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일본 고산지대에 펼쳐진 닛코(日光)국립공원의 가을 풍경
가을 들어설 즈음, 처음에 올 단풍은 그리 아름답지 않으리라 짐작했습니다. 맑은 날이 많고, 아침 저녁 온도 차가 커서 단풍 빛깔 고울 수 있는 조건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지난 여름의 무더위라고 생각했지요. 유난스러웠던 여름의 무더위는 나뭇잎들을 일찌감치 시들게 했거든요. 단풍 들 날씨가 좋다 해도 더위에 지친 이파리들이 다시 살아나 울긋불긋한 단풍 빛을 올리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몇몇 방송에서 올 단풍을 예상하면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만……. 예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하긴 자연의 앞날을 사람이 내다본다는 건 언제나 불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가을의 단풍은 여느 해에 비해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 초록의 싱그러움과 가을 단풍의 화려함이 이룬 조화 ○
단풍 잎 하염없이 떨어지는 이 아침의 《나무편지》에서는 일본 트레킹 이야기를 마무리하렵니다. 신비로운 풍경의 오제누마 호수에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행장을 꾸려 닛코국립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찾아보고 싶은 곳은 한없이 넓었지만 늘 그렇듯이 시간은 넉넉지 않았습니다. 오제누마를 떠나면서 다시 한 고개를 넘는 데까지는 이미 말씀드렸던 가지런히 깔린 목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몇 차례의 오르고 내리는 길이 되풀이되기는 했지만 대체로 편안한 길이었지요. 게다가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은 무시로 걸음을 멈추게 했고, 풍경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이어간 다리쉼은 이내 걷기의 고단함을 잊게 했습니다. 오제누마 호수에서부터 닛코국립공원에 이르는 숲길에서 마음에 담은 가을 풍경은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오제누마 호수를 벗어나면서 만나게 되는 숲길에는 하늘로 곧게 뻗은 일본이깔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오래 된 깊은 숲이라면 어디라도 그렇듯이 초록의 싱그러움이 깊었습니다. 걷는 길 사방으로 펼쳐지는 고산지대의 풍경은 고즈넉하면서도 풍요로웠습니다. 자작나무도 살기 어려운 고지대의 단풍은 붉은 계통의 단풍보다 노란 빛의 단풍이 더 많았습니다. 자작나무처럼 하얀 수피를 가진 사스래나무의 발가벗은 모습에서부터 적갈색의 단풍 빛을 올린 일본이깔나무, 여전히 초록을 잃지 않은 분비나무, 그리고 새빨간 빛깔을 올린 일본단풍이 어우러지면서 지어내는 가을 산 풍경은 어느 한 곳을 따로 짚을 것 없이 모두가 절경이었습니다.
○ 노란 빛깔을 배경으로 초록에서 빨강까지 ○
산을 걸으며 만나는 단풍 가운데에 압권은 무엇보다 새빨간 빛깔의 일본단풍이었습니다. 일본단풍은 우리의 단풍나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릅니다. 결각이 있는 것까지는 다를 게 없지만, 우리의 단풍나무가 7개 정도로 갈라진 것과 달리 일본단풍은 당단풍과 마찬가지로 9개 이상으로 갈라졌습니다. 또 갈라진 제가끔의 갈래가 우리 단풍나무에 비해 통통하다고 해야 할 만큼 살진 듯해 보입니다. 잎이 나눠진 갈래의 사이가 바짝 붙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러다보니, 잎 하나하나의 조형미가 성긴 우리 단풍나무보다는 단정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어린 애기의 오동통한 얼굴을 닮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기 좋은 높은 산에서 자라는 나무여서인지, 빛깔도 더 선명한 듯합니다.
초록에서부터 노랑과 빨강까지 온갖 빛깔로 단풍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고산 지대의 단풍 빛깔에는 단연 노란 빛깔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일본단풍처럼 새빨간 빛깔의 단풍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전체적으로 배경을 이룬다고 할 만한 빛은 노란 색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체적으로 빨간 빛깔의 단풍인 풍경보다는 환한 노란 빛을 배경으로 곳곳에 포인트가 될 만큼 강렬한 빨간 빛의 단풍이 끼어 있는 게 훨씬 돋보인 것 아닌가 싶습니다. 닛코국립공원까지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코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면 숲 안의 조붓한 오솔길을 걸었습니다. 숲 속으로 난 오붓한 길 곳곳에 스민 가을 바람과 숲의 향기를 천천히 들이마셨습니다.
○ 100미터 높이의 게곤폭포를 이룬 주젠지호수의 단풍 ○
닛코국립공원은 도치기현을 비롯해 군마현, 후쿠시마현, 니가타현에 걸쳐 무려 1천4백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광대한 지역입니다. 애초에 잡은 일정에는 오제습지가 중심이어서, 닛코국립공원을 돌아볼 겨를은 하루밖에 없습니다. 그 하룻만에 모든 볼거리를 섭렵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닛코의 명소 가운데 대표적인 주젠지호수를 먼저 들렀습니다. 주젠지호수는 2만년 전에 화산이 분화하면서 일어난 지형 변화로 생성된 호수입니다. 호수 가장자리까지 걸어서 들어가 보면, 바닥이 보일 만큼 물이 맑다는 것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곳은 수심이 1백 미터도 넘는다고 합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 걸을 수 있는 산책로를 걸으며 호수에 비친 주변 산악의 가을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주젠지호수에 고였던 물을 일본의 삼대 폭포 가운데 하나인 게곤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립니다. 인상적인 게곤폭포의 높이는 무려 97미터나 됩니다. 게곤폭포의 위용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마련한 엘리베이터도 인상적입니다. 1930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나중에 새로 고쳤다는 이 엘리베이터는 100미터를 1분 안에 내려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터입니다. 폭포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는 좋은 경험입니다만, 폭포를 즐기기 위해 밀려드는 관광객이 이룬 대기 줄에서 머뭇거리기에는 시간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멀리서 바라보는 전망대에서 폭포의 세찬 물줄기를 감상하는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 1천2백 년 된 산뽕나무의 추억을 마음에 담고 ○
사실 닛코국립공원을 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이번 일정에서 거의 덤에 속했습니다. 오제습지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나흘의 일정은 결코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닛코국립공원의 일정 부분은 버스를 타고 지나치며 몇 가지 포인트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젠지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걸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닛코를 보기 전에 일본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마라”는 말이 왜 그들 사이에서 하는 말인지 알 만했습니다. 특히 단풍 짙게 물든 가을 풍경을 놓고는 꼭 맞는 말이지 싶었습니다.
오제습지를 거쳐 닛코국립공원까지의 나흘의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했습니다. 《나무편지》에서 그 풍경들을 잘 보여드리려 했지만, 채 보여드리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꼭 보여드리고 싶은 나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트레킹 첫째 날 돌아보았던 산뽕나무가 그 나무입니다. 일본의 천연기념물인 1,200년 된 산뽕나무이지요. 마침 우리가 이 나무를 찾았을 때에는 병해충 치료를 위해 나무 주변에 비계를 설치해서 나무의 위용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나무를 찾아갔지만, 나무보다 더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 곁에서 만난 노파입니다. 1,200년 산뽕나무의 실제 임자인 그 노파의 순박한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가 되든 다른 곳에서 큰 뽕나무를 이야기할 때라면 일본의 이 산뽕나무와 함께 일본의 그 순박한 노파 이야기도 함께 하게 되지 싶습니다.
○ 모레… 둘째 주 수요일에는 상동도서관에서 뵈어요 ○
다시 또 내일모레면 십일월의 둘째 주 수요일입니다. 어김없이 부천시립 상동도서관에서넌 《나무강좌 -고규홍의 생태인문학 강좌》가 열립니다. 이번 강좌는 〈나무를 만나는 아주 특별한 방법〉을 이야기하렵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은 이 날은 제가 마련한 선물이 있습니다. 한해 내내 《나무강좌》와 《나무편지》를 아껴주신 분들게 해마다 이 즈음에 한번씩 준비한 선물입니다. 값 나가는 선물은 아니라 해도 저로서는 정성껏 마련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노랑 바탕에 초록에서 빨강까지 온갖 빛깔의 단풍을 마음에 담고 11월 12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