤 의미로 동정하는 듯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한국 처녀 한 사람이 하루에 일본 군인 몇 사람을 상대해야 됐는지 알아? 자그마치 삼백 명꼴이래, 삼백 명!” 하는 데는 분하고 창피해서 차마 낯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었지. 식민지 백성들이었으니까.”
다케오 씨는 우리를 위로하듯 이렇게 보태더군요.
어머니, 그게 정말일까요? 대동아전쟁 때 그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정말 일본으로 끌려갔을까요? 다케오 씨는 자기 나라 국회 기록에도 또 공안청 자료 중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우겨댔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하긴 우리 고향에는 정신댁 딸이라든가 함백댁 딸처럼 여자정신대에 끌려가서 아직도 못 돌아온 처녀들이 (이젠 거의 할머니들이 됐을걸요) 있긴 했지만……
다케오 씨는 저희 나라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 미안스러웠던지, 아니면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던지 그렇게 많은 한국인 노무자로 또 위안부로 끌고 오는 데는 응당 한국인 자신들의 협조도 컸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늘 점잖게 말하시던 민족반역자라든가 뭔가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테죠.
“가령 학도 지원병의 경우를 말하더라도 당시 한국 사회의 소위 일부 지도자란 위인들이(정말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억울한 죄명으로 감옥살이를 하거나 아니면 무서운 감시를 받고 있었다죠?) 버젓이 일본에까지 찾아가서 한국인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지원을 권장했는가 하면, 그것을 거부하고 피해 다니다가 망명한 어른들을 찾아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군에 가담한 청년들이 있는 반면에, 할 수 없다는 듯이 지원병이 되어 그들의 뒤통수를 쏘아댄 사람들도 많다잖아? 오히려 그 편이 훨씬 더 많았지?”
다케오 씨는 약간 언성을 높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남의 일에 숫제 어떤 의분까지 느꼈던 모양이지요. 오끼나와 본토에 있는 미군 기지의 반환 투쟁에 가담했다가 터졌다는 오른쪽 눈 밑 흉터가 그날따라 유심히 쳐다보이더군요.
“그러니 개판이지 뭐야!”
다케오 씨는 이런 말을 내뱉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서더군요. 산호초에는 ‘구로우시오(黑湖)’가 점점 밀려들고 있었어요. 우리도 따라 일어섰습니 다.
우리는 다케오 씨의 말을 그대로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놓인 처지도 처지였지만 반박할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미 들은 말이 있었거든요. 안 그래요, 어머니? 뿐만 아니라, 우리는 며칠 전 그들의 고구마밭 끄트머리 바닷가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두 개의 석탑을 본 기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건 미군이 쳐들어왔을 때 군인들과 함께 나서서 싸우다가 죽거나 자결한 남녀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석탑이야.”
다케오 씨는 석탑을 가리키며 자랑삼아 그렇게 말했거든요.
거기 서 있는 ‘건아(健兒)의 탑’은 남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백합(百合)의 탑’은 여학생들을 위한 것이래요.
어머니, 정말 독종들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잿더미가 된 황무지를 냉큼 일구어 지금과 같은 거대한 농장들을 차릴 수 있었고, 그러지 못했기에 우리들은 이렇게 또 그들의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에겐 무언가 잘못된 게 있는 것 같아요. 죄 없는 백성들까지 고통과 비웃음을 받아야 하는……
2월 20일
너무나 오랫동안 편지 못 올려 죄송합니다. 어머니, 오빠는 자주 들르십니까? 옛날과는 달라 나라마다 경제 수역 이백 해리니 뭐니 하고는 야단인 모양이니 고기잡이 일도 까다로워졌겠지요. 게다가 보나마나 낡아빠진 우리 어선들이 돼서·… ¨
참 먼젓번 어머니 편지에 동생이 공부 잘 안 하고 저희반 대표 선수가 되어 배구 연습만 한다고 했지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걱정이 되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뭐 그럴 것도 없을 것 같아요. 없는 집 딸애가 공부를 잘하면 대학을 가겠어요 뷜 하겠어요. 무슨 올림픽에 나가서 입상을 하니까 국위를 선양했느니 대한의 딸이니 뭐니 하고 야단들이더군요. 신문에도 크게 나고 라디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그러더구먼요. 그러니까 대한의 딸이 되려거든 저 좋아하는 배구라도 실컷 해보라세요.
참, 그건 그렇고 어머니, 우리나라 국회의원이나 높은 양반들은 이곳 오끼나와에는 왜 잘 오지 않는답니까? 올 들어 이달(2월) 말까지 불과 두 달 사이에 각종 명목으로 외국 나들이를 하는 국회의원이 자그마치 백이십여 명이나 된다잖아요.
지방 출장보다 쉬운 외유(外遊) 5대양 6대주에 한국 국회의 원 |
이런 대문짝 같은 기사 제목이 신문에 덩 그렇게 나와 있더군요. 5대양 6대주를 줄지어 누비듯 한다면서, 더더구나 일본은 이웃집 들르듯 하면서 천여 명의 광산촌 딸들이 수출되어 마소처럼 고달픈 노동을 하고 있는 오끼나와의 섬들에는 왜 얼씬도 않는지 모르겠군요. 하긴 만국해양박람회라든가 뭔가 해서 구경거리가 있었을 때는 더러 다녀갔다고 합디다만……
어머니, 제가 이런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며칠 전 오끼나와 본 섬에 있는 ‘고자’시란 데 갔다가 우연히 우리나라 노무자들과 고아들이 겪고 있는 너무나 끔찍스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자’란 곳은 미군 상대의 유흥가로 발달한 순전한 군사 기지 도시라는데, 미군 병사(兵舍)와 미군 주택 그리고 그들과 군 관계 노무자들이 많이 드나드는 상점이랑 술집 또는 매음굴이 많은 곳이 랍니다.
얼바람⁵ 맞은 비가 찔끔거려 며칠 밭일도 잘 안되던 차에 마침 월급이라 해서 처음으로 얼마씩 받은 돈이(사실 그것도 우리들을 모집해온 개발협회 측 말과는 달랐지만) 있어서 헐찍한 옷이나 한 벌씩 살까 싶어 막순이와 저와 두리 세 사람은 다케오 씨를 졸라 구경 겸 ‘고자’시로 처음 나들이를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거리에는 안개가 질금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이랑 또 대뜸 보기부터 군 관계 일을 하는 듯한 노무자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양공주 차림의 아가씨들의 반지빠른⁶ 모습이 꽤 많이 보이더군요. 우리는 어떤 으리으리한 상점에 들렀으나 옷가지 같은 건 비싸서 못 사고 우선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사가지고선 다케오 씨가 안내하는 길 모서리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입구 역 바람벽에 ‘강장제 고려인삼 달여 먹고 기생 파티 즐겨보지 않으시렵니까?’ 하는 선전말에 우리나라 고전 무용을 추는 한국 기생 사진까지 곁들인 널따란 광고지가 붙어 있는 것이 여간 불쾌하지 않았지만 어찔 도리가 없더군요.
“오늘은 내 한턱 내지.”
다케오 씨는 우리들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잠깐 돌아보며 싱긋 웃었습니다.
“아이구 다케오상, 오랜만이구려. 왜 그렇게 안 보이세요?”
그와 숙면인 듯한, 광대뼈가 좀 불거진 오십 대의 여인이 반갑게 맞아주더군요. 우리는 곧 눈치를 챘지만 그분이 바로 그 가게의 주인이었습니다.
“수수밭을 다 치워야 오죠.”
그러고 다케오 씨는 우리가 잘 못 알아듣는 말로 무엇을 시키는 것 같더니, 안주인이 잠시 부엌으로 물러가자,
“너희들의 고국 사람이야. 예의 위안부 출신인데 이곳에서 술가게와 비밀로 히로뽕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말조심해야 돼, 알겠어?”
다케오 씨는 이렇게 미리 다짐을 받더군요. 그가 언젠가 우리에게 들려주던 여자정신대란 이름의 한국 처녀 위안부의 얘기―처녀 한 사람이 하루에 삼백 명의 일본군에게 몸을 바쳐야 했다는 그 끔찍스런 이야기도 필연 이 집 안주인에게서 들은 게로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는 목이 자라목처럼 약간 들어간 듯한 주인 아주머니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렸습니다. 위안부 퇴물이라니까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고향에도 못 가고 그런 데서 그런 짓을 하고 살아가는 그녀에 대한 가엾은 생각과 그녀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울분이 한꺼번에 끓어올랐었겠지요. 그녀들을 그러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처넣은 것은 다케오 씨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국에 와 있던 일본 관리들과 일본 군인들만의 죄는 아닐 젭니다. 울고불고 숨고 하던 처녀들을 억지로 끌어내는 데 갖은 방법우로 협조한 우리 사람들의 죄도 결코 작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자꾸만 들더군요. 어쩜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에서 내처 유력자로서 지도자로서 눌러앉아 국민 무엇을 부르짖으며 외유를 하고 돈을 벌고 세력을 누리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지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술을 들면 가끔 그런 뜻의 말을 했다고 기억합니다만……
아까 제가 말한 우리 국회의원들의 외유 붐에 관한 신문 기사도 바로 이 가게에서 보았지요. 뜻밖에 한국 신문이 한 장 반쯤 찢어진 채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거든요.
두리가 집어주기에 잠깐 들여다보았더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케오 씨가 고개를 쭉 빼고 흘끗하고는,
“응, 고국 신문인가? 이 집에선 꼭 한 부 받는 모양이더군. 한국 노무자들이 가끔 들르기도 하니까…….”
그는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달걀덮밥과 맥주를 가져온 안주인은 비로소 우리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다소 서툰 한국말로,
“돈 벌러 왔구먼. 딸라…….”
하며 다케오 씨의 곁에 바투 앉더군요. 그렇다고 수긍을 했더니,
“온 지가 오래되나요?”
하고 예사스럽게⁷ 묻잖겠어요.
“네 .”
해줬지요. 그러고 우린 밥만 먹었죠.
“다행이구먼! 요 며칠 전에 온 처녀들은 억울하게 된 사람이 많았지.”
그녀는 다케오 씨에게 맥주를 따르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다케오 씨가 돌아보자,
“그 무슨 기능개발협횐지 쇠발협횐지 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서 칠백여 명이나 되는 광산촌 처녀들이 실려 왔다지만 그게 다 약속대로 파인애플 공장이나 사탕수수 농가에 계절노무자로 들어가지 못하고 반이 넘는 사백여 명이 하수도 공사라든가 무슨무슨 건축 공사장으로 배치되어서, 사내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을 하고 있잖아요. 이따 갈 때 한번 돌아보세요.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고 블록을 쌓고 있는 광경은 정말 불쌍해서 못 봅니다. 게다가 품삯이나 어디 제대로 받고 있나요.”
이름 대신 상해댁으로 통해 있다는 안주인은 약간 체머리까지 흔들어가며 이렇게 제 일처럼 구두덜거리더니, 다케오 씨로부터 맥주잔을 확 뺏어들데요. 술도 곧잘 마십디다. 이내 광대뼈짬이 벌게지더군요. 광대뼈짬이 붉어지자 그녀는 더욱 야단스럽게 지껄이잖겠어요. 일본말을 쓸 때는 무슨 소린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언가를 따지려 드는 눈치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케오 씨는 순순히 술을 더 가져오게 하더군요.
상해댁은 그렇게 술을 권하거니 들거니 하다가, 무슨 생라으론지 저를 흘끗 쳐다보며,
“일본 놈들은 입이 열이라도 내게는 할 말이 없어. 누가 나를 이랬다고!”
여간 기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별안간 노랭⁸을 드리운 문간 쪽을 내다보며 한국말로,
“또 왔어? 날마다 오면 난 어쩌지?”
우린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대여섯 살 돼 보이는 거지애 하나가 발문⁹ 밖에 오똑하니 서 있더군요. 머리도 제대로 깎지 않은 계집 애였습니다. 거지애는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어서 들어와!”
상해댁은 그 애를 부엌 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고구마 삶은 건지 뭔지를 종이에 싸서 쥐어주더군요.
그것을 받아든 애기거지는 고맙다는 뜻일 테지, 상해댁의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저는 그것을 고국이나 어머니가 그리워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개만 꾸벅해 보이고 아장아장 밖으로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 애의 얼굴에는 벌써 웃음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게 누구냐고, 다케오 씨가 물은 모양인데, 상해댁은 웬일인지 우리 쪽을 보고 대답을 하더군요.
“한국에서 실려 온 고아야. 왜 처녀들도 그런 소문을 들었을 톈데? 무슨 개발공사라든가―한국에는 웬 놈의 ‘개발’이란 이름이 붙은 단체가 그렇게 많아? ㅡ아무튼 그런 장사 단체가 한국에서 고아 백여 명을 싣고 와서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돈을 많이 받고 불법 입양을 시켰더랬는데, 그 미군 아저씨들이 귀국할 때 같이 데리고 갈 수속이 미처 안 되어 그냥 길가에 버려두고 갔다나. 여긴 그런 애기거지들이 우글우글하다니까. 언젠가 신문에서, 한국 보사부란 데서 그런 짓들을 한 회사 책임자를 수사 당국에 고발하겠다고 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지만 저렇게 돌아다니다가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물에 빠져도 죽고……그저 그런 거지애들이지 뭐. 귀여운 ‘우리의 애기들’이 말야 요 며칠 전만 해도 기지 앞 산호초에 걸려 있는 그런 애의 시체를 본 사람이 있었다던가……”
상해댁은 ‘우리의 애기들’이란 말에 특별히 악센트를 넣는 것 같더니 느닷없이 ‘응응’ 하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겠습니까. 말과 웃음을 잃은 애기거지를 돌려보내자, 쌓이고 쌓인 어떤 설움의 동¹⁰이 술김에 갑자기 무너지기라도 한 듯이 불그레해진 광대뼈짬에 이내 눈물 얼룩이 지더군요.
다케오 씨도 어리둥절해 하며 아주머니가 술에 취했느니 술버릇이 어떻느니 했지만, 술을 입에 대지도 않은 우리도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그길로 밖으로 나왔다가 선창가를 향해 얼마 걷지 않아서, 공교롭게도 우리는 보슬비 속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한 떼의 한국 처녀들을 보게 되었더랍니다.
어떤 건축 공사장이었습니다. 자갈 궤짝을 무겁게 해 지고 기우뚱거리는 모습들! 얼굴은 이미 그을어서 검둥이가 다되었고, 땀과 비에 젖은 입성은 만판 거지꼴이었어요. 되도록이면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 눈이 가는 걸 어떡합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더군요.
이제 막 들은 상해댁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지요. 우리는 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운다고 해결이 되나? 쓸개 빠진 타협과 눈물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해!”
우리들의 심중을 짚었을 테죠. 다케오 씨는 갑자기 신경질을 내면서 이런 말을 내뱉더군요. 그러고서 그는 돌아도 안 보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지요. 처음에는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로서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으리라고 곧 이해가 가는 것 같더군요.
저는 그의 얄미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던 ‘건아의 탑’과 ‘백합의 탑’ 얘기를 문득 기억에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 사람을 왜 다꼬라고 부르는지 알아? 뼈다귀가 없다는 거야, 뼈다귀가……!” 하면서 빈정거리던 일도.
그날 밤 우리들은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쓸개 빠진 타협과 눈물이 우리들을 오늘과 같은, 아니 갈수록 더 어둔 불행 속으로 밀어 넣지나 않을까 해서……
어머니, 하도 억울해서 두고두고 써 보톈 편지가 너무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읽기에 힘드.셨겠지요.
-끝-
2016년 4월 4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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