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거기 있었노라.
김 우 진
달구벌 서 북녘 대구의 외곽지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게 살던 그 곳
오봉산 비탈에 우리는 있었지.
가난한 것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모두가 가난했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사는 줄 알았던 곳
나 거기 있었노라.
여름에 자란 아카시아는
겨울이면 땔깜으로 모두 잘려가고
민둥산이 되어도
우리는
언젠가는 푸른 오봉산이 되기를
꿈꾸며 함께 자랐지!
이제 푸르럼을 더하는 오봉산
그러나, 우리는 꿈을 못다 펼치고
아직도 키워가고 있지만
오봉산처럼 푸르기를 바라는 것은
언젠가 이룰 날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보네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
그 때에도 내 말은
나 거기 있었노라.
삐걱거리는 교실바닥 창문 틈새로
겨울 바람이 차도
에디슨을 꿈꾸고
마리아엔드슨과 쇼팽을 생각하고
강소천을 흉내내고, 미켈란젤로를 모방하던
천진한 너희들과 함께
나 거기 있었노라.
돌뫼 못을 파고
기린도 만들고, 사자도 만들었었지.
참, 악어도 만들었었지?
떨어지는 폭포에는 물레방아도 돌았었지?
요즈음 인기가 있는 야생화도 심었고?
교실에는 도마뱀도 자라고, 청개구리도 있었지?
대나무로 만든 에펠탑 앞에서 사진도 찍었었지?
그 때 나 거기 있었노라.
선학 알루미늄, 대한방직, 내외방적, 무림제지
이제는 이름도 아슴한 공장들
그 속에 끄으름 먹음은 운동장
축구를 하고, 송구를, 배구를 해도
우리는 항상 앞장섰던 곳
이제는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곳
옛 모습이라고는
'만세에 빛날 침산 우리의 모교'뿐
나 거기 있었노라.
현미경으로 양파 껍질을 관찰하고,
수서곤충을 채집하러 무태에도 가고,
실과 시간에 고구마 튀김을 하다가
번데기 때문에 얼굴을 데어서
학교에도 못 오고
꾸중과 걱정을 함께 나누던……
이제는 잊기보다 더 생각해 보고픈
내 친구들이여……
나 거기 있었노라.
세월이 지나면 잊는다고 했던가?
잊고 싶지 않는데
자꾸만 하나씩 잊혀져 가는 것을
나이 탓으로 돌려보아도
안타까움만 남는데
일년에 한번 만나면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 우리의 만남
얘들아, 나 아직도 거기 있노라
그 침산 동산에
우리가 심었던 세코비아는
이제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큼 자라고
내 머리에도 백설이 내린 지 오래이건만
해마다 돌아오는 유월 셋째 주
만날 때마다 그리움은 더해가고
헤어지면 또 만남을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얼굴들이 늘어가기 때문만은 아니고
보던 얼굴을 못 보는 안타까움 때문인가 보네,
만나면 바보처럼 기뻐하고
헤어지면 벙어리처럼 그리워하는 날이
또 시작되는구나
그리움은 만날 수 있는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또한 만낳 수 있는 그리움인데.
그러나, 그리움은 깊어질수록 서글퍼지고
기다림은 깊어질수록 아름다워 진다네
기다림이 있는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는 날
그 때에도 나의 말은
나 거기 침산 동산에 너희와 함께 있었노라.
첫댓글 선생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유월 모임에 못가서 죄송합니다,참여하는 광희가 되도록 노력하겠읍니다.선생님 화이팅,,,,
선생님의 감동어린 글 우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여기 함축되어 있는듯 하군요 !....푸른오봉산을 꿈꾸면서 자란 우리가 벌써 중년이란 ....선생님의 제자들 ...잘 자랐습니다...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선생님 글쓰기가 텍스트로 되어 있지 않아 죄송합니다. 글을 제가 옮겼는데 바르게 했는지,.... 선생님! 사랑합니다.
자유게시판 글쓰기를 텍스트로 수정했습니다. 앞으로 글쓰고 올려도 글이 뭉치는 일은 없습니다. 항상 글 쓰고 글 선택시에 일반 글들은 텍스트로 하면 됩니다.
선생님의 기억이 우리들의 기억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보석같은 기억을 글로 올려 주어서 고맙습니다.가슴이 뭉클 합니다. 참으로 가난했지요.눈물이나려고 합니다.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쎠야 합니다 우리모두 마음을 모아 빌겠읍니다.
선생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선생님,선생님,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저희는 언제나 선생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언제나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거기에 계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자 김원택 올림
선생님 너무 감격 어린 글 보았습니다 이제야 선생님글 일게 되었어요 선생님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선생님 참말로 사랑 합니데이 이히히히히히